트로츠키와 야생란
이장욱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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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액션reaction은 즉각적인 반응에 불과하지만 리스판스response는 생각을 한 후의 응답이라는 어느 ‘미드’의 문장 하나가 하루를 가득 채우는 날이 있었다. 관습적 사고, 습관적 행동은 반응이다. 그것이 본능적 욕망에 기인한 것이든, 후천적 반복 훈련에 의한 것이든, 조건 반사든, 무조건 반사든 상관없다. 리액션은 결국 관성의 법칙을 따른 결과물이다. 힘들이지 않고 귀찮지 않으며 편하다. 리스판스는 ‘생각’이라는 거름 장치를 통과해야 한다. 질문이고 호기심이며 문제 제기다. 라틴어 “Nullius in verda”는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다. 리스판스가 여기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이장욱의 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이 그렇다. 어떤 소설가는 리액션의 결과를 추적하고, 리액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가담으며, 리액션의 근본적 이유를 묻는다. 생각없이 쓴다는 말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촘촘한 그물망을 짜는 일이 시인의 천형이라면 보이는 세계의 이야기를 깁는 일이 소설가의 임무다. 이장욱은 노골적인 것과 솔직한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때로는 경계를 허무는 일은 산을 옮기는 일보다 힘겹다. 틀을 깨고 나와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는 ‘노오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의무가 아니다. 스스로 아프락사스의 품에 안기려는 자들의 땀방울이 세계를 조금씩 변혁시켜 온 게 아닌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아무도 진실을 소유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해받을 권리가 있는, 매혹적인 상상력의 영토”라고 정의했다. 이장욱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한 칸에 분류하기 어렵다. 다양한 인상 군상에 대한 관심이 모든 소설가의 눈에 비치지 않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에 궁금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작가의 눈치를 보며 그가 주제와 핵심을 파악하려 노력하나 또 누군가는 자기 삶을 투영하는 거울로,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서는 담쟁이 넝쿨로 소설을 읽기도 한다. 자기 세계관을 들어올리는 지렛대의 역할로 책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오히려 안일하다. 작가에게 귀책 사유를 돌리거나 이미 만들어진 세계로 진입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들이 인생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허망한가.” 단편 「잠수종과 독」에서 공이 현우에게 물었다면 다른 대답이 돌아왔을까. 독자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작가의 질문에 응답한다. 그러한가, 아닌가. 공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작용을 최대화하는 것이 의사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많고 양면성을 강조하고 상태의 복합적 측면들을 고려하며 아우르려는 사람들이야말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공은 알고 있었다.” 아니, 무기력한 사람들은 자기 점검을 위해 오히려 다양성과 열린 태도를 살피라는 충고가 아닐까. 소설의 문장, 책장의 갈피마다 독자가 머무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어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결국, 자기 삶에 대한 고백이며 타인과 세상을 향한 독백이다. 유명한 정희가 그렇고, 혹자가 그러하다. “저들은 무엇에도 속하지 않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해주기 때문에.” 외롭다. 쓸쓸한 고독 너머에 자기 존재 의미를 발견하려는 자들의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념과 세계사와 사후세계를 버리기. 성별과 이름과 가족계획을 망각하기. 우리가 함께 머물렀던 도시를 홀로 찾아와 헤매는 미래의 어느 날을 상상하지 않기.”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를 만났다. 그의 마지막 연인이 되어 암살당했으나 세상에 남은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기억한다. 왜?


예의란 교양 있는 중산층 소시민들의 애티튜드에 불과하며, 예술이란 바로 그런 태도를 조롱하고 비판하고 전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 「노보 아모르」, 267쪽


예의 없는 것들의 세상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예술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노보 아모르의 음악을 들으며 이장욱의 마지막 단편을 읽는 동안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은 여운을 놓치기 싫었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것은 지극히 생의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견디는 최음제의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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