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 우리 시대와 나눈 삶, 노동, 희망
하종강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고대 멸종 언어처럼 기억이 가물거리는 영어 문장 하나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오래전 어느 영문법 책에서 보았겠지만 경험으로 체득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의사소통 과정이며 내밀한 고백의 시간이다. 작가의 고백을 듣고 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더하여 또 따른 의미망을 직조해 낸다. 책은 그렇게 큰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때 전체로 완성된다.

  ‘책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모순이다. 언어 기호의 분석이 가능한 일차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일이 책읽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읽는다는 행위 속에 전제된 능력과 기능들을 논하지 않는다면 책의 내용은 책의 전부일 것이다.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생각이 달라지고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조금씩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책읽기는 고통스런 시간 때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책상물림들의 한가한 소일거리로 비춰질 수 있는 행위 속에 현실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접하게 되면 독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저널리즘의 의무와 역할은 이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하종강의 글이 내게 주는 충격파는 만만치가 않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는 쉽게 감동하지만 절대로 눈물 흘리지 않는 내 눈을 적신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하종강의 책이 처음은 아니다. 한겨레에서 매년 봄 특강을 진행하지만 매년 책으로만 만나고 있다. <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등의 책과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는 책을 통해서 만난 하종강의 모습이 이 책을 통해 갑자기 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몸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시간의 흔적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먼 미래의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강이 악화되어 쉬는 동안 준비했다는 이 책의 내용은 그가 살아온 흔적들이다. 쌓여온 세월들이고 이 땅의 노동 현실에 대한 침착한 보고서이며 21세기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자화상이다. 그래서 숙연해지고 마음 아프며 책장을 넘기다 문득문득 하늘을 보게 된다. 고인 눈물 흐르지 않기 위해서.

  감상적이고 문학적인 글이 아닌 철저하게 생활과 현실에 기초한 책의 내용이 전하는 감동은 특별하다. 그것은 하종강이 살아왔고 겪어왔던 이 땅의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직도 ‘노동자’라는 말조차  꺼리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그 용어를 싫어하고 미래에 노동자가 될 예정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우리 사회가 정상은 아니다. 중고등학교에서부터 철저하게 노동 기본권을 배워 익히고 의무적으로 노동법을 가르치는 유럽의 선진국들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의 노사 관계에 대한 인식은 왜곡되어 있고 모순에 가득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 당당하게 당선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나쁜 나라였다는 말인데 그 말은 사용자의 편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나 정책들이 노동자의 편이었다는 말인가? 지나가던 견공이 웃을 일이다. 20여 년간 노동자들에게 상담과 강연을 해주며 그들의 함께 울고 웃었던 하종강의 글들은 머리도 가슴도 아닌 발이 썼다. 발로 쓴 책의 감동은 발로 시작되었지만 뜨거운 가슴을 거쳐 차가운 머리에까지 도달한다. 분노와 아픔을 넘어 변혁과 실천의 문제까지 고민하게 만든다.

  단순한 생활인의 주변 이야기가 아니라 대표적 개인으로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면면이 가슴 아프게 눈에 밟힌다. 차라리 이 책이 소설이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먼 미래에 이런 시절도 있었노라고 추억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하종강은 그 긴 세월동안 ‘희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닌 것 같다. 서로 손잡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와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앞만 보며 달려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현실에서 하종강이나 그가 만난 사람들은 패배자이며 낙오자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현실을 견뎌내는 유일한 힘이 ‘희망’인 사람들에게 모욕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과 대책을 세워나가자는 원론적인 감상이 아니라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저 멀리 있는 ‘노동자’들인지 아니면 우리들 모두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이며 내 가족의 문제이고 우리들 모두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나눈 대화의 기록과도 같은 하종강의 이야기는 삶과 노동 그리고 희망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말을 건네고 있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부채감’ 때문에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하종강의 말이 과장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종강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라도 그가 말하는 희망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의 생각이 먼저 변해야 한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세상이 바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작은 행동과 실천이 하종강이 말하는 희망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080402-0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