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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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럼slum의 어원은 slumber선잠이다. 피곤하고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는 빈민층에게는 숙면조차 사치일지 모른다. 편안하고 안락한 잠자리는 거주 조건을 단적으로 말해줄 수 있지만 그것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빈민층이 사는 곳을 슬럼이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또한 슬럼은 도시와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인간 문명의 눈부신 결과물인 도시의 거주형태는 슬럼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왜 인간은 한 곳에 모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는 우매한 질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서로 협력하지 않고 군집 생활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얼마만한 거리에서 어떤 거주 형태로 모여 살아야 하는 문제는 그 답이 쉽지 않다. 도시의 발달은 통치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노동 집약적인 산업 혁명의 이후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른다. 효율성을 우선으로 하는 공장식 기계 산업은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보다 많은 노동 시간이 필요했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도시는 필연적으로 확대되었지만 70년대 이후 벌어지는 도시의 집중 현상은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거대도시의 필요성에 따라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밀려 황폐화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가난한 사람들이 슬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도시의 갱년기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런 슬럼현상은 일부 서구 유럽의 선진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멕시코와 인도를 비롯한 후발 개도국이나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 도시화와 급작스런 슬럼의 형성은 참혹하기만 하다.

  슬럼은 다음 몇 가지 유형을 지닌다. 도심이 빈곤해지거나 해적형 도시화가 이루어지거나 눈에 띄지 않는 셋방살이 형태이거나 변두리의 밑바닥을 이루거나. 이들 슬럼 주민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먼저 스쿼터, 즉 남의 땅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사는 주민이 있고 두 번째로 해적형 분양지의 피분양자, 세 번째로 세입자, 네 번째로 강제퇴거 주민, 농촌 유민, 국내외 난민들이다.

  이 책은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슬럼 현상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이며 우려할 만한 미래에 대한 묵시록이다. 국가별로 슬럼의 유형과 원인 슬럼의 주거 조건들을 살펴보고 있는 부분에서는 할말을 잃는다. 6장 슬럼의 생태학에서 이런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재난과의 동거, 죽음과 질병을 부르는 도시, 똥통생활, 유아살해범에 관한 상세한 내용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조금만 눈을 들고 멀리 내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은 모순과 재앙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물론 이런 현상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우울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확인하는 것에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강제 철거에 대한 세계사적 기록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다.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에 살고 있는 빈민 72만을 강제 이주시킨 기록은 영원히 기록될만한 충격적인 사례로 이 책에 소개되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하게 개인의 사유 재산에 대한 공적 제재가 빈번하고 강력한 나라 대한민국은 토지 수용과 강제 철거에 관한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소개되는 대한민국의 사례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도심 재개발이나 신도시 개발로 인한 강제 철거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슬럼 화재 사건을 다룬 대목에 이르면 독자들의 충격은 극에 달할 것이다. 일찍 죽어버리는 개는 쓰지 않고 쥐나 고양이에게 불을 붙혀 화재를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1990년대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는 농촌의 파괴는 도시의 슬럼을 가속화고 있으며 도시 주변의 슬럼은 또 다른 형태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 상하수도 문제, 인구과밀, 전기 등 공공설비의 부재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재앙은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는 불투명하다.

  제 3 세계 도시들의 초호화 주택 단지들은 슬럼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으며 빈민들의 세금이 부유층의 공간과 설비에 투자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금융 제국주의와 부패 권력, 중간계급의 헤게모니가 빚어내는 빈곤과 억압의 슬럼화는 지구의 미래를 보여주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최근의 지구 상황을 비교적 차분하고 객관적인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더욱 섬뜩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슬럼은 우리와 동떨어진 다른 나라의 특별한 상황일까? 빈부 격차의 심화, 비정규직의 확대, 고용 없는 성장, 한국형 재벌의 성장, 순환 출자 구조를 통한 비정상적인 지배구조,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교육기회의 대물림, 청년실업률 급증, 사회 복지 비용의 감소 등 최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몇 가지만 떠올려 보아도 우리는 안전지대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의 의도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나 위협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대책 마련에 있는 것이라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떤 측면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하고 현실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고민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이 책의 의미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실과의 접점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도시 행정, 경제 개발, 정책 결정 등 다양한 분야의 관련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이 우선 필요하다. 무서운 미래, 암울한 세계는 바로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먼 우주에서 바라보는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이 책은 그것에 대한 아주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어 우울하다.


08032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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