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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평점 :
브라질 북부 판자촌에 사는 주부들은 저녁이면 냄비에 돌을 넣고 물을 끓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어머니들은 배가 고파서 보채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밥이 될 거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이 기다리다가 그냥 잠이 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자식들을 보면서도 그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어미가 느끼는 수치심을 감히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겠는가? - P. 10
어쩌자고 장 지글러는 이런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는가. 마음이 울컥하여 한동안 눈이 매웠다. <탐욕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한다.
투쟁은 아는 것에서 출발하며, 투쟁을 통해서만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을 획득할 수 있다. 약육강식 체제를 파괴시키는 일이 세계 시민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레지 드브레(1940~. 프랑스 출신 철학자, 교수, 기자.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 동지로 지낸 일화로 유명하다 - 옮긴이)는 “지식인의 의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의무는 민중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P. 17
폐타이어나 고무로 하반신을 감싼 채 바닥을 기는 걸인을 가끔 외면한 적이 있다. 손에 집히는 동전이라도 넣어 주지 못하고 지나칠 때면 마음이 불편하고 무겁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 실천하지 못하는 마음은 표현하기 힘들만큼 괴로운 법이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있겠으나 우리가 알아야 할 세상의 진실은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로 보이는 장 지글러를 사르트르가 보았다면 매우 반가워했을 것이다. 이 책은 연초에 읽기에는 상당히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대한민국이 전부가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기아와 전쟁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운가. 그 가공할 만한 위협들 앞에서 우리의 삶은 안온하기만 한 것일까. 이 책은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잘 알려진 장 지글러는 2008년 4월까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책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들과 만났다. <탐욕의 시대>는 또 다른 진실에 대해 우리에게 짙은 감동과 아픔을 전해준다. 전자가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는 세상의 또 다른 진실을 알게 해 주었다면 후자는 그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진실들이 존재한다. 알지 못하는 사실들도 많다. 하지만 객관적인 정보와 수치가 전하는 의미가 이토록 사무치게 전해지기는 힘들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깊은 한숨과 회의를 갖게 한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들은 오히려 위험하다. 객관적일 수 없는 해석과 지나친 분석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저자는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양한 통계와 수치를 제공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통계치를 통해 기아의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조목조목 살펴보고 있다. 남반구 대부분의 나라들 즉,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서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을 직접 방문해서 경험한 이야기들은 생생한 지구촌에 관한 21세기의 보고서이며 기아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집이다. 저자는 단순한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아의 원인으로 신흥 봉건제후로 명명된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고발한다. 이보다 앞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물론 제국주의의 폭력이다. 부채와 기아의 관계를 파헤친 1장과 2장은 이면에 감추어진 국가적 이기주의와 제국주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희망을 노래하고 혁명을 이야기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상황의 봉건적 질서를 떠올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행복한가. 단두대에서 사라진 혁명가들의 외침을 다시 살펴보고 시민혁명의 정신을 되새김질하는 저자의 의도는 세계의 현실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다. 부정적 시각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의 도움을 얻어야 존재할 수 있고, 스스로를 이루어나갈 수 있으며,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다. 사회를 이루지 않고 사는 인간, 역사가 없는 인간,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가역성(可逆性), 상호 보완성, 연대감 등의 관계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 P. 329
이 책에 인용된 끔찍한 숫자와 현실들을 다시 인용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저자가 이 책을 쓴 진정성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문학작품만이 아니다.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많은 눈물을 자극했고 한숨 쉬게 했으며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오만한 물결 앞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피폐해지고 있는지 우리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과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건설 지상주의 대한민국의 현실도 결코 만만치 않다. 저자의 말대로 다시 시작하자. 무엇을?
그들은 그렇게 사는데, 나는 왜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이들 우연의 희생자 한 명 한 명은 나의 아내,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 나의 친구 혹은 나의 삶을 구성하며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다. - P. 330
나는 노동조합 지도자가 아니며, 인민해방전선을 이끄는 리더도 아니다. 그저 제한적인 영향력을 가진 한 명의 지식인일 뿐이다. 나의 책은 내가 돌아다니며 목격한 세계에 대한 나의 진단을 제시한다.
현재 이 세계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다. 전 지구적인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 P. 332
나는 저자의 끝맺는 말을 읽다가 한 없이 부끄러워졌다. 내 삶의 ‘우연성’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한 것 같은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지도자도 인민해방전선의 리더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모두 우리들의 몫에 대해 보다 깊이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작은 지식과 인식조차도 무의하다. 생활 속에서, 작은 실천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뜻과 행동이 모여 다시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 거꾸로 가는 시계를 돌려놓고 길찾기를 시작해야 한다. 다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꺾어버린 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파블로 네루다) - P.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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