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잠을 깬 사자처럼 일어서라
쓸러지고 또 쓰러지더라도!
잠든 동안에 그대에게 떨어진
이슬처럼, 사슬을 벗어 던져라.
너희는 다수이고 그들은 소수이지 않느냐!   - 셸리, ‘무질서의 가면’중에서(P. 113)


  어른이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줄 알았다. 나이가 많은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했던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을까? 세상에 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던 생각이 이제는 부끄럽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지도 알게 되었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이를 통해 얻게 되는 세상살이에 대한 경험과 통찰의 깊이가 얼마나 깊어지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두 가지 말이 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지만 결론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백남준이 죽는 순간까지 ‘청년’으로 불린 이유를 생각해 보자. 나는 청년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는가? 나의 꿈은 영원히 늙지 않는 것이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환갑을 넘긴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흰머리 휘날리며 젊은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르신들이 계시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불의를 외면하거나 말로만 외칠 뿐 행동하지 않거나 긍정적인 것과 순종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혼동하거나 안정과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은밀하게 감추거나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신념을 저버리거나 아예 신념이 없거나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거나 이제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고 말하거나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늙은이라고 부른다.

  하워드 진은 좌파라고 불린다.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을 욕하는 대표적인 미국 백인이다. 욕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역사를 전공한 그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그의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참 아름다운 생이다.

  <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는 ‘청년’ 하워드 진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 역사와 정치의 대화라는 원제에 충실한 이 책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환상을 걷어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이승만으로부터 촉발된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는 미국과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정학적 요충지, 이념 대립의 최전선에서 상호 이익을 위해 관계가 형성되었지만 언제나 우리는 그들에게 환상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미국이 없는 한국을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래된 동맹국과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미국의 역할과 외교관계가 불필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이 어떤 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비판적 관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인터뷰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적절하고 충실한 질문의 내용과 하워드 진 특유의 날카롭고 분석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다. 그의 생각을 잘 이끌어내고 정리하며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를 칭찬할 만하다. 인터뷰이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충분이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터뷰어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과연 세상을 통찰한다는 표현이 가능할 만큼 미국은 대단한 나라가 되었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미국을 알아야 한다.

  구 소련의 붕괴로 현실 사회주의가 사라지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미국의 패권주의가 독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미국은 세계의 깡패 국가가 된지 오래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과 그들의 논리는 모순되며 거짓과 위선은 만천하에 폭로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버티기를 계속하고 있다. 부시의 임기가 끝난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했던 이명박 정부의 지난 5개월을 돌아보라. 끔찍하기만 하다. 아직도 4년 7개월이 남았다.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되어 있다는 김규항의 말이 이제는 저주로 들린다.

  대량 살상 무기로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과 자원 전쟁의 더러운 내막을 알고도 모른채 최대 인원을 파병한 대한민국 정부는 영혼의 샴 쌍둥이에 불과하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의 추악한 뒷모습을 엿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하다. 자본주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라는 자명한 이야기로 이 책의 인터뷰는 시작된다. 지배계급의 논리가 어떤 것인지,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왜 비판적 사고와 의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지 하워드 진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스터즈 터클은 미국인이 국가적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역사를 잊는다는 거지요. - P. 32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충고를 잊지 않는 하워드 진은 역사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지나온 인류의 발자취 속에서 아무것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망각은 미래를 위한 시금석이며 디딤돌이다. 그래도 저자는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믿음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국경없는 세계’는 그렇게 하워드 진의 꿈이 되었다.

선생님은 아주 소박한 이유 때문에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그 목표를 얼마나 성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P. 248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한 사람에 의해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워드 진은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을 믿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갈 것을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생애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직스럽고 존경할 만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불리워질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적 활동을 중단하신 리영희 선생님은 안녕하신가.


080714-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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