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10
윤대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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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가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동안 젖어 있는 것은 특별한 현상이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윤대녕의 소설은 사건 중심의 재미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독자를 책 속에 묻어 버리는 힘을 빼고 있다. 스스로의 선택이든 그의 소설의 특징이든 분명한 것은 윤대녕 특유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명하면서도 평범한 진술을 통해 감정을 배제한 채 낮은 목소리로 자분자분 내면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스무살을 갓 넘겼을 때 윤대녕이 등단했고 그의 소설의 특징은 이십대의 화두처럼 뜨거웠다. 물론 개인적 만남과 느낌과 공감은 문학 안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감안하더라도 내게는 그렇게 특별한 만남으로 기억된다. <은어 낚시 통신>이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는 한 작가를 ‘존재의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다소 모호한 이름으로 규정짓기에 충분한 듯 보였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일상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듯 했다. 인물들의 특징과 나이, 성장배경이나 직업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으니 당연히 개연성과도 거리가 멀어질 우려가 있었지만 많은 독자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근작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는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한 소설이다. 그 과거는 물론 작가의 과거이며 구체적으로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는 청년 시절에 대한 마감 작업으로 보인다. ‘어쩌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소설의 몫인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말처럼 이 소설은 윤대녕에게 좀 더 특별한 의미의 전환적 작품이 될거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음 소설에 대한 변화와 기대가 더 커진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생의 어느 한 나절을 정리하는 의미를 지닌 소설은 많이 아프다.

  “고독한 자들은 말이 없지만 외로운 사람들은 대개 말이 많은 편이죠” - P. 132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외로움은 소설에서 그리 특별한 주제가 아니다. 아니 문학에서 가장 흔한 대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칫 감상에 젖어 허우적거리거나 공감할 수 없는 개인적 고백으로 지루한 하품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보여주기나 말하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여백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일은 정말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윤대녕은 그 울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작가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 젖는다.

  분량에 비해 소설의 내용과 구조는 단순하다. 소설가 영빈은 성수대교 붕괴현장을 같이 목격한 해연과 9년 만에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 다시 만난다. 가볍게 키스하는 정도의 사이인 그들은 자주 다니던 ‘히데코’라는 카페에서 재일교포 유미코를 만난다. 어머니의 부정으로 이혼하고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 휩쓸려간 아버지를 둔 해연과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남자가 등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으로 남겨 놓은 채 자살한 사건을 경험한 유미코는 나름의 상처가 죽음으로 기인한다. 프락치로 몰려 자살한 형을 둔 영빈은 병원에서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계신 아버지를 가끔 찾아뵙는 소설가로 등장한다.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실존 작가는 유미코의 고교 동창으로 등장하는데 영빈과 우연히 신촌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간 영빈은 그곳에서 실존 인물인 사진 작가 김영갑을 가끔 만나며 낚시에 몰두한다. 결국 일본으로 돌아간 유미코도 자살하고 제주로 내려온 날 해연은 영빈의 아이를 갖게 된다. 영빈의 자신의 몸에서 호랑이가 빠져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제주를 떠나 서울로 가기전 그녀가 살았던 통영을 찾아 바다를 내려다 본다. 그녀의 이름 해연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으로 바다제비[海燕]라는 뜻이다.

  소설의 큰 축은 세 인물이 겪는 내면적 갈등과 그 부딪힘으로 요약된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을까마는 세 사람이 가슴에 응어리진 아픔들은 모두 ‘죽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겨지는지 살아있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어한다. 자의적 해석일지 모르나 이 상처들은 결국 타자에 의한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결국 자신의 생채기는 아물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되지만 타인의 도움으로 그것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받은 상처는 스스로 치유하라는 전언. 그것이 이 소설의 의미로 읽힌다.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한 일들을 모두 수학 공식처럼 대입해서 풀어 낼 수 있는 생의 법칙은 없다. 다만 삶의 방향이나 생의 태도 자체를 수정하게 만드는, 도저히 그 트라우마로 인해 바꿀 수 없는 개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호랑이들을 찾아 나선 소설가의 노력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만약 그것이 날카로운 비명이거나 냉소적인 시선이었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것이지만 윤대녕은 마치 타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인물들의 목소리에 공허한 울림을 부여한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이 전해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설명도 변명도 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 P. 216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재미는 문장이다. 재기 발랄한 촌철 살인의 문장이 아니라 평범한 진술로 보이는 수많은 금언들이 숨어 있다. 나는 이 많은 ‘숨은 그림 찾기’ 놀이에 몰입했다. 행간을 건너뛰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가는 가벼움과 나른함, 일상적 진술들이 인물들 사이의 대화라기 보다는 하늘에 대해 내뱉는 공허한 울림처럼 들린다. 결국 영빈은 자신의 호랑이를 발견했고, 그 호랑이를 잡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풀어 주는 것으로 자신과 화해한다. 그것이 영빈의 마지막 출조이며 제주에서 보낸 한 시절을 마감하는 순간이 된다. 영빈의 속내를 말해주는 윤대녕의 목소리가 통증없는 메마른 목소리로 울려 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영빈은 낚시대를 접고 남은 소주를 마시며 동이 터오기를 기다렸다. 그와 더불어 지나온 시간들을 무연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일까. - P. 422


200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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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47
박형준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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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불혹의 나이가 되어버린 젊었던 시인의 시를 대하는 느낌은 묘하다. 같이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도 시인도 세월 따라 흘러간다. 마치 연예인들의 나이를 듣고 놀라는 것처럼 대상은 변함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상한 습성이 내게도 있는 듯 싶다. 등단 작품을 신문에서 읽고 눈여겨 보았던 시인 중의 한 사람인 박형준의 시를 오랜만에 읽는다. 그의 시에서 읽었던 투명함과 선명한 이미지들은 변함없이 탄탄한 느낌으로 그의 시를 받쳐주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없다. 차고 단단한 이미지의 결과 언어의 명징함만으로 버텨 보든지. 시처럼 개인적인 장르가 있을까. 아무리 시에 빌붙어 사는 비평가들이나 교수들이 갑론을박 해봐야 독자가 느끼는 몫은 따로 있다. 그것이 때로 꼭 맞아 떨어지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를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통속적이거나 심금을 울리는 감동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뿜어내는 제각각의 꽃들로 피어나기를 독자들은 기다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박형준의 시는 무미건조한 저물녘 가을 햇살 같다. 따뜻하지도 않으면서 미련이 남지도 않는다. 그저 기울어가는 저녁 하늘의 아름다운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파도리에서

여자는 내 숨냄새가 좋다고 하였다.
쇄골에 입술을 대고
잠이 든 여자는
죽지를 등에 오므린 새 같았다.

끼루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파도 속에서
물새알들이 떠밀려 왔다.

  서해 바다, 파도리에서 건져 올린 한 편이다. 건조한 일상에서 비춰지는 개인사는 행간을 건너뛰며 깨끗하게 다가온다. ‘쇄골에 입술을 대고 잠이 든 여자’의 숨소리와 표정이 살아온다. 그 평화로움과 따스함이 함께 전해진다. 그러나 ‘물새알들이 떠밀려’ 오는 것으로 끝났다. 찰나의 이미지를 칼날처럼 들이 대지도 못했고 깊은 여운이 남지도 않는다. 다만 이번 시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빛’의 이미지다. 가을빛과 겨울빛이 다르고 순간순간 망막에 투영되는 모든 빛의 현란함이 눈을 아리게 한다. 우리 모두의 몸을 감싸는 빛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창이 된다.

호수가에
발을 담그고
나란히 앉아 있었죠

잔잔한 물결 위에
날개를 펴고 죽은 잠자리
그물망에 맺힌 가을빛 - <가을빛>중에서

내 방 창문 너머로
오후의 환한 손님이 찾아왔다

탁자 위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침묵
찻잔 속의 물을 핥고 있다 - <겨울빛>중에서

  빛은 이렇게 계절 속에서 찾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으로 파고든다. 내가,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집들 속으로 거침없이 혹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때때로 집없는 이의 집에도 머무는 것이 창에 번지는 빛이다.

오전, 창에 번지는 빛

눈덩이 쌓인 골목

광선 한줄기
꽉 닫힌 집
창변에 머문다

집 없는 이의 집

  가을을 넘어 겨울의 길목에 서성거리는 한 낮의 무심한 빛들이 다르게 보이는 어느 날이 있었다. 깨달음의 순간과 거리가 먼, 문득 모든 감정의 결들에 스며들지 않던 암흑과 침묵들. 정전된 도시의 밤하늘처럼 고요한 순간이 찾아올 때 박형준의 시를 꺼내보는 것은 어떨지.


200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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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 무덤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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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더 이상 삶의 진실과 깊은 감동을 담아내는 시대가 올 수도 있을까? 권지예를 처음 만난건 물론 ‘이상 문학상’이라는 권위를 통해서다. 2002년 ‘뱀장어 스튜’로 이상 문학상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그것으로 첨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소설집 ‘꽃게 무덤’으로 두 번째 만났다. 이제는 여류 시인이나 여류 소설가라는 말이 사라졌다. 희귀하지도 특별한 테마만을 다루지도 않기 때문에 그 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졌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깊이와 넓이, 혹은 날카로움과 감동이 무딘 소설 한 권을 끝까지 읽어내는 일은 고역이다.

  9편의 장편을 묶어 놓은 이 책은 예스 24 이벤트에 소 뒤걸음으로 당첨되어 받은 25권의 소설중 하나다. 이제 10여권 남았다. 심심할 때마다 한권씩 빼 읽어면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있다. 서른까지는 소설책은 절대로 돈주고 사지 않는다는 쓸데없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소설이라고 일부러 안사지는 않는다.

  이 책의 첫 소설과 두 번째 소설 ‘꽃게 무덤, 뱀장어 스튜’ 정도만 읽을만하다는게 개인적인 소감이다. 단편들 사이의 공력이 고르지 못하다. 문장과 표현 주제와 깊이가 제각각이다. 작가에게 있어 소설집이란 한 시대를 혹은 한 시절을 묶는 의미일 것이다. 집중적인 주제와 세상에 대한 색다른 시각은 아니어도 무언가 집요한 정신 세계의 아름다움이거나 화려한 말빨이거나 전혀 새로운 소재이거나 독자의 눈물을 찍어내게 하는 감동이거나 무언가 한가지는 던져야 하는거 아닌가. 내가 무딘 사람인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다. 소설을 읽다 하품을 하기는 오랜만이다.

  권지예의 소설을 가르는 일관된 상징은 물과 불로 읽힌다. 그리고 그 두개의 상징이 결합된 요리가 그것이다. ‘물의 연인’에서 보여주는 세월을 뛰어넘는 남녀간의 사랑은 물과 불의 이미지로 상승과 하강을 통해 만날 수 없는 운명을 전한다. ‘산장카페 설국 1km’는 드라마 단막극처럼 인물들 사이의 갈등보다는 사건에 주목하고 있지만 과정도 결말도 식상하다. ‘꽃게 무덤, 뱀장어 스튜’를 통해 인간 관계의 소통과 의미를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하려는 작가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삶에 대한 권태와 일상속에서 느끼는 말할 수 없는 울림들을 작가는 꽃게와 뱀장어 이미지로 그려낸다. 이어지는 ‘우렁각시는 어디로 갔나, 비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봉인’등은 작가의 일상적 경험을 토대가 됐든 아니든 시간 낭비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제일 나쁜 질문이 이것이다. 작가에게 던지는 질문, 그래서?

  아무나 소설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성의 자의식과 결혼 후의 불륜, 가정과 성을 주로 다루고 있는 이 소설집은 가슴도 머리도 적셔주지 못한다. 심하게 말하면 시간이 많이 아까웠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통해 권지예의 소설을 분석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가 말하는 우리 소설사에서 새로움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가치있는 일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새로움도 없고 그 가치가 어디에 초점을 둔 것인지도 납득할 수가 없다.

  가을 하늘이 흐린만큼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춥지 않은 겨울을 기대하는 헛된 욕망이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푸른 하늘보다 어두운 하늘이 편안할 때가 많다.


200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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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창비시선 250
노향림 지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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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망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생의 한 가운데 서서 받은 편지들을 꺼내보는 일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어느 한 구석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가만히 그대로 놓여있는 편지들을 생각했다. 이메일 편지함 속 열자마자 닫아버린 편지들의 간격을 헤아려 보았다. 사는 일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마다 사람들은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누구에겐가 친밀하지 않아도 마음을 털어 놓거나 한숨을 쉬고 싶어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 빛깔과 상관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근심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에 앉아 쉬고 싶거나 그 빈 터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싶은 것이다.

  노향림의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는 깊은 울림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 울림은 사물에게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세심한 관찰과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흔히 서정시라 명명하는 것들에 대한 찬사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노향림에게 모두 바쳐져도 지나치지 않는다. 언어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시인중의 하나다. 그만큼 탁월한 감수성과 언어의 명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아는 시인이 노향림이다. <눈이 오지 않는 나라>,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등 그의 전작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서정시의 모범 답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나친 감수성과 말재주는 오히려 시인에게 해가 될 수 있으나 노향림은 그 위험성을 극복하고 있다.

  시에 있어 서정(敍情)이란 서경(敍景)의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는 시인이 노향림이다. 그의 시에선 종소리가 들리고 눈이 부시게 빛나는 햇살을 만나며 폭설의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 모든 풍경들이 소리와 빛깔로 빛난다. 무색 무취의 기막힌 물맛을 길어올리는 샘과 같다.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맑아지고 눈이 깨끗해지며 아름다운 풍경화를 들여다 본 느낌이다. 이 시집은 그 맑은 서정으로 빛난다. 

  한 권의 시집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와 느낌이 제각각이겠지만 사소한 이름으로 불려진 주변 사물들에 대해, 낯익거나 낯선 장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감각하며 호흡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닐까. 때로 힘겹거나 우울하거나 기쁘거나 환호하고 싶을 때, 생의 한 순간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을 때 그 기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은 아닐까. 마음의 바람결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낯설지 않은 풍경과 가슴 한구석의 뭉클함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서정시를 읽는 이유다.

  긴 수식과 화려한 포장을 뜯어내고 잠시 눈을 감고 생의 구차함을 잊어버리는 환각 효과를 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렇게 똑같은 자세로 앉아 두통을 앓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과 신선한 향기같은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우리가 시에게 바라는 일은 없다. 그러니 무거운 책임과 가벼운 소홀함 사이에서 물방울을 튀기듯 잠시 깔깔거리거나 먼 데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양수리의 저녁

물안개 핀 양수리의 저녁
바람이 수척한 풀들을 강쪽으로 밀어낸다
가두리 양식장의 노인은 돌아오지 않고
갇힌 물 위를 낮게 낮게 나는 새들의
몸에선 프로펠러 소리가 난다
몇 마리는 소리없이 날아가
바위 틈에서 곁눈질을 한다
창백하게 질린 수은등이 납빛 얼굴로
포복하는 저녁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물비늘 냄새를 터는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물 위에서 반짝이기만 하는 시간들
단 한발짝도 건너오지 못하는
이 먼 그리움



200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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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1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6-11-0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오늘에서야 이사가 끝났습니다. 좋은 이웃들 많이 만나 한 수 배울까 싶습니다. 놀러 가겠습니다.
 
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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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중에서(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였던 기형도 시의 일부다. 다소 엉뚱하게도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고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한 말이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작은 언쟁이 연인들 사이에 오간다. 너무 유치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영원한 사랑’에 대한 열망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과거에, 현재도, 앞으로도 아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인류는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고 인류의 역사인 것처럼.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t,1994>는 모든 연인들의 필독서로 권해도 좋을만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연인 사이의 문제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는다고 해서 실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이렇게 영원히 되풀이되는 주제에 대해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는 관심과 공감을 표시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의 매뉴얼이 나와 있다면 이런 종류의 책도 의미가 없어질테니 말이다. 이성과 사랑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다. 절대 독해 불가능한 타인과 사랑에 대한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과 현실적인 문제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책은 더 없이 훌륭하게 다가온다.

  보통의 전작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essay in love,1993>와 <사랑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kiss & tell,1995> 사이에 쓴 책이니 사랑에 관한 3부작으로 엮는다면 가운데 토막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1년에 한권씩 사랑과 연인들의 심리에 대한 연구(?)를 3년에 걸쳐 완결한 것일까? 93년부터 95년까지의 시기면 69년생인 보통이 만 스물 네 살에서 스물 여섯 살까지 한 권씩 쓴 셈이다. 사랑에 관한 한 박사학위를 받아도 될 만하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일반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보통은 이 책에서도 역시 연인들 사이의 ‘사랑’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랑의 에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완벽한 풀코스를 선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식상하고 당연해 보이는 정식 코스에 숨겨진 비밀들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랑에 관한 금언과 격언들은 다름 아닌 인간 관계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스물 네 살의 영국의 광고 회사 직원 앨리스는 파티에서 의사를 포기하고 금융업에 종사하는 서른 한 살의 에릭을 만난다. 친구 수지와 매트는 조연이고 등장인물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나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앨리스는 필립이라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끝난다. 겉으로 드러난 스토리는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내용들이 어렵지 않게 묘사된다. 많은 철학자들의 말과 문학 작품 속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분명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유머와 재치를 곁들인 보통의 문체는 가독성을 배가 시키고 깊이 잠수했다가 수면위로 떠오르듯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런 문장과 책을 왜 마다하겠는가.

  책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보통 특유의 그림들과 해설들은 쉽고 재미있게 추상적 개념과 연인들의 심리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주관과 객관이 뒤섞여 나름대로 논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색다른 즐거움까지 덤으로 얹어준다. 그것들이 모두 객관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공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와 보편적 정서를 밑바닥에 충분히 깔아두고 있다.

  우리말 제목의 의미 - ‘우리는 사랑일까’는 현재 진행형인 연인들의 관계를 점검하는 시제다. 하지만 ‘사랑 이후’의 연인들이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와 세대를 불문하고 사랑할 예정인 연인들에게,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더 이상 사랑이 필요 없다고 선언한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엉뚱하게도 에릭을 만나기 전 앨리스가 “나랑 세상 사이에 목도리 같은 게 끼어 있는 기분이야. 자연스럽게 느껴는 걸 막는 담요 같은 게 있어.”라고 말하는 부분에 공감하기도 하고, 앨리스가 에릭에게 이별을 선언할 즈음에 하는 생각 - 그이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이구나. -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한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라는 유명한 경구의 진부한 메아리였다. - 이 모든 사람과 공감할 만하다.

  20세기 사랑과 연인들의 심리에 관한 보급판 같은 책이라는 속된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면 부담없이 소파에 파묻혀 책장을 넘겨도 본전 생각은 나지 않을 것 같다.


200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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