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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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이 주는 힘이 삶의 다양성에 대한 탐구라기보다 힘겨움일 때가 많다.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행복하다고 외치며 사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라. 정말 드물다. 누구나 한가지쯤 정신적 상처를 가지고 살며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생채기를 핥으며 오늘을 넘기고 있다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상처의 깊이와 상태가 다를 뿐. 그 많은 아픔과 고통들을 단편소설은 헤집어 보여준다. 아프지? 라고 물으며. 혹은 이렇게 훨씬 더 슬프거나 지독한 고독을 가직한 사람도 있으니 엄살떨지 말라고 말한다. 그게 단편의 힘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펼쳐준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려함보다 그 속에 담겨지는 진실이 가장 근접한 정답이 될 것이다. 삶의 진정성은 삶의 진실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삶의 진실일까? 그걸 아는 사람이 소설을 쓰겠는가? 그걸 아는 사람이 소설을 읽겠는가?

  성석제도 그 많은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나름의 독특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낸 몇 안되는 이야기꾼임에 틀림없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보여주었던 웃음은 여전히 그의 특별한 무기가 된다. 고전문학의 전통에서 ‘골계미’라 이름 붙혀진 이 웃음은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제대로 활용하며 작품과 어울리도록 요리한 작가가 많지 않다. 성석제는 분명 그 웃음의 계보를 잇는 작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절대 희극이 아니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성석제 소설의 재미다. 한번 웃음을 터뜨리면 참지 못하고 계속 킬킬거려야 한다. 나는 특히 그렇다. 단편 ‘만고강산’을 읽는 동안 눈물이 날 정도로 혼자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남겨지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다. 그것이 목적인지도 모르지만. 고전문학의 ‘풍자’나 ‘해학’을 버무려 적당히 재미있게 읽고 적당히 뼈가 있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면 무엇인가 분명 아쉬운 점은 남는다.

  가상의 지방도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형식의 소설들 - ‘만고강산’, ‘저녁의 눈이신’, ‘내 고운 벗님’, ‘소풍’에서는 주로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가 굳게 믿었던 일상에 대한 아이러니와 반전 속에서 안타까움을 읽어낸다. 말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구수한 입말이다. 지방의 사투리가 친근함을 더해주고 마음의 긴장을 풀어준다.

  한 인간에 대한 고찰들 - ‘잃어버린 인간’, ‘인지상정’, ‘너는 어디에 있느냐’, ‘본래면목’에서는 특별한 생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맛본다. 그러나 이 소설들의 인물들이 특별한 이유는 주변 인물들에 의해, 그리고 사회 역사적 상황에 의해 특별함이 생겨난다. 현실속에서 하나하나의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간들은 모두 객관적인 상황이나 삶의 형태가 평범에서 벗어나 있다. 평범한 개인을 대표하지 않는 이런 인물 유형은 당연히 우리에게 친근함보다는 거리감과 경계심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특별한 이유에 따라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준다. 어디 완벽한 인간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다시 더 한번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생각하는 시간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는 고전소설 ‘채봉감별곡’을 차용하고 있다. 씨줄과 날줄처럼 소설속 이야기와 ‘채봉감별곡’이 뒤섞여 장면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소설속의 소설과 이 소설은 겉돌지 않고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한 편의 풍경화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다듬어내고 있다. 잃어버린 우리들 유년의 윗목을 더듬고 있는듯 하다.

  성석제 소설의 힘이 여기에 또다시 드러난다. 단순한 이야기꾼으로서 재밌는 스토리를 끝없이 쏟아내는 요설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소설가에게 다양성은 분명 큰 힘이 된다. 구수한 입말의 성찬 속에서도 인물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드러나고 있으며 때로는 서정성 넘치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달빛아래 고요함으로 이끌어 준다. 대화와 산책을 적당히 뒤섞어 상대를 매료시키는 소설가로 볼 수 있다.

  얼마전, 고민끝에 동국대 교수 자리를 포기한 현실적 용기?, 만용?이 신문 칼럼에 난 적이 있다. 한겨레 북섹션으로 기억되는데 소설에 전념할 수 없을것 같아 안정적이고 사회적 신분이 보장된 교수 자리를 최종 임용단계에서 포기했다는 기자의 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서 이야기하듯 어차피 단 한번 뿐인 인생길에서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성석제도 포기한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자신??행복으로 가득할 것이라 믿는다. 멀리서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낼 수 밖에 없으나 그의 소설은 또 기다려진다.


200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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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박꽃
나카가와 요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샘터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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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사랑받고 싶어 몸부림치는 불행한 영혼은 잠 못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분노로 표출되어 타인에 대한 테러에 다름없음을 알기나 한 것인지. 또, 호의와 배려에 대한 감사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소유욕으로 인한 간절함과 타인에 대한 감정조차 조절하고 싶어하는 광기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사랑으로 착각하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서 항상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불행을 과장하며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울부짖거나 내 불행이 전인류의 그것을 합한 것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우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거나 슬쩍 손을 빼고 대상에 대한 분노로 그 감정의 방향을 선회한다. 미친짓이다.

  아름다운 사랑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고 나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랑은 원한다고 얻어지는 뽑기 인형이 아니라 인형통 앞에서 애쓰는 그를 위해 통 속에 내 인형을 채워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법과 제도,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를 넘어 근원적 사랑에 대한 정의는 나름대로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타인을 규정해버리는 사랑은 서로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 아니, 사랑이 있긴 한 것일까? 어떤 감정 상태를 사랑이라 부르는가? 사람마다 다른가?

  사랑이 어디 있는가? 영원한 사랑을 믿는가? 믿고 싶다면 나카가와 요이치의 <하늘의 박꽃>을 읽어보라. 1936년, 일본식 아니 나카가와 요이치식 절대 사랑과 만나게 된다. 일본 근대문학의 여명기에 탄생한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저는 오늘에 이르는 20 몇 년 동안 그녀를 가슴에 새기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애를 걸었습니다. - 본문 6페이지

  사랑은 아름답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런 감정이며,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의 과다 분비로 인한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환각작용이다. 얼마나 기쁜일인가. 그 상태를 20 여년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20여년간 상대방의 마음을 괴롭힌 한 여자를.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여자로 기록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도덕과 윤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니 넘지 않고, 한 인간을 몰락(?)시킨 여인의 마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배반이다. 요이치는 또다시 사람들에게 묻는다, 사랑이 무엇인가?

  주인공 남자는 일곱 살 연상의 결혼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닌 것이 문제다. 여인도 그 남자를 사랑한다. 섹스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가져가 버린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남자는 모든 인생을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에 바친다. 몇 번의 프로포즈를 거절받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결혼이라는 도피처를 선택하지만 곧 헤어지고 만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그 남자는 끝내 사랑하는 사람의 허락을 받는다.

  스물 한 살에 그녀를 처음만나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그녀와의 결합을 꿈꾼다. 그러나 평소 몸이 약했던 그녀는 약속한 시간까지 서서히 죽어가고 어느날 그녀의 유서와 같은 편지를 받고 그 남자는 절망한다. 무려 23년간 그 남자가 기다린 것은 단 하루라도 그녀와 같이 살아 보고 싶었던 간절함이다. 사랑의 목적이 결혼인가? 아닌가? 남자가 기다린 것은 그녀와의 결합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신념과 집착이 이루어내는 유일무이한 거룩함은 아니었을까?

  지독한 사랑은 지독한 자기애와 결합된 집착이다. 자신의 스타일과 생각대로 타인을 규정짓고 같은 마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안되면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절대 혼자 불행을 감내하는 인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현실은 어떤가? 이 소설을 쓴 요이치는 이런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현실에 없는 지고지순한 아름다운 절대 사랑을 그려보고 싶었을까?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밖에 난 몰라’라고 외치고 싶었을까?

  ‘하늘의 박꽃’이 되어버린 그녀를 생각하고 평생 사랑한 한 남자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고 그 남자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으며 동일시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태도와 방법은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 대상과 시기도 다 다르다. 평가하지 말자.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잴 수도 없고 부피와 무게를 가늠할 수도 없다. 사람들 가슴속에 자신이 키워온 크기만큼 존재할 뿐이다. 다만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롯된다는 사실만은 기억하고 싶다. 집착과 자기애적 정신병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은 시간만 흐르면 치유되지만 분노의 대상과 치명적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시간만으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남는다.

  문학과 현실 속에서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통제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많은 사람들은 소설 속 주인공 남자처럼 외친다.

  그때만큼,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던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순리임을 저는 몇 번이고 저 자신에게 깨우쳤습니다. - 본문 62페이지


200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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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인간 - 전2권 세트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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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제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신비로울 것도 없는 이외수의 소설은 하나의 틀로 굳어진 듯 싶다. 그 틀은 1992년 <벽오금학도>이후 굳어졌다. 이후 출판된 1997년 <황금비늘 1, 2>, 2002년 <괴물 1, 2>에 근작 <장외인간 1, 2>에 이르기까지 큰 흐름에서 변화가 없다. 1978년 <꿈꾸는 식물>, 1980년 <겨울나기>, 1981년 <장소하늘소>, <들개>, 1982년 <칼>을 이외수의 전정기로 본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그의 소설은 <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5년 등단이후 30년간 많은 양의 책들을 쏟아내며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아온 그의 글들은 이제 힘을 잃어가는 것인가.

  미스 강원과의 극적인 결혼, 지독한 가난 등 자신의 이야기를 감수성 짙은 문장으로 풀어낸 1985년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를 알게 된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다. 올림픽 열리는 해에만 머리를 감고,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글을 완성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 등 그의 숱한 일화와 외모와 일상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화제에 올랐던 소설가 이외수는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정통 문학에서 비껴 서 있는듯 수많은 에세이와 우화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영혼의 세계를 주유하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창 밖에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는 문장에서 ‘추적추적’과 어떤 특정 시간과 계절이 ‘당도’해 있다는 표현을 여전히 즐겨 쓰는 작가 이외수는 근작 <장편소설>에서도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문장들과 표현들 비현실적 결말로 주목을 끈다.

  닭갈비집 ‘금불알金佛揠’의 주인 이헌수는 시인이다. 동생 이찬수와 동생의 동거녀 제영이와 함께 춘천에서 닭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느날 달빛처럼 스며든 여인 소요를 만난다. 닭갈비집 종업원으로 카운터를 지키던 소요가 사라진 어느날 하늘의 달이 사라져 버린다. 세상사람들은 달을 모르고 헌수는 미칠 것 같다. 월(月)요일이 인(人)요일로 바뀌어 있고 달과 관련된 모든 노래와 풍속들이 사라진 현실을 헌수는 받아 들일 수가 없다. 달을 아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돈에 눈이 먼, 가슴이 메말라 가는 사람들 때문에 사라진 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결국 헌수는 정신병원 개방병동에 입원한다. 차차 두통이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이 온다. 병원에서 만난 한도사, 문보연, 오대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많은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된다. 환자처럼 보이는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정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프랙탈 예술을 하는 친구 김필도는 누드 모델을 구하려다 모델을 친구와 동거를 시작하고 선배에게 그림을 팔려다가 자신의 여자와 바람난 선배를 폭행해서 감옥에 간다. 병원에서 퇴원한 헌수는 필도를 면회하고 닭갈비집을 정상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날 명품 중독증에 빠진 동생의 동거녀이자 자신의 후배인 제영이가 인체자연발화 현상으로 사망한다. 정신을 수습할 무렵 모월동(慕月洞)에서 찾아온 소년을 따라 가끔 헌수를 찾아오던 노인을 만나게 되고 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달이 뜬다. 소요의 정체는 달의 주변을 유유히 날고 있는 시조새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과 허무 맹랑해 보이는 이외수의 소설들은 매번 사람들의 가슴들 적셔줄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 무언가는 감성과 낭만이다. 사랑이 사라져버린 시대, 돈과 물질이 눈을 가리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 때문에 하늘에 달이 사라져 버렸다고 믿는다. 달은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외수가 외치는 목소리는 어쩌면 단순하다.

  가슴속에서 사라진 것들은 가슴 밖에서도 사라진다. 물질로서의 달은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도 정서로서의 달은 가슴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로서의 달도 정서로서의 달도 망실해 버렸다.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고 가슴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장외인간 1, 163페이지

  누가 일부러 가슴에 물기를 걷어내고 스스로 타죽고 싶겠는가. 김영하의 소설에 나온 비과학적인 죽음. 사람의 신체가 스스로 발화하여 타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결국 무덤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이라는 비극적 인식이 아니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본 사람들은 삶의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다만 여전히 밀린 숙제처럼 남아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와 만나게 되면 답이 없다. 당연하다. 거기에 무슨 답이 있겠는가. 이외수도 다만 젖은 가슴으로 감성과 낭만을 잃지 말고 사랑이 가득한 ‘관계’를 꿈꾸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말더듬이의 겨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감성사전’등의 에세이와 시집 ‘풀꽃, 술잔, 나비’까지 거의 모든 책들을 읽어왔지만 이제 유년시절의 추억과 재미있는 문장만으로 장편 소설 2권의 분량을 채워나가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장면 장면 에세이와 재미있는 우화로 풀어낸다면 더 좋았을 것같은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띤다. 소설 본연(?)의 임무가 뭔지 잘 모르겠으나 이제 그만 소설을 놓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한 영혼을 지키자고 감성과 낭만을 그리고 사랑을 지켜 나가자고 외치는 기인이다. 춘천에 가면 격외선당(格外仙堂)에 살고 있는 찾아보고 싶을 것이다. 가을답지 않게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점령하고 있다.


200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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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몸들 창비시선 246
조정권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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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 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늙그막에 데리고 갈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10년 만에 <떠도는 몸들>이라는 시집으로 돌아온 조정권의 시는 여전히 세상 밖에 시선을 두고 있다. 철저하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와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언어의 구석구석을 갈고 다듬지만 시선은 언제나 세상 밖을 주유하고 있는 듯하다.

<산정묘지> 이후 오랜만에 그의 시를 대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시간은 머물러 있는 듯 내면세계의 관심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대로인 채 세월의 깊이만 더해 간다. 현실과 동떨어진 맑고 깨끗한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라고 한다면 조정권은 거리가 멀다. 차라리 인간의 내면을 보지 못해 장자의 눈을 빌어 일상사의 모습들을 무심하게 흘려 보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닿아 있지만 결국 존재론적 관점에서 ‘無’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한 발자국만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라.

여행의 경험에서 비롯된 시들은 정갈하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시들은 슬프다. 생의 본질이 슬픔이라면 조정권은 우울한 정서와 비관적 분위기를 눈물나지 않게 깔아준다. 발에 밟히는, 피부에 묻어나는 비애는 습관처럼 무덤덤해질 수 있는지 반문하고 있는 것같다. 때때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우러르지 말고 발밑에 썩어가는 낙엽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낮은 시선이 필요하다. 조정권의 시는 그렇게 읽혔다.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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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무거운 이유 창비시선 252
맹문재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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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책이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시험을 위해 알았을 뿐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에 밑줄을 그었다 - '책이 무거운 이유'중에서



  맹문재의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의 표제작 중 일부다.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그곳에 숨어 있는 진실을 알지 못하는 곳에 혹은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항상 시인들의 시선과 손길이 먼저 닿아 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읽는지도 모른다. 맹문재의 표정은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화가 난다. 말간 얼굴로 왜 그러냐고 묻는 아이의 순진한 표정은 때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물며 그것이 어른의 것이라면 느낌이 어떨까? 물리적인 나이가 왜 의미가 없는 것인지 나는 살아가면서 느낀다.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른이 있는가하면 노인의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는 십대도 있다. 맹문재의 시선은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진지하다.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과 눈감아버리고 싶은 일들을 들추어내고 쿡쿡 찔러본다. 그리고 묻는다. 아프냐고.

  그리고 그 애매한 실체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울부짖지 않고 무심히 투덜댄다. 소시민적 비애와 생활에 대한 발견이 그래서 새롭게 다가온다. ‘억울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것이 억울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 준 나이테처럼 선명한 우리들 삶의 자국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나온 80년대, 청년 시절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선동적이거나 운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거나 마음의 빚을 청산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이 맹문재 시의 특징이다. 시대를 벗어나 걸어가고 있는 중년 남성의 뒷모습은 패배자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얘기한다. 그가 얘기하는 미래는 어떤 것인지 각자 찾아볼 일이다.


1980년대에 대하여

나는 그를 원망한다
그 때문에 노조원인 나는 안정된 직장을 잃었고
첫사랑을 빼앗겼다
거대한 여당에 표를 찍을 수 없었고
신물 사설에 밑줄 긋지 못했다
더 억울한 것은
종달새 소리와 흰나비를 쫓던 순진한 가슴에
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성실한 회사원이 되었을 것이다
적금 액수를 따지고
부서장의 성격에 관심을 갖고
승진과 아파트 가격에 신경 썼을 것이다
틈나는 대로 주식에 투자하고
주말이면 낚싯대를 챙기고 친목 바둑을 두고
직장간 친선 축구대회에 나가 공도 찼을 것이다

그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고
나는 불만만 많은 소시민이 되었다
산다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분배와 정의와 환경오염을 괜히 문제 삼는다
술을 마시며 이데올로기까지 따지는
추상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부정의 가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나는
억울하지만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지만 시선을 멀리하면 결코 깨끗하지 못하다. 시원한 바람이 귓불을 간질이는 가을밤 공원에 산책을 나가보라. 어둠의 저편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우리를 가두고 있다. 내 안에 나를 들여다보듯 우리가 서로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니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왜 시를 읽는가. 대답없는 시대의 메아리를 위해, 아무것도 ‘없는’ 시집에서 무얼 찾는가. 그래서 이제 아무도(?) 시를 읽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시인인 이렇게 답한다.


시집읽기

누구도 믿지 않는다면 방문 닫아걸고 읽었다
시집 속에 등불은 없었다
늙은 신도가 천국을 외치는 지하철역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일할 자리는 없었다
전투경찰이 어디론가 바쁘게 몰려가는 거리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조용한 공원은 없었다
맹인 부부가 뽕짝을 부르는 육교 위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향수는 없었다
재건축 아파트 값이 홍수처럼 넘치는 동네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따뜻한 방은 없었다
사채업자가 채무자를 두들겨 패는 골목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신용대출은 없었다
포주가 처녀들의 자궁을 들어내는 산부인과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어머니는 없었다
가두리 양식장을 허가하며 표를 긁어모으는 군청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수질 오염은 없었다
친일문학상 후보에 오른 것을 자랑하는 시인 앞에서 읽었다
시집 속에 지식인은 없었다
마흔의 나이에 낙향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읽었다
시집 속에 내가 받을 이자는 없었다
불합격 통지서를 찢듯 쓰린 배를 움켜쥐고 읽었다
시집 속에 배고픈 내가 있었다


 뭐 별로 대단한 것은 없다. 당연한 말이다. 책 속에, 시집에 뭐가 있겠는가. 삶의 ‘진정성’이라는 모호한 대상을 들여다 보고 싶은 욕망만 제거할 수 있다면 그리 궁금할 것도 없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다시 더 한번,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라고 말한 소월은 뭐가 그리웠을까. 인생의 행복은, 삶에 대한 사랑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200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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