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창비시선 250
노향림 지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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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망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생의 한 가운데 서서 받은 편지들을 꺼내보는 일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어느 한 구석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가만히 그대로 놓여있는 편지들을 생각했다. 이메일 편지함 속 열자마자 닫아버린 편지들의 간격을 헤아려 보았다. 사는 일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마다 사람들은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누구에겐가 친밀하지 않아도 마음을 털어 놓거나 한숨을 쉬고 싶어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 빛깔과 상관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근심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에 앉아 쉬고 싶거나 그 빈 터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싶은 것이다.

  노향림의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는 깊은 울림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 울림은 사물에게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세심한 관찰과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흔히 서정시라 명명하는 것들에 대한 찬사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노향림에게 모두 바쳐져도 지나치지 않는다. 언어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시인중의 하나다. 그만큼 탁월한 감수성과 언어의 명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아는 시인이 노향림이다. <눈이 오지 않는 나라>,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등 그의 전작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서정시의 모범 답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나친 감수성과 말재주는 오히려 시인에게 해가 될 수 있으나 노향림은 그 위험성을 극복하고 있다.

  시에 있어 서정(敍情)이란 서경(敍景)의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는 시인이 노향림이다. 그의 시에선 종소리가 들리고 눈이 부시게 빛나는 햇살을 만나며 폭설의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 모든 풍경들이 소리와 빛깔로 빛난다. 무색 무취의 기막힌 물맛을 길어올리는 샘과 같다.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맑아지고 눈이 깨끗해지며 아름다운 풍경화를 들여다 본 느낌이다. 이 시집은 그 맑은 서정으로 빛난다. 

  한 권의 시집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와 느낌이 제각각이겠지만 사소한 이름으로 불려진 주변 사물들에 대해, 낯익거나 낯선 장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감각하며 호흡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닐까. 때로 힘겹거나 우울하거나 기쁘거나 환호하고 싶을 때, 생의 한 순간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을 때 그 기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은 아닐까. 마음의 바람결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낯설지 않은 풍경과 가슴 한구석의 뭉클함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서정시를 읽는 이유다.

  긴 수식과 화려한 포장을 뜯어내고 잠시 눈을 감고 생의 구차함을 잊어버리는 환각 효과를 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렇게 똑같은 자세로 앉아 두통을 앓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과 신선한 향기같은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우리가 시에게 바라는 일은 없다. 그러니 무거운 책임과 가벼운 소홀함 사이에서 물방울을 튀기듯 잠시 깔깔거리거나 먼 데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양수리의 저녁

물안개 핀 양수리의 저녁
바람이 수척한 풀들을 강쪽으로 밀어낸다
가두리 양식장의 노인은 돌아오지 않고
갇힌 물 위를 낮게 낮게 나는 새들의
몸에선 프로펠러 소리가 난다
몇 마리는 소리없이 날아가
바위 틈에서 곁눈질을 한다
창백하게 질린 수은등이 납빛 얼굴로
포복하는 저녁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물비늘 냄새를 터는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물 위에서 반짝이기만 하는 시간들
단 한발짝도 건너오지 못하는
이 먼 그리움



200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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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1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6-11-0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오늘에서야 이사가 끝났습니다. 좋은 이웃들 많이 만나 한 수 배울까 싶습니다. 놀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