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중에서(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였던 기형도 시의 일부다. 다소 엉뚱하게도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고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한 말이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작은 언쟁이 연인들 사이에 오간다. 너무 유치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영원한 사랑’에 대한 열망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과거에, 현재도, 앞으로도 아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인류는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고 인류의 역사인 것처럼.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t,1994>는 모든 연인들의 필독서로 권해도 좋을만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연인 사이의 문제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는다고 해서 실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이렇게 영원히 되풀이되는 주제에 대해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는 관심과 공감을 표시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의 매뉴얼이 나와 있다면 이런 종류의 책도 의미가 없어질테니 말이다. 이성과 사랑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다. 절대 독해 불가능한 타인과 사랑에 대한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과 현실적인 문제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책은 더 없이 훌륭하게 다가온다.

  보통의 전작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essay in love,1993>와 <사랑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kiss & tell,1995> 사이에 쓴 책이니 사랑에 관한 3부작으로 엮는다면 가운데 토막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1년에 한권씩 사랑과 연인들의 심리에 대한 연구(?)를 3년에 걸쳐 완결한 것일까? 93년부터 95년까지의 시기면 69년생인 보통이 만 스물 네 살에서 스물 여섯 살까지 한 권씩 쓴 셈이다. 사랑에 관한 한 박사학위를 받아도 될 만하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일반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보통은 이 책에서도 역시 연인들 사이의 ‘사랑’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랑의 에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완벽한 풀코스를 선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식상하고 당연해 보이는 정식 코스에 숨겨진 비밀들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랑에 관한 금언과 격언들은 다름 아닌 인간 관계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스물 네 살의 영국의 광고 회사 직원 앨리스는 파티에서 의사를 포기하고 금융업에 종사하는 서른 한 살의 에릭을 만난다. 친구 수지와 매트는 조연이고 등장인물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나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앨리스는 필립이라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끝난다. 겉으로 드러난 스토리는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내용들이 어렵지 않게 묘사된다. 많은 철학자들의 말과 문학 작품 속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분명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유머와 재치를 곁들인 보통의 문체는 가독성을 배가 시키고 깊이 잠수했다가 수면위로 떠오르듯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런 문장과 책을 왜 마다하겠는가.

  책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보통 특유의 그림들과 해설들은 쉽고 재미있게 추상적 개념과 연인들의 심리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주관과 객관이 뒤섞여 나름대로 논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색다른 즐거움까지 덤으로 얹어준다. 그것들이 모두 객관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공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와 보편적 정서를 밑바닥에 충분히 깔아두고 있다.

  우리말 제목의 의미 - ‘우리는 사랑일까’는 현재 진행형인 연인들의 관계를 점검하는 시제다. 하지만 ‘사랑 이후’의 연인들이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와 세대를 불문하고 사랑할 예정인 연인들에게,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더 이상 사랑이 필요 없다고 선언한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엉뚱하게도 에릭을 만나기 전 앨리스가 “나랑 세상 사이에 목도리 같은 게 끼어 있는 기분이야. 자연스럽게 느껴는 걸 막는 담요 같은 게 있어.”라고 말하는 부분에 공감하기도 하고, 앨리스가 에릭에게 이별을 선언할 즈음에 하는 생각 - 그이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이구나. -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한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라는 유명한 경구의 진부한 메아리였다. - 이 모든 사람과 공감할 만하다.

  20세기 사랑과 연인들의 심리에 관한 보급판 같은 책이라는 속된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면 부담없이 소파에 파묻혀 책장을 넘겨도 본전 생각은 나지 않을 것 같다.


20051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