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5
윤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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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첫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는 88년간에 출간되었고 이듬해에 그를 만났다. 물론 시로 그를 처음 만났다.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시인도 아니고 주목받는 작품을 쏟아낸 적도 없다. 그의 첫 시집 마지막 시다.

죽지 않기 위하여

춥다.
곱은 손을 비비며 아침을 맞는다
성에 낀 유리창에 손톱으로
‘나는 오늘 아침에도 숨을 쉰다’라고 쓴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죽지 않기 위하여
몇 번 부대끼며 거리로 나서면
한 번 더 우스워지는 꿈.
생각할 줄 안다는 가장 빛나는 선물로
우리는 이만큼 슬펐잖은가

삶의 이유를 죽음에서만 찾아야 하는
우리들의
마른하늘을 위하여
마른기침과 변신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나와 내일을 위하여
입김으로 곱은 손을 녹이며 쓴다
‘살아야지 살아야지’

  2005년 가을. 그의 유고 시집 <고향길>을 대하는 마음은 헛헛하다. 첫 시집의 마지막 구절이 아이러니 하게도 ‘살아야지 살아야지’였는데, 이제 그의 마지막 시집을 들고 있다. 가난한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살뜰하게 드러내고 도시의 척박함을 담아내던 시인은 꼭 반세기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몇 년전 돌아가신 이문구 선생님의 뒤를 따라.

나헌티는 책음감 있이 살라구 허시등만
- 이문구 슨상님께

비설거지할 참도 마다하고
곰새 내렸다, 히뜩
골안개만 피우고 사라지는
여우비
처럼, 황망하게 가셨네.
개갈 안 나는 세상이라구
비죽이 웃으시드니,
슨상님 혼자 손 털고 뒷짐 진대유?
세상은 여적 그 세상인디……

  ‘세상은 여적 그 세상인디’, 아직 할말이 많이 남았을텐데 윤중호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지금쯤 이문구 선생을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제 둘이서 손 털고 뒷짐 지고 이 세상을 내려다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산다는 것이 때로 저 하늘의 구름만큼 덧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깊어 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푸른 하늘을 우러러 깊은 숨을 쉴 때 마다 맡아지는 공기의 냄새. 살아있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먼 훗날 내 삶의 자세를 되돌아보며 후회를 남기지는 말아야 할텐데 싶다. 윤중호 시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편히 잠드소서.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모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잠깐만요. 마지막 저
당재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
무덤 가는 길만 한 번 더 보구요.

이. 제. 됐. 습. 니. 다.

- 미완유고시 ‘가을’

 

 

 

200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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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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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소적인 책읽기 스타일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모든 책에서 저자와 대화를 나누며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 대한 애증은 영원히 계속되겠지만 좋은 책에 대한 열망만큼은 쉽게 가시지도 않을 것같다. 그래서 더더욱 목마르고 갈증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하드보일드 하드럭>으로 첨 만났다. 순전히 남미에 대한 관심 때문에 조금 다른 시각이나 특별한 애정으로 남미를 살펴 볼 수 있을까 싶어 그녀의 소설 <불륜과 남미>를 읽었다.

  책 뒤에 여행 일정표를 부록으로 실어 놓을만큼 그녀의 여행 경험이 철저하게 소설에 반영되어 있어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모호하다. 작가의 말에서 실제 여행 경험을 소설속에 녹여 낸 장면들도 발견된다. 여행하는 모든 인간들이 부럽다. 평생 세상을 떠돌며 책만 읽다 죽을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한다. 그래서 부럽다. 200여페이지의 짧은 분량속에 그림과 사진을 삽입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남미에 대한 여행 욕구만 잔뜩 부풀려 놓는다. 그래, 가고 싶다.

  이 여행 에피소드 단편들은 7편을 묶었다. ‘전화, 마지막 날, 조그만 어둠, 플라타너스, 하치 하니, 해시계, 창밖’이 그것이다. 물론 제목처럼 불륜에서 오는 열정과 고뇌,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해석은 꿈도 꾸지 마라.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처럼, 받아본 적도 없는 남미의 가을 햇살처럼 노근하게 온몸의 긴장을 풀어놓는 편안함과 여유가 오히려 독자를 긴장시킨다. 뭔가 있을 텐데 싶은 조바심도 생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허무하다.

  이국적인 풍물과 분위기 낯선 곳에서의 상상과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책이 될 수 있을까? 문체로 승부하기에도 내겐 너무 지루하게 느껴진다. 오감을 충족시키거나 이성의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어정쩡한 책을 골라내는 힘은 언제 생기려나.

  회색빛 하늘 만큼 우울한 날이다.



우울

어떤 형태로든
우울하다.

- 시 : 서정윤



200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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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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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작가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은 그의 명성을 확인해 줄만한 수작이다. 우선 구성 측면에서 전통적인 방식인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의 넘나듦이 이 틀을 깨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작가다. 그의 소설 속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소설속에 ‘신탁의 밤’이라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건과 내용의 주된 내용은 외화(外話)나 내화(內話)라고 말할 수 없다. 현실인 외화와 소설인 내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3중구조의 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문체와 전달방식에서도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오랜 병을 앓고 퇴원한 오어는 아내 그레이스와 함께 살고 있는 작가다. 브루클린의 한 문구점에서 포르투갈제 푸른 노트를 구입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속에는 닉 보언이라는 작가와 아내 에바 보언 그리고 로사 라이트먼이라는 편집자와 ‘역사보존관리소’를 만든 에드 빅토리가 등장한다. 또 소설속에 등장하는 실비아 맥스웰이 쓴 ‘신탁의 밤’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정리하면 소설속의 소설속의 소설이 바로 ‘신탁의 밤’이다.

  어떤 소설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하는가? 없다. 이 소설도 그런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한 또다른 통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구성요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도 제각각이겠지만 정답은 없다.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필연과 우연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놓는다. 다소 복잡하고 작위적인 구성으로 느껴질 법도 하지만 공상 과학 소설이나 기시감을 들먹이는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지닌 불가해한 측면을 깊이있게 고민하고 있는 소설로 읽혔다.

  작가가 기울인 그만큼의 깊이와 구성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현실속의 존 트로즈라는 대가의 입을 통해 글은 현실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이 작가의 다른 목소리로 들린다. 말보다 더 미래에 대한 예언적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 글이라는 얘기다. 시드가 쓴 푸른 노트 속의 이야기를 아내 그레이스가 꿈을 꾸고 소설 속 이야기와 현실이 점점 충첩되면서 시드는 결국 푸른 노트를 찢어버리지만 소설속의 소설 ‘신탁의 밤’의 얘기처럼 아내 그레이스와 존 트로즈의 관계에 대한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버린다. 소설의 말미에서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같은 시간에 벌어졌던 각기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병치시킴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도 되새기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 한 편을 통해 하나의 주제나 도덕 교과서처럼 하나의 교훈을 제시하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폴 오스터는 그저 흘러가는 혹은 살아지는 인생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다만 영원한 숙제인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 보인다. 미래는 예언될 수도 있으며 현실과 상상은 언제든 충첩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우연이 전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당연한 전언.

  순간 순간에 대한 상황 묘사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현실과 소설의 내용이 겹치거나 영향을 주는 장면들이 전혀 어색하거나 서툴지 않다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래서 읽을 만하다. 호흡이 짧고 간결하지 않다. 다소 길고 느린 문장으로 생각의 속도를 지루하게 끌고가는 면이 있으나 내용과 어울리고 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특별히 새롭고 환상적인 소설이 없다면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소설도 괜찮았다.

  ‘신탁의 밤’은 사실 미리 예정된 운명 안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의 밤’에 대한 아이러니로 읽을 수도 있겠다. 어쩌겠는가 인간의 삶에 대한 한계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볼 밖에. 그것이 모순된 생의 부조리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200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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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입 창비시선 245
천양희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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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정시가 유효한 것은 머리로는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서정시는 건재할 것이다. 다만 감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시들만 피해갈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그런 시가 있기나 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시에서 절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어떤 형태로든, 우스꽝스럽게 혹은 어설픈 몸짓으로 많은 책으로 엮여왔는지 독자들은 알고 있다. 각설하고 올 봄에 나온 시집, 천양희의 <너무 많은 입>에서 몇 편이 내게로 왔다.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왜 ‘뒤편’인가? 그건 시인의 시선이므로 따라가면 될 일이다. 다가오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영원히 기억되는 법이다. 동전의 앞뒤처럼 생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믿는다. 잘못된 믿음인가? 아니 그러면 그 뒷모습을 포착할 줄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바꿔본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거라는 진단이 떨어진다. 동의할 수 밖에. 시인은 또 말한다. 그 지겨운 희망에 대해.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을 놓아버리는 일은 여전히 금기된다. 그러면 남는게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형태의 희망이며 무엇을 희망하고 있으며 어떻게 희망하는가가 문제이다. 물론 그 실현방식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노선

형님은 자기 노선(路線)이 있소?
독립문 지나다 아우가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걸까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나의 노선이 될 텐데

아우는 자기 노선이 있나?
광화문 지나다 형이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형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요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너의 노선이 될 텐데

가다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이 우리의 노선이리

  ‘가다보면 길이’ 된다고? ‘그것이 희망’이라고?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노신의 말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사람 두사람 가다보면 길이 생긴다’는.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선구자들의 이야기고, 등떠밀려 그 길의 첫 번째 보행자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평범에 바쳐지는 ‘희망’은 없는가? 구체적인 ‘희망가’는 울려퍼지지 않는다. 당연한 일에 목숨걸지 말자. 시인은 신이 아니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생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올곧은 시선으로 ‘희망’과 ‘노선’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말이 때로는 위로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희망’은 ‘완창’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절망만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희망’에 대한 평가와 기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필요성은 인정하자. 인간과 사회로 확대된 ‘희망’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꿈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교감’에서 시작된다. 이 울림과 떨림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메마른 생을 산다. 겹침과 떨림을 느껴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욕망이 있기나 한 걸까?

교감

한 마음의 움직임과
한 마음을 움직이게 한
한 마음의 움직임이
겹쳐 떨린다
물결 위에 햇살이 겹쳐 떨리듯

시집을 읽다가 발견한, 어딘가에서 본 듯한, 참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구절이 눈에 밟힌다. 내가 걷는 이 길이 가장 먼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 '뒷길' 중에서

 

200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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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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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는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이다. 사람들이 유독 비에 약한(?) 이유는 과거의 기억에 젖어들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들과 살아온 과정들을 반추하고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며 쉼표같은 한숨을 내뱉는다. 세상에 대한 열정과 냉소를 멈추고 잠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같은 존재가 ‘가을비’다.

  김영하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는 우리들 삶의 거울처럼 시대와 세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단편의 힘은 촌철살인의 강렬함이다. 잠이 덜깬 아이의 얼굴에 부딪치는 찬물처럼 우리들 정신에 부어지는 냉각수다. 김영하의 소설들은 그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현대문학에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로 처음 만난 이후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소설들은 여전히 일상성에 바쳐지고 있다. 어둡고 컴컴한 역사의 뒤안길과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방대한 스케일의 소설과는 구별되는 김영하의 소설들은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8편의 단편으로 묶인 이 소설집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금 여기’를 보여주고 있다. 뒤틀리고 일그러진 삶의 가치와 우울하고 모멸스런 현실들을 뻔뻔스럽게 보여준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의 자화상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외면하고 싶게 만든다. 비루하고 답답한 현실이 우리 삶의 일부라면 피해갈 이유가 없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사소한 생활의 일부가 모여 우리 삶의 마디를 이루고 그 마디들이 모여 한 시대를 이룬다. 마치 홍상수 영화가 보여주는 미의식과 유사한 김영하의 소설들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옴니버스식의 단편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같다.

  두 부부의 ‘이사’를 소재로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끔찍하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너를 사랑하고도’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는 모멸스런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삶의 가치를 상실한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정에 대한 뒤틀린 모습으로서 ‘너의 의미’를 보여준다. ‘보물선’에서는 신기루같은 욕망의 끝을 보여주고, ‘마지막 손님’에서는 단순한 일상을 그려낸다. 표제작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는 가족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김영하의 소설을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무모하다. 8편의 단편이 보여주는 미덕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세계의 핵심은 삶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물들은 생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태도를 보여준다. 다만 그 욕망들을 구현해내는 방식들이 제각각이며 뒤틀리고 비틀어진 형태로 현실에 반영된다. 그것이 더욱 비극적인 것은 특별한 누군가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거울속에 비친 나와 우리들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듯 소설의 내용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세태소설로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고 직설적으로 보여주려는 김영하의 소설은 단숨에 읽힌다. 어쩌면 소설은 그래야한다고도 생각해본다. 미처 손뻗어 만져보지 못한 곳을 더듬게 한다. 작가는 우리의 손을 이끌고 어둠속의 그 무엇인가를 애써 확인하게 만든다. 왜 여기, 이것에 대해서는 말이 없냐고. 소설이 TV 교양프로처럼 거만을 떨거나 사회 곳곳의 문제를 지적하고 털어내며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아프다고 여기를 보라고 소리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이 소설들은 고발자의 역할도 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열정은 냉소를 낳는다. 뒤틀리고 억압된 개인의 욕망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그런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현실을 바라보자. 대안이나 특별한 처방은 없다.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 그저 살아볼 일이다. 주변을 기웃거리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를 돌아보고 영화같은(?) 일상들을 즐기면 그 뿐 아닌가.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생의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가. 나는 없다고 본다. 다만 과정에 충실하고 현재를 즐기며,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해 보는 것 뿐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그렇게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래된 그 자세를 바꿔 보라고, 다리를 바꿔 꼬아 보라고.


200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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