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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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에서 조는 스님이 있으면 죽비로 어깨를 치는 관행이 있다고 한다. 그 치는 뜻이 아프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딱, 소리로서 졸음을 쫓는 데 있다고 한다. 현대문학에 한때 연재되던 여러 사람의 서평 토론 코너를 ‘죽비소리’로 소개한 적이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누군가 늘 스승이 되어 주고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태하고 게으른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도록 깨우쳐 주는 스승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순간순간 곳곳에서 그런 사람이나 글들을 마주하게 되면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생각이 든다.


  정민 교수는 한국한문학을 전공하면서 읽었던, 졸음이 올 때 들이키는 냉수같은 글들을 모아 놓았다. 이를테면 나의 책갈피를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지극히 선생다운 발상인 것이다. 개인적 경험과 성향이 다르다 할지라도 고전에서 맛볼 수 있는 짧은 단상과 그 깊은 뜻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 조상들의 생활 모습으로 흥미롭게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을 오롯이 새긴 한 권의 책이다.


  고려가요 동동은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을 1월부터 12월까지로 나누어 노래하고 있는 월령체 노래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농가월령가는 정학유가 농사법을 각 월에 맞추어 소개하고 있는 월령체(달거리) 노래다. <죽비소리>는 이 고전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회심(會心-사물과 나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다)부터 통변(通辯-변해야 남는다)까지 열두개의 주제로 묶어 옛 선비들의 정갈한 몸가짐과 마음 씀씀이를 전해주고 있다. 간단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지만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글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오랫동안 되새김질하게 한다.


  “남을 살피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살피고, 남에 대해 듣기보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들으라.(위백규 1727~1798, 좌우명)”은 열 살 때 지었다는 좌우명이다. 그 조숙함에 두 손을 들어버린다. 이 책은 손이 닿는 칸에 꽂아두고 마음이 신산스럽거나 안락한 현실과 나태한 생활이 반복되는 순간 꺼내어 잠깐씩 부분별로 읽어도 되는 책이다. 사전처럼 오래 두고 볼 수 있겠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생각지 못해 발전하지 못하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일침이 될만하다.


  우리도 때때로 글을 읽다 좋은 구절이 나오거나 무릎을 치는 부분이 나오면 메모해 두거나 밑줄을 긋기도 하듯 그렇게 오랫동안 공들인 정민 교수의 책갈피를 들여다 보는 느낌으로 읽으면 좋다. 게다가 나만의 책갈피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재미도 클듯 싶다. 요즘 하루살이처럼 소일하는 나에게 죽비소리가 된 글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눈도 밝고 두 손도 멀쩡하면서 게으름 부리기를 즐기는 자는 툭하면 ‘소일消日’하기가 아주 어렵다고 말한다. ‘소일’ 즉 ‘날을 보낸다’는 두 글자는 ‘석음惜陰’ 곧 ‘촌음을 아낀다’는 말과는 서로 반대가 되니 크게 상서롭지 못한 말이다.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일찍이 이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 이덕무, <사소절>


200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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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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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에 접어들고,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문예반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시인을 꿈꾸다. 대학 신입생, 시집끼고 방황하고 껄렁대던 시절 학교앞 언덕위에 카페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만나다. 도서관에 가 반쯤 읽다 팽개치다. 고등학교때 읽은 헤르만 헤세의 ‘知와 사랑Nasziss und Goldmund'가 생각나다.

스무살 무렵 그렇게 카페 이름으로 처음 알게 된 이 책은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 습작에도 등장했었다. 2005년 다시 읽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재밌다. 그리스인들에게 크레타와 터키의 대립항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다. 어린시절 터키 지배하에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으며 ‘자유와 해방’을 얻기위해 3단계 투쟁을 계획한다. 호메로스에게 영향을 받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베르그송과 니체를 거쳐 실존 인물인 ‘조르바’를 만나게 된다.

소설의 서사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주인공인 ‘조르바’와 겪는 크레타에서 한 시절을 이야기 한다. 항구에서 만나 고향 크레타로 간 나는 갈탄광 사업을 ‘조르바’에게 맡겨 놓고 독서와 글쓰기, 특히 부처에 대한 글쓰기로 생을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수십년 간 독서와 사색으로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조르바’는 단 한순간에 수많은 경험과 몇마디 직설 화법과 행동으로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 과부인 부불리나(오르탕스 부인)를 만나 거침없는 사랑과 열정에 빠지는 노인 ‘조르바’와 대조적으로 나는 검은옷을 입은 젊고 아름다운 과부를 지켜내지(?) 못하고 동네 청년이 짝사랑하다 자살하자 동네사람들에게 칼려 찔려 죽는 상황을 맞게 된다. 결국 갈탄광 사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부불리나는 병들어 죽고 ‘조르바’와 헤어져 마지막으로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를 받는다. ‘조르바’의 죽음을 전하는 편지를.

열린책들에서 2000년판으로 나온 이 책은 전통적인 사철방식으로 만들었다고 자랑할만하다. 양장본으로 만들어진 책의 질감과 느낌, 부피와 크기가 아주 만족스럽다.

이 작품에서 나는 전형적인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조르바’는 수많은 전쟁 경험과 노동을 통한 땀의 소중함을 알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순간에도 초월적인 모습을 보인다. 수도승과 수도원장을 골탕먹이는 그의 행동들은 종교의 허위의식과 감각적이고 현실적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유사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준 영향만큼 실존 인물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마련해 놓았다는 그의 비문이다. ‘조르바’ 없이는 써지지 않았을 비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신성모독으로 작가를 파문하려 했고 교황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존질서의 틀을 거부하며 종교와 도덕적 사회규범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적 속성과 자유 의지를 보여준 작가로서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실천에 옮기기 힘든 삶의 지향이 바로 본질적 ‘자유’가 아닌가.


200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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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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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D 모니터에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는 일은 외롭다. 그것은 작가로 이름 붙혀진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다. ‘고시에 합격하기보다 더 어려운 인생살이’에 대한 막막함 같은 것이다.

이문열이 소설만 쓰던 시절, 그러니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이상 문학상을 받은 1987년부터 나는 <이상문학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책을 사기 시작했다. 그해 89년 김채원의 ‘겨울의 환’이 수상작이었다. 책꽂이에 나란히 17권이 꽂혀있다.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와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까지 19권이다. 나이테 같은 느낌으로 가끔 들여다 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작가들이 수상자로 선정된다. 벌써(?) 늙어버린듯한 착각과 더불어 책을 읽는 태도와 감정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매년 수상 작품집을 읽다보면 수상을 염두해 두고 쓴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 즉 이상문학상스러운 소설들에 눈이 간다. 올해의 수상작 ‘몽고반점’은 우수상 수상작들과 비교해서 단연 돋보인다. 수상 취지와도 부합하며 소설적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도 훌륭하다. 유미주의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로 분류될만한 본격적인 예술가 소설로 읽혔다. 처제의 몸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몽고반점은 비디오 예술가인 주인공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며 성적인 욕망으로까지 발전된다. 처제의 채식주의는 동물성에 대한 역겨움과 삶에 대한 환멸을 동일시한다.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세계를 형부의 제안으로 시작한 비디오 작업 속에서 다시 확인하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확인한다. 미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스친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동생과 남편의 비디오를 보고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아내의 심정과 태도는 이 작품의 결말에서도 중요하지 않다. 몽고 반점으로 대표되는 몸에 대한 관심과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싶은 유년에 대한 그리움은 순수성에 대한 욕구의 다른 이름이다.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대한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슬픈 몸짓이다.

소설가 한강의 문체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를 낸다. 깔끔하고 단정한,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문체의 수려함이 아니라 어딘지 어색한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철저하게 계산된 하드보일드라면 소설속 주인공이 주는 열정과 환상을 객관화시키는 중화제 역할을 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슬프고 처참한 현실속의 불감증 환자들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삶에 대한 열정과 아픔이 없는 건조한 생활들을 돌아보는 한가한 시간의 향이 풍부한 커피 한잔 쯤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소설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생각하며 문학이 갖는 해묵은 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쟁을 꺼낼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을 테니까. 몽고반점은 재밌다. 그리고 외롭다.

장편 소설 ‘길위의 집’과 ‘사랑하라, 희망없이’가 우연히도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다. 우수상 수상작 이혜경의 ‘도시의 불빛’과 윤영수의 ‘내 여자 친구의 귀여운 연애’는 재미없다. 고백적 형식의 ‘도시의 불빛’은 새로움과 흡입력이 부족하고 윤영수의 소설은 밋밋하다.

이만교의 ‘표정관리주식회사’는 풍자적 세상읽기가 돋보이는 소설로 형식의 새로움과 인물에 대한 표현이 풍부하지만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경욱의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TV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소외된 개인에 대한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읽었다. 나비로 상징되는 주인공의 태도가 낯설지만 평범하다. 소설의 내용 또한 진부하다. 문체와 형식으로만 독자에게 다가설 수는 없는 일이다.

천운영의 ‘세번째 유방’은 재밌다. 맛깔스럽고 입에 감기는 서술이 돋보이며 고백적 형식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독특한 내용의 신선함과 흥미로운 주인공들에 대한 접근 방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박민규의 ‘갑을고시원체류기’는 그 답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그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보여준 여유와 재치있는 글쓰기가 가벼움으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다만 고시원에서 만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분량과 상관없이 인상적인 모습들로 스케치하거나 독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90년 초반에 대학 시절을 보낸 동시대 인물에 대한 연민이 개인적 경험으로 수용될 수 있어 특별하게 읽었다.

1년 후에 다시 만?작품집에 대한 기대보다는 이제 시간의 흐름과 나이에 대한 부담까지 떠오르는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내년이면 일련번호 30번째 작품집이 나온다. 많은 작가들의 새로움을 확인하는 순간들을 기대해 본다.

200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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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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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90년 여름에 출간됐던 <그대에게 가는 먼길>이라는 이성복의 책은 신선했다. 산문이라고 이름붙이기에 애매한 단편들을 모아 ‘이성복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으로 묶어냈기 때문이다. 낯설고 새로운 형식이었으나 이외수 등의 산문집을 경험한 독자들에게 처음이라는 인상을 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은 내가 접한 첫 책이었다. 이제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를 통해 아포리즘과 역설에 대해 다시 그의 책을 뒤적여본다.

“문학은 현실로 들어가는 문(門)이다. 문학을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사람들이 문학으로부터 배신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조금이라도 문학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이성복, 살림, 1990

문학에 관한 그 많은 책들을 읽는다고 해서 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렐레스의 ‘시학’으로 시작해서 김현, 김주현의 ‘문학이란 무엇인가’까지 고개만 돌려도 눈에 띄는 무수한 문학에 관한 담론들을 바라보면 지겹기까지하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들 속에서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들 속에서 우리의 삶은 더없이 풍요로워지고 봄 햇살처럼 부드러운 느낌으로 생을 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유명한 작가들과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들이며 그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진지한 대답이고 길들이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는 여러 대학과 각종 행사에서 발표한 글들과 논문집과 잡지에 실렸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문학의 기능에서부터 상징, 문체, 아이러니의 층위들까지 폭넓은 독서와 사유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설명해주고 있다. 보르헤스의 영향을 고백하고 형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으며 ‘거짓의 힘’을 통해 보여주는 ‘장미 십자가단’에 관한 유럽의 환상과 신화적 상상력을 실증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학자로서 보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의 작가인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에코의 문학론은 이탈리아의 작가들과 유럽 문화의 토양에서 성장한 에코의 문학적 편력들을 읽어낼 수 있다. 동양적 문화와 가치관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문학의 보편성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부분들에만 동의한다. 실제로 읽지 않은 보르헤스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소단원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흥미가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역일 것이다.

에코의 이 책이 갖는 미덕은 문학에 대한 다양한 반응 방식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나올것도 보태질 필요도 없을 듯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의 재구성하고 실제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에코 방식의 문학에 대한 자세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역자인 김운찬 교수가 달아놓은 주가 가독성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탈리아와 유렵 문화에 까막눈인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문학에 관한 모든 길을 다 안다. 그 어느 한 길도 제대로 갈 수 없다는 것까지…… 문학은 삶이다. 삶이 곧 문학은 아니라 하더라도.”라고 했던 이성복 시인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포리즘과 역설에 대해 어떤 표정을 짓을지 궁금하다. 단 한마디로 인생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작가를 기다리는 것보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보다 많은 작가들과 책을 만나고 산책하며 사유할 시간을 가져볼 것이다.

200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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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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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다. ‘너에게 묻는다’는 다소 도발적 제목으로 이기적인 삶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요구한다. 이타적 사랑과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작가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정서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벌써 여덟 번째 시집이라니 세월이 빠르다.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까지 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시집은 많이 달라졌다. 시인들은 보통 나이가 들면서 인식의 고삐가 늦추어지고 사물에 대한 시선의 각이 무디어 진다. 이것을 생에 대한 부드러움과 포용, 사고의 확장과 인식의 변화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뭔가 거대한 사상과 모든 것들에 대한 관조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 권혁웅의 상찬식 해설은 시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간격>을 보자.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고서야 알았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두기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뛰어나다. 나무와 숲의 조화를 ‘거리’로 파악한 눈은 놀랍기만 하다.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지만 않는다면 인간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지나친 관심과 이해와 사랑만이 미덕은 아닐텐데. 살아가면서 더욱 어려워지는 이 관계 맺기에 대한 통찰이 놀랍기만 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같이 울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괭이는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돌의 울음)라고 말하는 안도현의 말이 아프게 새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생 동안 나무가 나무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늘의 햇빛과 땅의 어둠을 반반씩, 많지도 적지도 않게 섞어서
    자기가 살아온 꼭 그만큼만 그늘을 만드는 저 나무가 나무인 것은
    그늘이라는 것을 그저 아래로 드리우기만 할 뿐
    그 그늘 속에 누군가 사랑하며 떨며 울며 해찰하며 놀다가도록 내버려둘 뿐
    스스로 그늘 속에서 키스를 하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눈물을 닦거나 성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말과 침묵 사이, 혹은
    소란과 고요 사이
    나무는 저렇게
    그냥 서 있다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중에서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이 ‘이끼’에서는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거나 눈이 환하게 밝아진다고 했거니와 이끼가 알고 있는 건 그늘이 허공의 전부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낯설고 다른 시선으로 나무와 숲과 돌과 이끼를 바라보아야 새로움이 보이는 걸까 싶다. 말하기 전에 느껴져야하는 것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안도현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스치기 쉬운 생의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통찰을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시집의 표제작 ‘강’을 살펴보자.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나는 또다시 기막힌 시 한편을 만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한참동안 반복해서 음미했다. 스무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처음 돈을 벌었다. 책방으로 달려가 시집 두권을 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시작해서 이제 겨우 400여권의 시집이 책꽂이 하나를 채우고 있다. 어렵고 힘들때, 기쁘고 행복할 때마다 시집에 기댄다. 손때 묻도록 꺼내보고 인용했던 많은 시들과 가슴에 담아두고 사람들에게 전했던 시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길 바란다. 천권의 아름다운 시집을 전해줄 아이들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으면 더욱 기쁘겠다.

  비록 날카로움과 날선 비판의 시선은 거두었으나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는 시인의 안주가 아니라 세상을 읽어내는 또다른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좀더 새롭고 낯선, 독자의 기다림에 부응하리라 믿는다. 꼬리에 꼬를 물고 연쇄적인 순환의 반복 구조를 보여주며 “너에게 가려고”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200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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