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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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의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다. ‘너에게 묻는다’는 다소 도발적 제목으로 이기적인 삶에 대한 반성과 각성을 요구한다. 이타적 사랑과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작가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정서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벌써 여덟 번째 시집이라니 세월이 빠르다.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까지 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의 시집은 많이 달라졌다. 시인들은 보통 나이가 들면서 인식의 고삐가 늦추어지고 사물에 대한 시선의 각이 무디어 진다. 이것을 생에 대한 부드러움과 포용, 사고의 확장과 인식의 변화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뭔가 거대한 사상과 모든 것들에 대한 관조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 권혁웅의 상찬식 해설은 시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간격>을 보자.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고서야 알았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두기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뛰어나다. 나무와 숲의 조화를 ‘거리’로 파악한 눈은 놀랍기만 하다.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묻지만 않는다면 인간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지나친 관심과 이해와 사랑만이 미덕은 아닐텐데. 살아가면서 더욱 어려워지는 이 관계 맺기에 대한 통찰이 놀랍기만 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같이 울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괭이는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돌의 울음)라고 말하는 안도현의 말이 아프게 새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생 동안 나무가 나무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늘의 햇빛과 땅의 어둠을 반반씩, 많지도 적지도 않게 섞어서
    자기가 살아온 꼭 그만큼만 그늘을 만드는 저 나무가 나무인 것은
    그늘이라는 것을 그저 아래로 드리우기만 할 뿐
    그 그늘 속에 누군가 사랑하며 떨며 울며 해찰하며 놀다가도록 내버려둘 뿐
    스스로 그늘 속에서 키스를 하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눈물을 닦거나 성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말과 침묵 사이, 혹은
    소란과 고요 사이
    나무는 저렇게
    그냥 서 있다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중에서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이 ‘이끼’에서는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거나 눈이 환하게 밝아진다고 했거니와 이끼가 알고 있는 건 그늘이 허공의 전부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낯설고 다른 시선으로 나무와 숲과 돌과 이끼를 바라보아야 새로움이 보이는 걸까 싶다. 말하기 전에 느껴져야하는 것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안도현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스치기 쉬운 생의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통찰을 전해준다. 마지막으로 시집의 표제작 ‘강’을 살펴보자.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나는 또다시 기막힌 시 한편을 만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한참동안 반복해서 음미했다. 스무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처음 돈을 벌었다. 책방으로 달려가 시집 두권을 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시작해서 이제 겨우 400여권의 시집이 책꽂이 하나를 채우고 있다. 어렵고 힘들때, 기쁘고 행복할 때마다 시집에 기댄다. 손때 묻도록 꺼내보고 인용했던 많은 시들과 가슴에 담아두고 사람들에게 전했던 시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길 바란다. 천권의 아름다운 시집을 전해줄 아이들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으면 더욱 기쁘겠다.

  비록 날카로움과 날선 비판의 시선은 거두었으나 사십대 중반을 넘어서는 시인의 안주가 아니라 세상을 읽어내는 또다른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좀더 새롭고 낯선, 독자의 기다림에 부응하리라 믿는다. 꼬리에 꼬를 물고 연쇄적인 순환의 반복 구조를 보여주며 “너에게 가려고”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200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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