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무더웠던 90년 여름에 출간됐던 <그대에게 가는 먼길>이라는 이성복의 책은 신선했다. 산문이라고 이름붙이기에 애매한 단편들을 모아 ‘이성복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으로 묶어냈기 때문이다. 낯설고 새로운 형식이었으나 이외수 등의 산문집을 경험한 독자들에게 처음이라는 인상을 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아포리즘이라는 형식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은 내가 접한 첫 책이었다. 이제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를 통해 아포리즘과 역설에 대해 다시 그의 책을 뒤적여본다.

“문학은 현실로 들어가는 문(門)이다. 문학을 신주단지처럼 받드는 사람들이 문학으로부터 배신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조금이라도 문학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삶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이성복, 살림, 1990

문학에 관한 그 많은 책들을 읽는다고 해서 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렐레스의 ‘시학’으로 시작해서 김현, 김주현의 ‘문학이란 무엇인가’까지 고개만 돌려도 눈에 띄는 무수한 문학에 관한 담론들을 바라보면 지겹기까지하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들 속에서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들 속에서 우리의 삶은 더없이 풍요로워지고 봄 햇살처럼 부드러운 느낌으로 생을 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유명한 작가들과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들이며 그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진지한 대답이고 길들이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는 여러 대학과 각종 행사에서 발표한 글들과 논문집과 잡지에 실렸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문학의 기능에서부터 상징, 문체, 아이러니의 층위들까지 폭넓은 독서와 사유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게 설명해주고 있다. 보르헤스의 영향을 고백하고 형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으며 ‘거짓의 힘’을 통해 보여주는 ‘장미 십자가단’에 관한 유럽의 환상과 신화적 상상력을 실증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학자로서 보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의 작가인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에코의 문학론은 이탈리아의 작가들과 유럽 문화의 토양에서 성장한 에코의 문학적 편력들을 읽어낼 수 있다. 동양적 문화와 가치관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문학의 보편성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부분들에만 동의한다. 실제로 읽지 않은 보르헤스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는 소단원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흥미가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역일 것이다.

에코의 이 책이 갖는 미덕은 문학에 대한 다양한 반응 방식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나올것도 보태질 필요도 없을 듯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름의 방식의 재구성하고 실제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에코 방식의 문학에 대한 자세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역자인 김운찬 교수가 달아놓은 주가 가독성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탈리아와 유렵 문화에 까막눈인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문학에 관한 모든 길을 다 안다. 그 어느 한 길도 제대로 갈 수 없다는 것까지…… 문학은 삶이다. 삶이 곧 문학은 아니라 하더라도.”라고 했던 이성복 시인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포리즘과 역설에 대해 어떤 표정을 짓을지 궁금하다. 단 한마디로 인생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작가를 기다리는 것보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보다 많은 작가들과 책을 만나고 산책하며 사유할 시간을 가져볼 것이다.

200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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