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LCD 모니터에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는 일은 외롭다. 그것은 작가로 이름 붙혀진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다. ‘고시에 합격하기보다 더 어려운 인생살이’에 대한 막막함 같은 것이다.

이문열이 소설만 쓰던 시절, 그러니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이상 문학상을 받은 1987년부터 나는 <이상문학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책을 사기 시작했다. 그해 89년 김채원의 ‘겨울의 환’이 수상작이었다. 책꽂이에 나란히 17권이 꽂혀있다.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와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까지 19권이다. 나이테 같은 느낌으로 가끔 들여다 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작가들이 수상자로 선정된다. 벌써(?) 늙어버린듯한 착각과 더불어 책을 읽는 태도와 감정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매년 수상 작품집을 읽다보면 수상을 염두해 두고 쓴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 즉 이상문학상스러운 소설들에 눈이 간다. 올해의 수상작 ‘몽고반점’은 우수상 수상작들과 비교해서 단연 돋보인다. 수상 취지와도 부합하며 소설적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도 훌륭하다. 유미주의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로 분류될만한 본격적인 예술가 소설로 읽혔다. 처제의 몸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몽고반점은 비디오 예술가인 주인공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며 성적인 욕망으로까지 발전된다. 처제의 채식주의는 동물성에 대한 역겨움과 삶에 대한 환멸을 동일시한다.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세계를 형부의 제안으로 시작한 비디오 작업 속에서 다시 확인하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확인한다. 미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스친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동생과 남편의 비디오를 보고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아내의 심정과 태도는 이 작품의 결말에서도 중요하지 않다. 몽고 반점으로 대표되는 몸에 대한 관심과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싶은 유년에 대한 그리움은 순수성에 대한 욕구의 다른 이름이다.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 대한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슬픈 몸짓이다.

소설가 한강의 문체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를 낸다. 깔끔하고 단정한,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문체의 수려함이 아니라 어딘지 어색한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철저하게 계산된 하드보일드라면 소설속 주인공이 주는 열정과 환상을 객관화시키는 중화제 역할을 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슬프고 처참한 현실속의 불감증 환자들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삶에 대한 열정과 아픔이 없는 건조한 생활들을 돌아보는 한가한 시간의 향이 풍부한 커피 한잔 쯤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소설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생각하며 문학이 갖는 해묵은 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쟁을 꺼낼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을 테니까. 몽고반점은 재밌다. 그리고 외롭다.

장편 소설 ‘길위의 집’과 ‘사랑하라, 희망없이’가 우연히도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다. 우수상 수상작 이혜경의 ‘도시의 불빛’과 윤영수의 ‘내 여자 친구의 귀여운 연애’는 재미없다. 고백적 형식의 ‘도시의 불빛’은 새로움과 흡입력이 부족하고 윤영수의 소설은 밋밋하다.

이만교의 ‘표정관리주식회사’는 풍자적 세상읽기가 돋보이는 소설로 형식의 새로움과 인물에 대한 표현이 풍부하지만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경욱의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TV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소외된 개인에 대한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읽었다. 나비로 상징되는 주인공의 태도가 낯설지만 평범하다. 소설의 내용 또한 진부하다. 문체와 형식으로만 독자에게 다가설 수는 없는 일이다.

천운영의 ‘세번째 유방’은 재밌다. 맛깔스럽고 입에 감기는 서술이 돋보이며 고백적 형식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독특한 내용의 신선함과 흥미로운 주인공들에 대한 접근 방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박민규의 ‘갑을고시원체류기’는 그 답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그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보여준 여유와 재치있는 글쓰기가 가벼움으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다만 고시원에서 만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분량과 상관없이 인상적인 모습들로 스케치하거나 독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90년 초반에 대학 시절을 보낸 동시대 인물에 대한 연민이 개인적 경험으로 수용될 수 있어 특별하게 읽었다.

1년 후에 다시 만?작품집에 대한 기대보다는 이제 시간의 흐름과 나이에 대한 부담까지 떠오르는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내년이면 일련번호 30번째 작품집이 나온다. 많은 작가들의 새로움을 확인하는 순간들을 기대해 본다.

200503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