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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무덤 ㅣ 창비시선 272
엄원태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평점 :
너를 향한 내 이 물컹한 그리움에도
어디엔가 숨겨진 송곳,
숨겨진 드릴이 있을 거다
내 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
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
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
- ‘갯우렁’중에서
나이 오십이 넘어 남자의 후반생을 살아가는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간결하다. 상황이 달라지고 생이 흔들리면 갈라지고 푸석푸석한 쇳소리가 난다. 몸은 소모품이다. 한 생을 살다가 힘겹게 벗어놓고 가야할 무겁고 지겨운 지상에서의 갑옷이다. 몸이 늙고 병드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생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 사람은 생을 어떻게 바라볼까?
사치스런 고통과 시련들은 각자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다. 생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들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시인의 입장에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물을 통해 바라보는 생의 감각을 느껴본다.
물컹한 그리움도 그리움이고 송곳이나 드릴처럼 날카로운 그리움도 있을테지만 겉으로 드러난 부드러움 속에 견고함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있는 그대로의 외형만으로 그것, 혹은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지극히 당연한 연상법.
1
깊고 둔중한 고통이 등허리를 지나가며
내게 말한다,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
나는 네게 말하마,
고통마저 태워버린 너에게
내 아파서 너를 아프게 하는 게 더 아프구나!
- ‘불탄 나무’중에서
불탄 나무는 이미 나무가 아니다. 생의 고통 속에서 길어올린 시편들 속에 엄원태의 감각은 살아 움직인다. 정지된 사물들에 대한 통찰과 평범하지 않은 시선들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감각들에게 신선함을 부여한다. 자아 성찰적인 잠언과도 같은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이라는 말은 피상적인 말놀음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생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불에 타버린 나무는 이미 고통스럽지 않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더 심란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중심을 잡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마음의 결들은 중심없이 흘러가고 뒤틀리고 굴곡진다. 몸의 중심만큼이나 마음의 중심은 더더욱 힘겹다. ‘꿈’이나 ‘사랑’이 그 마음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2
내게도 이를테면 중심이 하나 생겼다
내가 품어 키운 꿈이라 해도 좋고
뒤늦은 사랑이라 해도 좋다
내 몸이 네 몸이 아닌 지경,
그 지경이란 몸만이 알 수 있는 거다
마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흔해빠진 거니까
다만 너를 떠나지 않고
온전히 내게로 되돌려주는 것,
그건 이미 네가 아니다
그걸 어떤 중심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 ‘어떤 중심’중에서
해 저문 겨울만큼이나 을씨년스런 풍경을 떠올려 본다. 삭막하고 메마른 하늘은 어쩔 수 없다. 손닿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미련은 떨치기가 어렵다. 저녁 일곱 시 - 빛에서 어둠으로 전화하는 그 순간들, 시간들에 대한 상념이 예사롭다.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비유된 너의 마지막 눈빛이 그러했다. 시인이 보았던 그 눈빛은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인지 너에 대한 그리움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내 남은 생의 시간들을 짐작해 볼 뿐이다. 엄원태의 <물방울 무덤>의 마지막 시.
저녁 일곱시
저녁의 창문들은
제 겨드랑이를 지나간 바람이나
이마 위로 흘러간 구름들을 생각하느라
골똘하게 고요하다
나도 하루종일
어떤 생각이란 것에 매달린 셈이다
한동안 뜨겁게 나를 지나간
끝내 내것 아니었던 사랑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그리 많지 않다
이 푸른 저녁 공기는
어떤 위안의 말도 전해준 바 없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위로받은 것이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흰 죽지 새의
쭉, 경련하듯 뻗은 다리의 헛된 결기를 보면 안다
저녁 일곱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벌겋게 타오르던 노을이
쇠잔해져 어둠이 사그라지는 것만 봐도 안다
마지막 네 눈빛이 그러하였다
070307-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