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수 있는 권리 - 개정판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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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갈망한 지 오래다. 어떻게 살고 싶냐고 누가 나에게 물으면 이젠 자신 있게 대답한다. 백수로 살고 싶다고. 이 말에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라는 함의가 숨어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다는 이기적이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욕망이 숨어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누가 일하고 싶어 하는가? 일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라고? <친절한 금자씨>의 발언을 패러디 하자면 “너나 일 속에서 자아실현하세요.”

  자본주의 산업구조에서 노동은 생산성을 향상 시키는 필수요소였고 그들은 노동하는 인간으로 불리워질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시작했다.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하루 16시간에서 18시간의 노동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고, 아홉 살에서 열 살 먹은 아이들도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다. 노동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즐거운 인생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하는 고문에 가까웠다. ‘노동기계’가 되어버린 노동운동의 역사를 혹자는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만큼만 쉬는 현대인의 생활 패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시간과의 전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자기계발이라는 미명아래 몸값 - 연봉이라는 숫자로 환산되는 인간의 가치 평가 - 을 높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노동 시간 이후의 회식도 근무의 연장이며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거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투자하는 노동 외적 시간도 전부 노동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일과 노동이라는 용어가 주는 뉘앙스가 다르고 의미 부여도 달라질 수 있지만 쉽게 양분해서 좋고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노동은 여전히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요술램프인가에 대한 반성은 이미 120여 년 전에 시작되었으니까.

  아침형 인간이나 성공하기 위한 방법 등 자기 계발에 관련된 책들의 홍소 속에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황당하게 보일 수 있다. 1883년에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 잔 하는 일만 빼고, 그리고 한껏 게으름 피우는 일만 빼고’라고 외치는 폴 라파르그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리의 삶이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노동의 종류와 환경은 개선되었지만 삶의 조건은 더욱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누가 자신 있게 우리가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간은 금이다’라는 금언은 분명 근대로 들어서면서 생겼을 것이다. 분초 단위의 시간 관리와 테일러가 주장한 철저한 효율성 위주의 경영관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시간을 지킬 줄 알고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뜨며 잠드는 순간까지 시계를 보고 또 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정교하고 교묘한 자본의 논리와 노동중독에 쩔어 있다. 하루라도 시계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없을까.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필요한 만큼 일하고 자고 싶은 만큼 자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걸까.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 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력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 P. 14

  이렇게 도발적인 발언으로 시작된 선언문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지만 아무도 긍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다. ‘노동’의 개념 자체가 많이 변화했지만 개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그 선택의 폭이 넓다고는 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저자의 책이 여전히 고민의 단초들을 제공하는 것은 나태하고 게으른 삶에 대한 죄의식을 만들어 준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는 노동하는 삶에 대한 뒤집기는 통쾌하기만 하다. 가벼운 농담거리도 아니고 치기어린 반항도 아닌,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한다.

  짧은 분량 때문에 뒷부분에는 전기적 에세이가 덧붙혀져 있다. 분량과 상관없이 강렬하고 진한 인상을 남긴 책이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것이다. 지향점과 방향을 잃은 난파선이 아니라 등대를 바라보며 항해하는 삶은 행복할 것이다. 그 목적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한 연습과 훈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무노동 무임금…’이라고 부르던 노래는 이제 어떻게 들어야 하나? 책과 무관한 엉뚱한 상상과 스치는 상념은 어쩔 수 없는 개인적인 버릇이다. 어쨌든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죽는다는 냉엄한 현실의 법칙으로부터 당분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07110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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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0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치열하게 느껴지는 인식의힘 님의 꿈이 한량이었다니, 더할나위 없이 반갑습니다 ^^ (인식의힘 님과 꿈이 같을줄이야!)

sceptic 2007-11-11 14:19   좋아요 0 | URL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한 치열함은 치열함이 아니라 여유겠죠...타인과의 경쟁이나 사회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요...백수는 모두의 꿈이라고 생각해요..웬디님도 마찬가지시겠죠...^^

2007-11-10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1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 이제 베짱이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한경애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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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내가 살아 있는 매 순간이며 삶 그 자체이다. 우리의 삶이 무엇도 박탈당하지 않고 그 자체로 충실한 현재일 수는 없을까? - P. 45

  나는 여전히 연속적인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새에 불과하다. 날고 싶은 꿈을 꾸었지만 비상하지 못한 채 날개만 파닥이며 새장 안을 떠돌고 있다. 창살에 부딪히는 순간 돌파구를 마련하기 보다는 왜 거기에 창살이 있는지 생각에 잠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보다 발까지 가는 길은 훨씬 더 멀고도 험하다.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행동’이라는 말했던 J. 네루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운신의 폭은 넓지 않다.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분단위로 시간을 가른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것들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상황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때가 많다. 내 삶을 그 자체로 즐기거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다는 꿈을 버린 지는 너무도 오래 되었다. 잠을 줄이고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말자고 다짐하는 일이 서글프기도 하다. 책 속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는 없지만 토막 난 모든 시간들은 책 속에 몰입하며 지낸다. 나는 과연 내 삶의 주인인가?

  충실한 현재를 즐기고 있다는 믿음은 자기 최면이거나 미래를 위해 순간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희망일 수 있겠다. 인생이 놀이가 되는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놀이’라는 개념이 ‘일’의 대척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생각해 봐야 한다.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는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패턴을 반성한다. 경쟁과 자본의 논리에 매몰된 우리의 인생을 되돌려 달라고 외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라는 시리즈 이름이 도발적이다. 첫 번째 책인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에서 고미숙이 힘주어 말했던 참된 공부법은 바로 ‘놀이’라는 개념과 상통한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고 자신의 이념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놀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놀이의 달인’을 내세운 것이 ‘공부의 달인’과 반대인 것 같지만 인생에 대한 진짜 공부가 놀이가 되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어린 시절 ‘개미와 베짱이’ 우화로 세뇌되기 시작한 우리의 믿음은 단선적이다.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공부)해야 한다. 게으름은 죄악이다. 쉬지 말고, 놀지 말고 열심히 해라.’ 이러한 맹목적인 강요와 믿음은 여전히 계속된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 대한 목적과 방향이 없으니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가진 자가 행복하다는 말에 반론이 있을 수 없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진짜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은가. 구체적인 방법과 대안을 제시해서 이렇게 살면 된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반성과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는 그 안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싶다.

  두 살부터 영어를 시작하고 영어 유치원에서 경쟁력을 키워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각종 경시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늦게까지 문제집과 씨름하다가 중학교에 입학과 동시에 특목고에 올인 한다. 입시지옥은 긴 설명이 필요 없고 정답이 정해진 논술을 위해 책은 수단이 되었고 대학은 취업을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래다. 재테크와 주식투자 동아리에서 실전 감각을 키워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전략을 세우고 청약 점수를 계산하며 아이가 생기면 내가 살아왔고 아이가 살아가게 될 미래의 경쟁력을 위해 또 다시 무한 경쟁이 반복된다. 늙어죽기 위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계산해 보라는 TV 광고의 압박에 시달리고 노후 준비를 하지 않는 삶은 끔찍하기만 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과연 행복한가?

  일반적인 삶의 패턴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들 인생의 자화상이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저자는 완강히 거부한다. 축제와 놀이로 가득한 인생은 불가능한가? 현재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소극적인 낙관주의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계란과 닭의 관계처럼 교육과 사회 구조의 문제는 단순화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거기에 한미 FTA에 이르기까지 급변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가중되고 있다. 그 와중에 한바탕 즐기고 놀아보자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모두 파괴되고 모든 것이 사고파는 상품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아무도 나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공포는 끝없는 노동을 강요한다. 과거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의 삶은 훨씬 바쁘고 힘들어졌으며 노동은 고통스럽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행복은 끝없이 연기되고, 미래에 대한 공포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 P. 55 

  노동과 일이 어떻게 다른지, 놀이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이 놀이의 달인이었는지 이 책은 쉽고 재미있게 보여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인 저자는 교육과 연관시켜 이 문제를 논하고 있지는 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놀아본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있다. <모더니티의 지층들>을 통해 보여주었던 만만치 않은 내공과 편안한 글쓰기는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짧은 분량임에도 그림과 사진 등 다양한 예술 작품과 어울어져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고 책의 내용을 풍성하게 꾸며주고 있다.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들이 왜 필요한지, 인생역전이 과연 인문학을 통해 가능하지 의아하겠지만 새로운 시각과 트인 생각은 사람들과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정답도 없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막연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대신 기쁨을 창조하라. 우리의 욕망, 우리의 성장, 우리의 실천, 우리의 놀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고 외치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 한 번쯤 귀 기울여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싶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갖는다면 현실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경고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즐거움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루한 세계를 돌파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함께 놀 친구들, 힘센 상상력이 필요하다. - P. 163

07102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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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7:04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멜기세덱 2007-12-14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sceptic 2007-12-17 22:15   좋아요 0 | URL
저보다 님에게 축하를 보내야 할 듯 한데요...책값 축하드립니다...
 
한국인의 관계심리학 살림지식총서 279
권수영 지음 / 살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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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다가 핸들을 꺾으며 정리되기도 하고 말없이 사라지던 뒷모습이 생각나기도 하는 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끊임없이 죽어가도 계속해서 태어난다. 인류는 끄덕없이 유지되며 아직도 오히려 좀 더 죽어줬으면 좋겠다. 쾌적한 지구를 위해서는 아직도 인구가 너무 많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구덩이를 파고 홀로 매몰되어 있는 듯 하지만 지구의 반대편까지 여섯 단계의 법칙에 따라 연결되어 있다. 넓고도 좁은 세상에서 우리는 한 번도 대면하지 않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문제는 사람의 숫자나 관계의 망이 아닐 수도 있다. 그 관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와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이러한 인간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 보면 우리의 일상과 만나게 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린왕자가 말한 것처럼 길들인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들이는 과정에 ‘동의’가 생략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부모 자식 간이나, 부부 사이, 친구 사이,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다. 길들여지고 싶지 않은데 길들이려는 사람이 있고 길들여지고 싶은데 길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모두 불행해진다.

  이러한 ‘관계’는 맺어진다고 표현하는데 특히 한국에서의 ‘관계’는 조금 특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문화적 특성의 차이이기도 하다. 대선 후보들이 무슨 무슨 ‘향우회’로 똘똘 뭉쳐진 모임에 나가 한 표를 구걸하는 모습은 코미디에 가깝다. 21세기에도 고향이 같은 사람들의 힘은 그만큼 막강한 것이다. ‘관계’는 그렇게 인위적인 선택이 아니라 우연적인 필연에 의해 발생한다. 그 첫 번째 관계가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서로에게 가장 큰 ‘사랑’을 나누어 주기도 하지만 죽음과도 같은 가장 큰 ‘고통’을 주기도 한다. 특수 관계라는 말로 규정짓기에 우리에게 가족은 너무 큰 멍에와도 같다. 부모형제 모두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개인이나 각자의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선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끔 부러울 때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화의 불편부당함과 부자유스러움은 목을 죄는 사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혈연과 지연에 의해 묶여 사는 우리의 모습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아주 느리고 점진적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가부장제와 장자중심의 문화에 제도적인 변화가 도래하고 있다. 호적법이 바뀌고 결혼이나 가족제도에 변화가 밀려오면 우리는 더 이상 근대 혹은 전근대적인 ‘관계맺음’에서 자유로워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계가 모호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경계를 인식하거나 안전하게 지켜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거나, 부당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공격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P. 38

  관계는 이렇게 취향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며 선호도도 다르다. 특히 ‘효孝’나, ‘우애友愛’ 등으로 묶인 사람들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집착과 소유의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관계심리학>이라고 하는 매력적인 제목의 책은 핵심을 짚었지만 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에서 보여줬던 탁월한 분석이나 정리를 목적으로 한 책은 아니지만 결론이 애매하다. 한국인 사이의 ‘관계’의 의미를 밝히고 그것을 나누는 ‘경계’가 인간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경계’와 윤리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따로 또 같이’ 문화를 만들어 왔던 우리를 돌아본다. 결국 한국인의 관계를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사람 사이에 힘의 균형을 이룬 ‘경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안전하기 위해 담을 높이 쌓아 올릴 것이 아니라, 함께 하면서 공감하고 서로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관계가 공존할 수 있도록 남을 배려하는 바로 ‘관계적인 경계’가 필요하다. 우리의 존재 밑바탕에 경계와 경계의 사이를 관계로 메울 수 있어야 한다. - P. 93

고 정리하는 저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고민한다. 아니, 우리가 더 고민한다. 사람들에게 한참 회자되었던 정현종의 ‘섬’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시가 된다. ‘가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가지 못할 것이라는 안타까움에 대한 열망이자 영원한 시지프스의 신화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0710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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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 - 여자와 남자의 99% 차이를 만드는 1%의 비밀
루안 브리젠딘 지음, 임옥희 옮김 / 리더스북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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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다르다. 이 말 속의 비교 대상은 당연히 남자다. 항상 인간의 기준은 남자였고 기준에서 벗어난 여자의 행동이나 심리에 대해서는 열등한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21세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21세기를 여는 키워드를 ‘여성’과 ‘환경’으로 꼽은 사람들이 많았다. 환경에 대한 관심만큼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심은 선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렇다면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남성과 다른 여성의 특징은 당연히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신체와 심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루안 브리젠딘은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에서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단 1%의 유전자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유전자의 차이가 호르몬의 차이로 호르몬의 차이가 신체와 심리 상태의 차이로 발현된다. 신경 정신과 의사이면서 정신분석학자인 저자의 분석은 진화 심리학과 진화 생물학을 기초로 자신이 겪은 환자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

  여자의 뇌를 알면 여자를 알 수 있다. 그 심리적 변화와 신체적 메커니즘은 모두 뇌에서 촉진되는 호르몬의 분비와 그 영향에 따른 신체적 발달과 심리 상태로 나타난다.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 프로게스테론을 비롯해서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도파민, 세로토닌 등의 분비 작용과 행동 변화, 심리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생물학적 관점만으로 여성을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책은 아니다. 수많은 환자들의 실제 사례를 통해 문제점과 치료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주변에서 마주치는 상황들을 예로 들어 여성의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과 행동 변화의 관계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적당한 호르몬의 투여와 상담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여성성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과학적 접근 방식은 이전의 잡다한 설명들보다 신뢰가 간다. 더구나 여성인 저자가 스스로의 변화와 상황들 속에서 느낀 점들을 설명하는 부분에 공감이 간다.

  여성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과학적 접근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부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런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머릿속에서 나오는 두 가지 목소리와 씨름했다. 하나는 과학적인 진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목소리였다. 과학적 진실이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정치적 올바름보다 과학적 진실을 강조하기로 했다. - P. 278

  정치적으로 양성 평등에 관한 논의와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조심스럽게 과학적 진실을 말하고 있다. 차별을 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그 차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종류의 인류가 보이는 행동의 패턴들이나 갈등의 요소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문제해결이 눈앞에 보인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말이 없어지는 남자와 언어 능력이 발달하는 여자, 20~30대 남자는 85퍼센트가 52초마다 섹스를 생각하고 하루에 한 번만 생각하는 여자, 갈등과 경쟁을 즐기는 남자와 그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여자에 관한 진실은 여자의 뇌에 숨어 있다.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뇌에 관한 연구와 실체가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신비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었던 호기심들은 하나씩 밝혀질 것이다. 특히 여자의 뇌를 통해 여자를 새롭게 발견하려는 저자의 임상적 결과들이나 과학적 방법들은 여자에 대해 오해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에 대해 명쾌한 결론과 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 심리학이나 진화 생물학의 연구 결과와 뇌과학과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상호 보완된 연구가 진전될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는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아니라 갈등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자와 남자의 유전자 코드는 99퍼센트 이상이 같다. 3만 개에 달하는 인간 게놈(genome)의 유전자에서 남녀 양성의 변이로 인한 차이는 단 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런데 바로 그 1퍼센트가 신경계의 세포 하나하나에 영향을 미쳐 남자와 여자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 P. 14

  향후 연구 결과도 이 책처럼 흥미롭고 재밌게 대중화될 수 있다면 기꺼이 관심을 갖고 읽을만하다. ‘여자와 남자의 99% 차이를 만드는 1%의 비밀’에 대한 관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적 관점에서 이 책의 내용을 접근한다면 보다 객관적으로 읽어 나갈 수 있다.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비극과 생의 아이러니는 바로 그 1%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출발조차 알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답답함을 덜어줄 수 있는 책은 아닐까 싶다. 여자의 뇌가 남자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것만은 확실하다. 단순한 남자와 복잡한 여자의 차이를 만드는 작은 비밀이 이 책 속에 숨어 있다.


07101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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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7 1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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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1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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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0 2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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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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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2 1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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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해야 할 것
수잔 손택 지음, 김유경 옮김 / 이후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글들을 통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 인식의 힘은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준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수전 손택은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향기가 나고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달된다. 현장 운동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었던 사람은 물론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진보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순간이 있고,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기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미래를 향한 전망은 어둡기만 한 시간들을 견뎠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작가를 사회적 현상과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져야 하며, 모든 생이 어쩌면 작품 해석을 위한 도구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작가와 작품 그리고 현실의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강조해야 할 것>이라는 책은 그녀의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1부에서는 ‘내가 본 것들’을, 2부에서는 ‘내가 읽은 것들’을, 3부에서는 ‘그곳과 이곳’이라는 주제로 묶었다. 본 것은 물론 영화과 연극 무용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음악을 제외한 모든 예술은 시각을 통해 구현된다. 기술 복제의 시대로 명명되는 20세기의 예술은 영화로 대표된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식중의 하나로 영화를 선택한 켄 로치 같은 감독은 영화의 역할과 의미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지난 세기의 가장 큰 특징을 ‘영화’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이 될 것이다. 영화든 그림이든 관객과 애호가의 입장에서 그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작가와 소통할 수 없고, 작가는 작품 속에 갇혀 고립된다.

아무리 많은 영화가 만들어진다 해도, 아무리 좋은 영화가 만들어진다 해도, 영화애호가들이 사라지면 영화도 사라진다. 영화의 부활은 새로운 종류의 영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 P. 19

그림을 그릴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기억 속에 있는 그리고 기억에 의해 변형된 무엇이다. 또한 오랜 시간에 걸친 생각과 수없는 회상이라는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그림은 수많은 결심과 덧칠, 붓질이 쌓인 결과이다. 어떤 그림은 감정의 정확한 두께를 찾기 위해 몇 년에 걸쳐 그려지기도 한다. - P. 67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수전 손택은 동시대인으로서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나 보르헤스의 소설들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말걸기를 시도한다. 선명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타인의 글을 들여다본다. 투명하고 맑은 시선은 깊은 사유와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수전 손택의 글들은 그렇게 명징하고 서늘하게 핵심을 찔러댄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단단하고 건조하기보단 부드럽고 따뜻하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나 분명하고 선언적인 문체가 도드라지기도 하지만 재치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편안하지만 분명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라예보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면서 그녀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타인의 고통>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현장성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글들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다가온다. <해석에 반대한다>로 기억되는 그녀를 보다 다른 관점에서 혹은 다른 글들을 통해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독자에게 색다른 경험이다. 에세이의 형식은 편안하고 자유롭다. 분량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의 생각과 느낌들을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희곡이든 비평이든 그녀의 존재방식은 글쓰기였다. 글이 무기였고 행동이었다.

언어 외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강렬한 어휘 선택으로, 뛰어오르는 구두점으로, 쾌활한 문장 리듬으로 인간관계의 고통을 망각하게 하는 것. 더 섬세하고도 게걸스러운 방식의 앎을, 감정이입을, 견제 방식을 고안하는 것. 그것은 형용사의 문제이다. 강조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 P. 230

읽기는 쓰기에 앞선다. 그리고 읽기로 인해 쓰고자 하는 욕망이 촉발된다. 읽기는, 읽기에 대한 사랑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거나 과거에 자신이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멋진 기분전환이 된다. 기분전환, 위안, 고통, 그리고, 그렇다. 영감이 된다. - P. 361

  표지 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본다. 반백 그녀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가 바라보았던 곳은 어디일까? 현실 너머에 있는 이상적 공간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현실은 아니었을까 싶다. 삶에 대한 열정과 예술에 대한 심미안을 가진 그녀는 늘 실천하는 양심으로 비판적 지성으로 불리었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세간의 관심이 어떠하든 그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영혼의 울림은 독자에게 번역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렇게 그녀를 독자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언어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는다.

나는 번역하지 않는다. 나는 번역된다. - P. 470


07092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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