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 한국 인문학의 왜곡된 추상주의 비판, 비평정신 1
박홍규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기본적으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기 위한 안내다. - P. 19

  나라 안에서 고도의 자율성을 갖는 지역사회와 집단이 존재해야 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유와 자치의 인간이 존재해야 하고, 그 인간들로 자유와 자치를 추구하는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와 자치의 인간과 사회는 자연 속에서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 P. 491


  첫 번째 문장과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저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첫 문장을 시작한다.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나 목적을 분명히 밝히기도 하고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책의 마지막에서는 전체를 마무리하기도 하고 마지막 장의 정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첫 문장과 마지막 문단의 인상과 중요성은 책 전체를 일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박홍규의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는 흥미로운 책이다. 이전에 박홍규의 사상적 배경을 알고 있거나 다른 저서를 읽어온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더구나 이상 열풍처럼 우리에게 아렌트가 전해지고 그녀의 책을 접한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다. 나는 첫 문장에서 제시한 두 권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순서대로 읽어야 할지 박홍규의 안내서로 만족할 지 망설이고 있지만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은 인연으로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170여 년 전에 출판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와 50여 년 전에 출판된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어떻게 묶일 수 있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현실 정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저자는 이 두 사람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두 저서에 나타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본질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그들의 계급적 위치와 사상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두 권의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고 점검하는 책이다.

  들불처럼 타올랐던 광화문의 촛불이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로 어떻게 꽃 필 수 있어야 하는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바라볼 수 있는지 반성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시대를 보는 안목과 정치를 바라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다. 시민 혹은 국민으로 명명되어온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양식은 권력자의 생각과 다를 수밖에 없었고 조작된 욕망과 가치는 세상을 미혹케 한다.

  이 책은 내게 2008년의 대한민국을 위한 망원렌즈와 같은 역할을 했다. 현실의 한 복판에서 개인이 서 있는 정치 지형도를 점검하고 정치와 경제,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은 그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전망과 성찰이라는 관점에서 박홍규의 주장과 논의는 보다 활성화되고 다양한 비판과 쟁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홍규는 아렌트를 번역, 소개한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거침없이 비판하며 그들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태도에 일격을 가한다. 한국 인문학의 왜곡된 자화상에 대한 도전이며 당찬 주장들이 여과없이 전개된다. 조금은 위험스러워 보이는 표현들이 특유의 논리와 일관된 주장으로 펼쳐진다. 그 모든 저자의 주장이 진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토크빌과 아렌트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그들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로는 충분한 깊이와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토크빌의 사상이 아렌트에게 얼마큼 영향을 미쳤는지 점검하고 있으며 아렌트의 보수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공통점이 우리사회를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한 정치체제로 인식하고 있는 우매함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 위해서도 적절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두 사람의 생애와 사상은 물론 그들의 저서를 꼼꼼하게 읽어나가며 인용하고 비판하고 해석하며 이전의 논의들에 대한 비판을 빼놓지 않고 있다. 또한 각 장은 두 사람의 주요 저서와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저자의 개인적인 독법과 두 사람의 주저에 대한 평가 그리고 현실 정치에 대한 적용 문제는 주관에 치우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는 존경하는 인문학자의 용기로 비춰졌다.

  평등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른 것이며 그것이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현실정치에서 실현될 때 무엇이 문제인지, 그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다. 다양한 사상가들의 예지력과 탁월한 안목을 시대를 넘어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는 잣대가 된다. 두 사람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거나 하이예크처럼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낳는 것이고, 세계화에 의해 민주주의는 불가피하게 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비평정신 총서 1권으로 이 책 뒤에는 이택광과 김영민의 책들이 기다리고 있다. 기다려진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지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그들처럼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080817-0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세상을 탐하다 - 우리시대 책벌레 29인의 조용하지만 열렬한 책 이야기
장영희.정호승.성석제 외 지음, 전미숙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모닝빵을 밤에 자주 뜯어 먹는다. 아이 주먹만 한 빵 속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무미건조한 맛이지만 맛이 섞여 있지 않아 우유와 먹기 좋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밤에 책을 읽다 허기질 때 공복을 달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빵보다 뜯어먹기 좋은 것이 책이다. 손이 닿는 곳이면 어디나 책을 놓아두고 무료한 시간이면 언제든 책을 펼쳐든다. 산책을 나가면서도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나서야 마음이 편하다. 여행을 갈 때는 물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신체의 일부처럼 여분의 책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불안하지 않다.

  가끔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다. 어디엔가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비웃기도 했지만 문득문득 나에게서 그들의 모습을 본다. 중독 혹은 집착에 가까울 때도 있지만 쉽게 조절할 수가 없다. 그리 나쁜 습관도 아니고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아니며 몸에 해롭지도 않다면 굳이 끊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라고 자위해 본다.

  어쨌든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책이 없었다면 나는 참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업이나 생활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사상과 영혼의 색깔을 의미한다. 지금도 무언가 배울 것이 있으리라는 얄팍한 기대로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나를 키운 것 팔할이 책이었다. 물론 공부와 책읽기가 별개일 수 없지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나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직접 확인했으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책장부터 기웃거리고 누구를 만나든 그의 손에 들려있는 책을 확인한다.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와도 배경으로 서있는 책장의 목록을 확인한다. 심각한 수준인지 알 수 없으나 관심은 온통 한 쪽으로 집중된다. 읽고 또 읽어도 언제나 목마르다. 영혼을 위한 처방전은 백약이 무효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책 이야기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책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책, 세상을 탐하다>는 책벌레들의 경험담을 모아놓은 책이다.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견디기 위해 책을 선택했지만 책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가장 중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는 29명의 책벌레가 책에 관한 에피소드를 풀어 놓는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추억들이 재미있고 정겹다.

  때때로 책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관심을 갖던 시절부터 책을 읽지 않는 현실에 대한 개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변주된다. 만화가와 코미디언, 시인, 소설가, 출판인, 선생님, 언론인과 NGO에 활동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책사랑은 애틋하기만 하다. 책과 함께 생활하며 꿈을 꾸고 늙어가며 사는 모습들이 다채롭게 펼쳐지는 만화경처럼 즐겁기만 하다.

  제한된 분량에 자신의 간단한 경험이나 추억, 책에 관한 생각이나 일화를 소개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읽는 사람은 향좋은 뷔페의 음식을 음미하듯이 그들의 이야기를 편안하고 즐겁게 들어주면 그만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깊은 공감과 긍정의 미소를 보내면 될 것이고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책을 가까이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 이외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1년을 보내는 학생과 선생님이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다. 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서 준비하거나 꿈꿀 수는 없다. 일단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고 욕심을 내자면 한이 없는 책읽기의 진경을 맛본다면 과연 공부도 즐거울 수 있고 읽어야 할 책은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뚜렷한 목적을 위한 책읽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재테크, 자기계발서의 열풍이나 칙릿으로 분류되는 가볍고 감각적인 소설에 한정된 독서는 편식보다 정신건강에 해롭다. 의무여서는 안되겠지만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에 대한 관심과 꾸준한 독서는 정신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인생관을 바꾸어 준다. 세상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고 사람에 대한 안목을 만들어주며 나의 행동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답을 찾아 줄 수도 있다.

  책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널려있고 앞으로도 나오겠지만 나는 끊임없이 그들과 공감하며 책 속에서 많은 꿈을 꿀 것이다. 절대 늙지 않는 ‘청년 정신’을 잃지 않게 위해 노력할 것이며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기 위해 공부할 것이다. 그것은 목적없이 걷는 산책과 같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며 혹여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이 보인다면 주저없이 그 길을 걷고 친구가 생기면 발걸음을 맞춰 볼 것이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은 이미 가을에 대해 속삭였고 이제는 서늘한 바람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책상에 쌓여있는 몇 권의 책이 있고 밝은 불이 있기 때문에 오늘밤도 행복하다. 중요한 시험이나 무더위 따위는 책 속에 묻어 버릴 수 있을 듯하다. 내일이 지나면 이제 홀가분하게 다시 책 속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책벌레들이여, 안녕들 하신가? 각자 제자리에서 열독!


080813-0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에 관한 연구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전기순 옮김 / 풀빛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사랑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의미의 진폭이 너무 크거나 모호해서 말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어렵고 추상적인 대상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아무리 쉽게 말한다 해도 미진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한 것이 사랑이다.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느끼고 겪는 과정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모든 경우의 수를 나타내는 사랑은 인류와 함께 생성했으며 멸종되는 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

  인간은 과연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까? 가장 바보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면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사랑의 종류와 범위를 구별하지 않고 말하기 어렵지만 진화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사랑은 종족 보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밖에 다양한 사랑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말이다.

  <사랑에 관한 연구>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은 스페인의 철학자 가세트의 것이기에 주저 없이 선택했다. 명성에 기댔다가 X되는 경우도 많지만 안전한 선택의 유혹을 떨치기도 힘들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책이 많이 팔릴 거라고 출판사는 믿지 않았겠지만 그 예상이 별로 빗나갈 것 같지도 않다. 철학자가 말하는 사랑이라니! 그러나 재밌다. 분량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밑줄로 책을 지저분하게 했을 정도이니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책이었다.

  그것이 경험에 기댄 긍정과 공감이든 이성과 논리에 의한 개념이든 사랑에 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만나게 된다. 옮긴이의 말을 통해 가세트의 삶과 사상을 먼전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남자의 심리와 본능, 무엇이 남자의 사랑을 완성시키는가? 라는 제목으로 1, 2, 3부가 구성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싸구려 연애담에 불과한 책으로 보인다.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실전 테크닉이나 방법론으로 잘못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또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가세트의 사랑은 남자가 여자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썼다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니.

  사랑의 본질에 관한 부분들은 한 문장 한 문장, 한 줄 한 줄이 모두 경구처럼 깊이 있고 분석적이다. 깊은 성찰과 사유가 없이는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사랑은 고통의 다른 말이며,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에너지라는 정의에서 출발한 가세트는 스탕달의 <연애론>을 비판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잘못된 경험의 결과로, 스탕달은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론이 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두 가지 속성이야말로 사이비 연애의 특징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랑은 태양과 모든 별들을 움직일 만큼 위대하기도 하지만 한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가는 욕망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쉽게 인정하거나 통용될 수 있는 하나의 정의나 개념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이 본능적인 감정에 대해 저자는 때로는 감성과 직관에 의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험과 사유에 의존하기도 하면서 생각의 실마리를 잘 풀어나가고 있다. 철학자가 바라본 ‘사랑’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보다는 그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랑, 다양한 사랑들을 정리하고 규정짓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두면 될 듯하다.

내 생각에 온전한 사랑이라면, 환경과 거리상의 장애가 충분한 애정을 공급하는 걸 방해하여 애정의 굵은 선이 가는 선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도 감정의 동맥은 사랑을 끊임없이 담아 심장으로 옮기는 법이다.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의 운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 적어도 감정의 본질만은 손상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랑. - P. 38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로망이며 삶의 이유일 수 있다. 이 시대의 사랑은 과연 어떠한가? 전 존재가 합일될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황과 조건, 현실과 미래가 복잡하게 계산된 사랑만이 결실을 맺는지도 모른다. 현실은 이상적인 사랑과 늘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랑만큼은 그렇게 쉽게 속단하기 어렵다.

  가세트는 19세기 말에 스페인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혼란스런 세계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조국 스페인은 프랑코 독재정권에 신음하고 있었고 오랜 기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는 개인적 경험이 사랑에 대한 색다른 견해를 얻는데 일조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보여주고 말해주는 사랑은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감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사랑의 본질이나 일반론에 비추어 논의가 전개되지만 남성인 가세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한계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지나치게 관대한 평가일까?

  김영민의 책을 읽을 때처럼, 아니 대부분 철학자의 글들이 그러하지만 한 문장도 긴장을 늦추거나 편안하게 논의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다. 집중력과 긴 호흡의 사유가 필요하다. 조용하고 1시간 이상 시간이 확보될 때 이 책을 꼼꼼히 읽고 공감하며 곱씹을 수 있다면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편적인 문장과 표현들로 새로움을 주기는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은 그렇게 쉽게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을 쉽게 드러내고 표현하며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가세트는 자신의 사유와 경험들을 이전의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사례를 들어 정확하고 꼼꼼하게 정리해 내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렵고 난해한 문장들은 의역을 하고 생략을 하기도 했다는데 약인지 독인지 알지도 못하고 먹은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난처하다. 제대로 읽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편집되거나 역자에 의해 재해석된 문장들이 주는 울림은 원저자의 그것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를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큼 충분히 가슴에 남을 만한 책이다.

온전한 사랑이란 일단 태어나면 소멸되지 않는다. 거짓말 같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 P. 37


080712-0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창을 사랑한다는 말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는 김현승의 말이 새삼스럽다. 우리는 때때로 새롭고 시선한 눈을 책에서 얻는다.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기도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도 새삼스럽게 정리하고 확인한다. 나는 그렇게 책을 통해 같은 사물을 보고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타인의 눈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100% 모두 동의할 수는 없고 공감하기도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고 반론을 제기할 때도 있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의사소통 과정이고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고 말없이 정서를 공유하기도 한다.

  특히 나이, 지식, 학력, 세대, 지역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화’라는 장르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예술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고전평론가’라는 특이한 직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고미숙의 새 책 <이 영화를 보라>는 조금은 안타깝게 읽었다. 이 책에 소개된 여섯 편의 영화를 다 보았기 때문에 안타까웠고 같은 영화를 보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시선이 안타까웠다.

  괴물, 황산벌, 음란서생, 서편제, 밀양, 라디오스타 - 이 여섯 편의 영화를 분석한 책으로 고미숙은 머리말에서 ‘나는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인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영화를 보는 독법은 예사롭지 않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에 기초한 영화 뜯어보기는 구석구석 영화 전체를 조망하는 미시적이지만 거시적 관점을 하나도 놓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괴물’을 보면 ‘위생권력과 스펙터클의 정치’라는 부제에서 보여주듯이 교육은 학교에 건강은 병원에 저당 잡힌 채 위생과 청결이 근대화의 첩경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의 무의식을 파헤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어내야만 영화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재밌게 보았는지, 무엇이 재밌었는지 왜 무서웠으며 괴물보다 더 끔찍한 현실의 모습을 우리는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고미숙은 표상을 전복하는 ‘황산벌’을 이야기하면서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풀어내고 있으며 사투리로 범벅이 되어버린 전쟁의 비장미를 가볍고 코믹하게 그려버린 감독을 이해한다. 말하자면 전쟁은 미칫 짓이다! ‘거시기’를 통해 말의 무의식적 속성을 간파하고 영화를 통해 감독의 의도보다 먼저 관객에게 전달되는 반체제적인 병사 ‘거시기’에게 전쟁과 민족의 의미를 묻는다.

  포르노그라피와 멜로가 범벅이 된 ‘음란서생’, 1916년 <조선의 미>를 통해 ‘한恨’의 정서를 심어준 야나기 무네요시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서편제’, 가족․고향․신으로 대표되는 폐쇄회로 속에 갇힌 ‘밀양’, 이주민들의 접속과 변이를 그려낸 ‘라디오스타’도 어느 것 하나 대충 보아 넘긴 영화가 없다. 하긴 자주 보지 않는 영화 중에 기억할 만한 혹은 인상 깊은 영화에 대해 근대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내재된 특징들을 그려 낸 영화들에 대해 어찌 대충 보아 넘길 수 있었겠는가. 고미숙의 영화 이야기는 그녀의 관심사인 고전과 근대, 탈근대를 통한 탈주와 유목의 세계를 누비고 있다.

  에필로그 형식으로 붙어 있는 글들 또한 영화를 이해하고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데 유효하게 읽힌다. 앞서 소개한 여섯 편의 영화를 하나의 주제나 범주로 묶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환상과 모험을 미끼로 던진 영화 산업의 소비재로 볼 수만은 없는 영화들이다. 흥행과 작품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는 감독들의 고민들을 동정하거나 읽어 낼 필요도 없다. 그걸 걱정하는 감독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극히 일부분인 것 같지만 무수한 코드와 다중분할 접속 장치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벤야민의 고민이 어떠했는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영화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안 본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꿈을 꾸고 생각하고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현실을 성찰한다.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항상 우리 곁에서 가깝게 기능하는 가장 친근한 매체인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또 하나의 가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가 열망하는 세상과 그것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영화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외면하고 싶은, 알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공포와 경고, 때로는 해학과 신명으로 풀어낼 수 있는 우리 영화를 관객들은 항상 기다리고 있다. 수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만족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킬 영화를 욕망하는 영화가 없다는 아이러니!

  고미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나 영화에서 ‘재미’를 기대하는 관객들의 봉상스(상식)를 충족시킬 영화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혹은 만들어지는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패러독스(역설)를 읽어낼 수 있는 영화를 우리는 기다린다. 만국의 관객들이여 단결하라, 그리고 영화여 영원하라!


080707-0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즘 - 철학.정치 편 -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라고 물어볼 때조차 우리는 무의식에 내재된 플라톤의 현상과 본질의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하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서양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차지하더라도 우리에게 직면한 삶의 문제는 시대의 변화 속도와 눈부신 발전에 발맞춰 해결됐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인간이 해왔던 모든 생각의 흔적을 우리는 이즘ism이라 부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앞선 시대를 정리하고 그 시대정신zeitgeist을 한마디로 명명하고 싶어하는 범주와 구별의 본능을 발휘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간의 체계적 사유의 산물이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이즘이다.

  박민영의 <이즘>은 곁에 두고 오래 참고할 만한 책이다. ‘인간이 남긴 모든 생각’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책이다. 철학과 정치편으로 나온 이 책의 다음도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면 이 책은 성공적이다. 저자는 저술가로서 갖추어야할 꼼꼼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자기 판단과 신념까지 갖추고 있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겠다. 세상에 객관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해할 필요성을 느낀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성격을 반영하고 사회적 성격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에리히 프롬의 말은 이즘의 사회적 역할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역도 성립한다. 사회경제적 조건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즘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나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말이고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지며 사회가 변화 발전하기도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한 몽매한 현실 정치인들, 관료들, 언론들의 작태는 2008년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계층의 견해차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대한민국의 이즘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현실에 복무하지 못하는 모든 이즘은 가라. 저자의 말대로 이즘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세계를 보는 나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경제학자 하이예크는 이런 말을 했다. “이론화되지 않은 사실은 침묵한다.” 이 말을 이즘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은 ‘이즘’이라는 ‘체계화된 이론’ 속에서만 그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는 말이 된다. 이즘은 그 자체로 체계를 갖춘 하나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다.

  머리말에서 인용한 하이예크의 말이 이 책의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저자는 이즘을 ‘관계의 산물’이라고 표현했다. 당대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이전 역사와의 관계, 다른 이즘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 이즘을 이해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조건과 인류의 역사, 사회, 문화, 경제적 조건을 이해하는 고도의 정신 작용이다. 단순하지 않은 작업을 시도한 박민영의 노고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남는 의문과 미진함은 무궁무진하다. 부록에 정리되어 있는 이즘 일람과 이즘 연표, 그리고 참고문헌을 뒤적이며 평생을 보내고 싶은 욕망! 한 개인의 생각이 반영된 이즘은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없지만 인류의 사상사를 일괄할 수 있다는 무임승차의 특권이 주어진다. 많이 팔릴 수 없는 책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책은 이런 책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철학편에서 경험론을 시작으로 계몽주의, 공리주의, 구조주의, 니힐리즘, 데카르트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거쳐 칸트주의, 플라톤주의, 합리론, 해체주의, 헤겔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정치편에서는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관료주의 군국주의, 나치즘, 마오주의, 마키아벨리즘, 매카시즘을 거쳐 아나키즘, 유토피아주의, 자유주의, 파시즘, 페이비어니즘에 이르는 이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지향하는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전망은 늘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개인과 사회가 조화와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진화론적 관점은 아니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보다 다른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기준점을 설정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이즘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다. 관계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도 사회와 사회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떠오르게 한다.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 않고 과거의 이즘에 대해 정리하는 데 충실하지만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정리된 생각들은 현재를 돌아보고 과거를 성찰하며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이즘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전개되고 있는 이즘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어떤 이즘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 먼 미래에.


080705-0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