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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수 있는 권리 - 개정판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갈망한 지 오래다. 어떻게 살고 싶냐고 누가 나에게 물으면 이젠 자신 있게 대답한다. 백수로 살고 싶다고. 이 말에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라는 함의가 숨어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다는 이기적이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욕망이 숨어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누가 일하고 싶어 하는가? 일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라고? <친절한 금자씨>의 발언을 패러디 하자면 “너나 일 속에서 자아실현하세요.”
자본주의 산업구조에서 노동은 생산성을 향상 시키는 필수요소였고 그들은 노동하는 인간으로 불리워질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시작했다.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하루 16시간에서 18시간의 노동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고, 아홉 살에서 열 살 먹은 아이들도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다. 노동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즐거운 인생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하는 고문에 가까웠다. ‘노동기계’가 되어버린 노동운동의 역사를 혹자는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만큼만 쉬는 현대인의 생활 패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시간과의 전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자기계발이라는 미명아래 몸값 - 연봉이라는 숫자로 환산되는 인간의 가치 평가 - 을 높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노동 시간 이후의 회식도 근무의 연장이며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거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투자하는 노동 외적 시간도 전부 노동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일과 노동이라는 용어가 주는 뉘앙스가 다르고 의미 부여도 달라질 수 있지만 쉽게 양분해서 좋고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노동은 여전히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요술램프인가에 대한 반성은 이미 120여 년 전에 시작되었으니까.
아침형 인간이나 성공하기 위한 방법 등 자기 계발에 관련된 책들의 홍소 속에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황당하게 보일 수 있다. 1883년에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 잔 하는 일만 빼고, 그리고 한껏 게으름 피우는 일만 빼고’라고 외치는 폴 라파르그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리의 삶이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노동의 종류와 환경은 개선되었지만 삶의 조건은 더욱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누가 자신 있게 우리가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간은 금이다’라는 금언은 분명 근대로 들어서면서 생겼을 것이다. 분초 단위의 시간 관리와 테일러가 주장한 철저한 효율성 위주의 경영관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시간을 지킬 줄 알고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뜨며 잠드는 순간까지 시계를 보고 또 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정교하고 교묘한 자본의 논리와 노동중독에 쩔어 있다. 하루라도 시계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없을까.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필요한 만큼 일하고 자고 싶은 만큼 자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걸까.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 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력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 P. 14
이렇게 도발적인 발언으로 시작된 선언문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지만 아무도 긍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다. ‘노동’의 개념 자체가 많이 변화했지만 개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그 선택의 폭이 넓다고는 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저자의 책이 여전히 고민의 단초들을 제공하는 것은 나태하고 게으른 삶에 대한 죄의식을 만들어 준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는 노동하는 삶에 대한 뒤집기는 통쾌하기만 하다. 가벼운 농담거리도 아니고 치기어린 반항도 아닌,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한다.
짧은 분량 때문에 뒷부분에는 전기적 에세이가 덧붙혀져 있다. 분량과 상관없이 강렬하고 진한 인상을 남긴 책이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것이다. 지향점과 방향을 잃은 난파선이 아니라 등대를 바라보며 항해하는 삶은 행복할 것이다. 그 목적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한 연습과 훈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무노동 무임금…’이라고 부르던 노래는 이제 어떻게 들어야 하나? 책과 무관한 엉뚱한 상상과 스치는 상념은 어쩔 수 없는 개인적인 버릇이다. 어쨌든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죽는다는 냉엄한 현실의 법칙으로부터 당분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071109-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