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제국 산책자 에쎄 시리즈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 산책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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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각각이 일종의 시각적 불확실성의 시초이며, 선에서 깨달음이라 일컫는 의미의 상실과도 비슷하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몸, 얼굴, 글쓰기라는 기표를 확실하게 순환시키고 교환하며 그 안에서 기호의 퇴각을 읽으려 한다.

  구조주의자가 쓴 일본 여행기. 롤랑 바르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이 책은 지루하고 따분한 텍스트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기호의 제국>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간극을 보여주는 훌륭한 교과서로 보인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보여주듯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고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1970년에 쓴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은 프랑스식 에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편 한 편의 글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고 한 권의 책으로 일본에 대한 저자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교차되어 있어 이 책은 입체적인 감각으로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낯선 언어가 주는 기표와 기의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번역을 통해 전달된 그 의미는 왜곡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생성되기도 한다. 저자의 이야기가 얼마나 전달되었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내 안에서 생성된 의미와 전달된 이미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소통의 문제가 아니므로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여행에서 담아낸 생소함과 일본의 이미지들이 저자에 의해 다시 재구성된다. 일본이라는 낯선 공간의 문화를 읽어내는 여행자에게 모든 이미지는 텍스트가 되었다. 그것을 하나 하나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대상 자체를 선택하고 그 특징을 드러내는 체계 자체가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선별되는 것은 저자의 몫이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대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당연하게도 프랑스 사람에게 일본을 전달할 목적으로 쓰여졌겠지만 당시의 독자들은 좀 어리둥절 했을 법하다.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소개서로는 너무 불친절하다.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번역된 글이지만 훨씬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일본은 동양이다. 그 안에 서구지향이 있을지 몰라도 서양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이쿠를 인용하여 간결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주려는 이미지를 통해 긴 여운을 만든다. 그들의 음식, 언어, 얼굴, 파친코, 젓가락 등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바로 글쓰기의 대상이 된다. 보는 것이 쓰는 것이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둘은 하나가 되어버린다.

  하나의 개념은 상대적인 구조 속에서만 그 의미를 드러내고 전제 구조의 틀에서 벗어나면 모든 언어와 표상들은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이 의미를 지니려면 전체적인 맥락안에서 대상의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언어학적이든 철학적이든 문화인류학적이든 구조주의든 탈구조주의든 개념과 대상에 대한 인식 틀로서 완벽한 것은 없다. 롤랑 바르트가 일본을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의미로 ‘기호의 제국’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비교 문화적 관점에서 일본을 서구와 비교하지 못했고 타인의 시선으로 혹은 낯선 이방인의 관점으로 그것을 신비화, 기호화했을 뿐 그 심층적 의미를 읽어내지는 못한 듯하다. 대중적 관점에서 저자의 글쓰기와 일본에 대한 시선은 신선한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

  텍스트는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어 낸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교차되면서 저자의 시선과 독자의 의미는 상충되고 저자의 말은 독자가 받아들인 이미지와 뒤섞인다. 그것을 하나의 기호로 해석하든 문화로 읽어내든 의미를 어떤 식으로 풀어내든 불확실성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면제되고 개념이 모호해진다면 기호나 구조가 또 다시 무의미해진다. 일본을 텍스트로 표현하려던 저자의 시도는 독자에게 무의미해지고 하나로 규정하려는 구조와 틀은 이후에 또다시 탈구조주의를 배태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혼란의 틈에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상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이미지는 다르게 인식되더라도 그것을 보는 눈은 달라진다.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눈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니 나의 눈으로 말이다.

  선명한 이미지와 명료한 의미는 여전히 메트릭스 세계 너머의 이야기라고 할 지도 모르는누군가에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소통과 전달의 문제에서 벗어나 기호는 여전히 모호함과 신비함으로 가득한 인생과 유사하다. 그것이 거기에 놓여 있거나 그렇게 표현된 것은 어떤 의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다른 해석과 의미부여가 왜곡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인식만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08113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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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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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잠시 움찔하게 된다. 대상과 범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막연한 질문은 근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사랑은 그만큼 절대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있을까? 누구에게 배워 본 적도 없고 그 실체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아는 것은 보잘것 없다.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놀이하는 인간, 정치적 인간, 언어적 인간 등등. 그 많은 특징 중에 고미숙은 ‘사랑’을 집어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고미숙의 사랑 타령은 깊이 새겨 들을 만하다. <호모 에로스>는 그렇게 탄생한 책이다. 인간에게 사랑이 무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사랑의 비법과 관점들을 쏟아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속된 사랑의 노래를 제창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사랑이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고 그 대안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다. 사랑도 철학이 필요하고 구체적인 방법도 필요하며 방향과 목적도 필요하다.

  공부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도 아니라는 말을 깊이 새겨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성 사랑, 쇼핑에 중독된 사랑법에 대한 일침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똑같은 패턴과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아니 영원한 사랑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자신을 찾지 못하고 타인에게 기대고 의존하는 것은 감정의 소모일 뿐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사랑의 슬픔은 이별에서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아의 존재감을 잃어버린 듯 한 상실감은 지나치게 타인에게 의존하는 데서 그 비극이 시작된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랑은 누가 하는가? 사랑의 주체는 누구인가?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서 끝이 난다.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 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 P. 15

  사랑을 하려거든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하여 보아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던 대학 신입생 시절이 떠오른다. 목숨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거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을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깨닫지도 못했다.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라는 생각이 체계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참 많은 경험과 상처가 필요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을 왜 공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자만심 때문일까? 아니면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일까? 알아도 몰라도 일단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면 똑같은 증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알수 없는 노릇이다.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끼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 P. 16

  저자는 이러한 사랑의 출발점을 ‘나’로부터 시작한다. 실연은 행운이며 에로스는 쿵푸라는 선언은 가벼운 장난처럼 들리지만 실전에서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하는 사랑을 경계하는 선언들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러한 사랑의 의미를 근본부터 파헤치고 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조목조목 비틀고 딴지걸면서 현실에서의 사랑법들을 비판한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해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를 붙잡고 내뱉은 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오랬동안 회자되었으며 기억에 남는 대사다. 많은 사람이 할 말이 많은 대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불멸의 판타지를 꿈꾸는 모든 연인들의 환상에서 비롯된 마약같은 주문일 뿐이다. 사랑은 변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집착이고 증오이며 상처이고 슬픔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는 대상들이 무엇인가? 국가, 가족, 학교 그리고 쇼핑몰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욕망의 배치에 따라 연인들은 흘러가고 쇼핑 공간이 없는 곳에서는 사랑도 불가능하며 자동차가 곁들여지지 않은 사랑은 사랑도 아니라는 비참한 현실. 그래서 청년 문화는 사라지고 대학은 황폐화되고 있으며 모든 가치는 화폐로 환산되는 사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의 자화상이다. 이런 현실에서 사랑이라니? 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사랑법은 무엇인가? 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화폐권력에 저항하고 사랑하는 순간부터 책을 읽으라는 저자의 충고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다. 사랑의 주체가 되어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 나의 감정 타인과 나의 교류와 소통으로 보는 관점이 바로 저자의 사랑법이다. 그래서 감히 힘차게 외친다. 청춘이여, 욕망하라!고.

  사랑은 아무나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랑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류의 절반만큼 많은 수의 사랑법이 있겠으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현재의 사랑을 통찰하는 방법 또한 신선하다. 사랑은 오늘도 계속되겠지만 사랑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른다면 아는 척하지 말고 사랑 공부를 시작해 보자. 즐겁고 신나게. <호모 에로스>와 함께!

08112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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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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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론 살림지식총서 246
이종오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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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는 저자와의 대화다. 글을 읽으면 그 글을 쓴 사람의 영혼을 이해하게 된다. 말보다 글이 더 깊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다. 사용된 낱말과 문장의 구조 그리고 담고 있는 내용에 따라 글을 이해한다는 것은 글을 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글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글을 쓰지 않아서도 안 된다. 가장 솔직한 영혼의 고백이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행위가 글쓰기다. 독자는 글을 쓴 사람과 말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한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다른 부분을 확인하며 때로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속 깊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도 미진한 부분들까지 들춰내는 글을 만나면 부끄러워진다. 마음의 갈피들을 집어 낸 문장들을 읽다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이런 문학적인 글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하고 드러낸 내용보다 그것을 말하는 방식이나 문장의 구조, 사용된 어휘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고 사유의 방식을 설명하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행간을 건너뛰는 의미가 없다면 책은 컴퓨터를 비롯한 다른 매체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가장 지루한 도구가 될 것이다. 하나의 어휘, 하나의 문장이 이루어내는 의미를 포착하고 단락의 의도를 확인하고 글 전체의 내용을 유추하는 과정은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사고 활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가 답을 구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독자는 같은 책을 통해서도 가져가는 것이 별로 없을 수 있다.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이 문체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흔히 문체라고 하면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글의 형식을 말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문체라는 것이 쉽게 정의되지도 않거니와 쉽게 파악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문체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종오의 <문체론>은 의미가 없는 책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부터 출발한 문체론이 갑자기 궁금해진 것은 아니고 그것을 파악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이 책에서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독자들이 쉽게 적용하거나 누구의 문체가 어떠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문장이나 글을 독해하고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활용할 수는 있겠으나 실용적인 분야는 아니다. 학문적인 접근으로 이해하고 대강의 의미를 파악하는 정도로 충분한 내용이다.

  이 책을 통해 글을 쓰는 사람의 스타일이나 글의 형식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체론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무엇인지, 그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글을 다르게 보일 수 있겠다. 이론적인 접근이 다소 딱딱하긴 하지만 호기심을 채우는 정도의 관심이라면 충분하다.

  문체론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수사학에서 문체론까지의 간략하게 설명한다. 본격적으로 바이이의 ‘표현 문체론’, 스피제의 ‘관념 문체론’, 리파테르의 ‘구조 문체론’에 대해 살펴본다. 기준과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문체론의 기능과 종류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누구의 무슨 이론이든 목적과 방법에 따라 형식적 특성과 기능을 살피면 그만이다. 이론적 고찰과 규명은 글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겠는가.

  타인의 글을 살필 때 그가 사용하는 어휘의 빈도수나 저자의 영혼과 직관을 통해 그 글을 전체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독자들은 내용에 바탕을 두겠으나 감각적으로 저자의 스타일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고스란히 작가나 저자의 개성이며 그것을 문체라고 이해한다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떤 문체적 특징이라고 표현해야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문체론은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틀을 제공하기 이전에 글을 쓰는데 있어 하나의 가능성과 방향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쓰여진 텍스트에 대한 분석과 접근일 수밖에 없는 분야지만 그것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글의 형식적 틀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주마간산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지나치게 약술해 놓은 책이기 때문에 그 이상을 생각하면 오히려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기회가 되면 좀 더 깊이 고찰해 볼 내용이다. 여하튼 글을 쓰는 저자의 영혼의 반영이라는 ‘관념 문체론’에 가장 공감했다. 직관과 통찰은 객관적 사실보다 우선할 때가 많다는 편견이 내 안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은 외모나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문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체는 존재를 드러내는 정체성의 다른 이름일까?


08111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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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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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한 책벌레로 부르기엔 한 마디로 규정되지 않는 다치바나 다카시. 읽고 쓰는 사람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불러야겠다. 그렇다고 다치바나 다카시를 정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인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내가 그를 인상깊게 바라본 것은 고양이 빌딩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우연히 개인 전용 도서관이자 집필 공간인 고양이 빌딩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도대체 얼마나 읽고 써야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이후에도 간혹 그의 책을 읽었지만 그가 일하는 방식이나 그가 쓴 글들만큼 그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다. 책에 관한.

  어찌 되었든지 이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책에 관한 책과 독서에 관한 책들은 앞으로도 계속 읽어나가겠지만 정답은 없어 보인다. 이 책도 결국 ‘다치바나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없다는 것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나름의 목적에 따라 방법이 결정되고 실천적인 힘에 의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만이 정답이다.

  이론적인 독서 모형은 공교육 기관에서도 적용시키기 매우 힘들다. 읽어 온 책의 이력이 다르고 배경지식이 제각각이며 모형의 적합성과 방법, 유형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누구에게나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방법들이 동원되긴 하지만 효과는 미지수이다. 특히 독서의 목적과 결과는 천양지차로 나타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도 없다.

  다치바나는 책읽기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체크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나도 물론 그랬다. 충족되지 않는 욕심과 목적 없는 호기심은 넘쳐나지만 시간은 늘 부족하다. 지나치면 폐인모드가 되겠고 현실 생활이 불가능하다. 직업으로 삼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 같으니 적절한 선에서 타협의 손길을 내민다.

  불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다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다. 강철 같은 인문학적 토대 위에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끊임없이 책을 읽고 자료를 조사하고 전문가와 인터뷰하고 그것을 글로 쓴다. 가장 이상적인 지적 활동가라고 볼 수 있다. 편협한 분야의 깊은 연구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원에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분과학문을 뛰어넘지 못하는 교수들의 지루함이다.

  역동적으로 자가 발전하는 발전소처럼 다치바나는 스스로 지식을 가공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며 종횡무진 책의 세계를 주유한다. 그것이 직업이 되고 일이 되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행복하고 기쁘게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인생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즐길 줄 알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다치바다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 책은 다치바나의 독서론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의 서재와 작업실을 보여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내용이 책의 핵심이 되겠지만 그 책의 제목이나 내용보다 과정들이 흥미롭고 경탄스럽다. 누구에게나 삶의 이력이 있듯이 읽어 온 책의 이력이 있을 것이다. 항상  실천과 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지만 사람을 표현하는 좋은 이력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의 서재를 들여다보면 된다. 서재가 없다면?

  책에 미친 사람들의 농담이라도 좋다. 사방 책으로 둘러 쌓인 구석방에 처박혀 해가 뜨는 것도 달이 지는 것도 모르고 책장을 넘기다 기지개를 켜고 숲속을 산책하다가 또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 한 3년만 지낼 수 있다면 어떨까? 주변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오해가 있었다. 다치바나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고 속독을 권하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단편적인 이야기나 한 두 번의 인상으로 타인을 판단하거나 대상을 규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문학을 통해 정신 세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래도 사물을 보는 눈이 사려 깊지 못합니다. 사물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식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문학이라는 세계는 처음 겉으로 나타난 것을 한 번 뒤집어 보면 다르게 보이고, 다시 그것을 뒤집어 보면 또 다르게 보이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표면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문학인 것입니다. - P. 132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고전을 두루 섭렵했고 문학과 철학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보는 통찰력을 기른 그가 소설 무용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책 읽기의 방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산처럼 쌓인 자료와 관련 서적을 뒤적이며 필요한 부분을 속독하고 정리해야 하는 경우 당연한 독서법이다. 바로 이런 목적이라면 ‘실전’을 위해 다치바나의 충고를 눈여겨 볼 만하다.

‘실전에 필요한 14가지 독서법’

1.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말라
2. 하나의 테마에 대해 책 한 권으로 다 알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비슷한 관련서를 몇 권이든 찾아 읽어라.
3. 책 선택에 대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4.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은 무리해서 읽지 말라.
5. 읽다가 중단하기로 결심한 책이라도 일단 마지막 쪽까지 한 장 한 장 넘겨 보라.
6. 속독법을 몸에 읽혀라
7. 책을 읽는 도중에 메모하지 말라.
8. 남의 의견이나 북 가이드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말라.
9. 주석을 빠뜨리지 말고 읽어라.
10. 책을 읽을 때는 끊임없이 의심하라.
11. ‘아니, 어떻게?’라고 생각되는 부분(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을 발견하게 되면 저자가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 또 저자의 판단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숙고해 보라.
12. 왠지 의심이 들면 언제나 원본 자료 혹은 사실로 확인될 때까지 의심을 풀지 말라.
13. 번역서는 오역이나 나쁜 번역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14. 대학에서 얻은 지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 P. 83

  다치바나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다. 독서의 목적에 따라 책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상식 수준의 발언에 불과하다. 오독은 자유지만 오해를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자각! 나는 왜 무엇을 읽고 쓰는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

  책의 내용과 방법은 독서의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목적 없는 산책은 그것대로 방법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지속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아무 목적도 없다는 것이 하나의 목적은 아닐까? 이 책은 독특하고 재미있는 다치바나식 독서법이지만 나는 질문만 늘어났다. 어디를 향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물론 계속 읽어나가면서.


0810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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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아직도 유효한가? 각종 위기설 속에서 책의 위기는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책의 위기를 의미한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과 영상 매체의 진화 속도는 지식과 정보의 수단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었다.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보다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책이 가진 가치와 위력에 대적할 만한 것은 아직 찾기 힘들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은 인간의 지적 능력과 통찰력 그리고 사유의 범위를 무한하게 팽창시킨다. 인간의 사고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을 우리는 에둘러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보다 쉽고 간단한 방법을 찾아보지만 요령부득이다.

  책 좀 읽는다는 무림의 고수 중에 이권우라는 사람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책을 내 놓았다. 그린비에서 인생역전 프로젝트 시리즈로 출판되어 <호모 쿵푸스>와 <호모 루덴스>에 대한 좋은 추억으로 별 고민 없이 주문했다. 책은 단순하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왜 읽어야 하는가’, 2부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이다. 가장 단순하지만 책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고 있다. 간단하고 알기 쉽게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럼 아주 잘 쓴 책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읽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이야기들을 통해 진짜 책읽기가 무엇인지 그런 방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설득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단순해 보인다. 책을 읽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듯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내가 항상 딜레마에 빠지는 문제는 안 읽어도 되는 사람들 즉, 책벌레들이 이런 종류의 책에 관심과 흥미를 보인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깊이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얼마나 읽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저자가 말하는 바,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론을 거의 그대로 따라하는 나 같은 종류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지킬 수 없는 방법들이란 결국 이상적인 방법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처음부터 모두 해 보자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상황과 업무 혹은 관심과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다. 결국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고 겹쳐 읽으며 확장시키고 글쓰기를 통해 정리하는 삶은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전문가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누구나 즐겁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우리의 교육 환경과 구조가 그것을 가르치지도 배울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책의 말미에 ‘책 읽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제목을 보다가 깊은 한 숨을 내쉰다. 참으로 척박한 대한민국의 학교 현실 때문이다. 부모들의 요구 사항이나 학생들이 책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 정도를 감안하고 대학 입시와 결부되어 고민하면 절대 답이 나오질 않는다. 논술 광풍이 몰아쳐 초등학생용 논술 대비 도서가 출판될 정도이니 무한 경쟁과 생존의 본능을 위한 책읽기 외에 다른 대안이 제시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쓰기 위한 읽기 교육을 향해’라는 에필로그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두 사람의 교사나 그에 뜻을 같이 하는 학부모 몇 명이 모여 대안 학교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학벌없는 사회’를 지향하고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이며 이상적이고 꿈같은 목표이기도 하다.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하면 이 책은 참으로 불온하다.

  표정훈이나 조희봉을 통해 고수들의 일면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그리 큰 호기심이나 특별한 충격을 받을 일은 없다. 다만,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다루는 법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며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책으로 읽을 수 있겠다. 책의 목적 자체가 읽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혼자 생각한다. 인문학 분야에 두루 통달한 사람이 초보들을 위해 철학, 역사, 문학, 사회,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안내서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수준과 내용을 일괄해주고 분야별로 정리해주며 차근차근 기본적인 특징과 방법을 설명해 주는 책은 없을까? 출판 관계자가 계시다면 혹 여쭙고 싶다. 그런 저자를 하루 빨리 발굴하고 탁월한 기획과 편집으로 하루 빨리 그런 종류의 책을 만나고 싶다고 말이다.

  이 시리즈의 부제처럼 따라 붙은 ‘책읽기의 달인’은 필요 없다. 한글만 알면 누구나 읽는다. 문맹이 아니라 책맹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도대체 왜 아직도 책 타령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억지로 읽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세상에 수많은 즐거움 중에 책도 한 자리 할 수 있다는 공감 정도는 얻어내야 할 것 아닌가. 책읽기의 달인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 달인을 부러워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아닌가 말이다.

  막연하게 책을 읽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필요성과 방법을 모르는 동생에게,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왜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에게, 책만 보면 알러지 반응으로 얼굴이 벌개지는 후배에게, 드라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어머니에게, 지금 이 나이에 책은 무슨 책이냐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은근슬쩍 선물해 볼 수 있는 유쾌한 책이다. 

  책읽기는 기본적으로 혁명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꿈꿀 리 없다. 꿈꿀 권리가를 외치지 않는 자가 책을 읽을 리 없다. 나를 바꾸려 책을 읽는다. 애벌레에서 탈피해 나비가 되려 책을 읽는다. 세상을 바꾸려 책을 읽는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 책을 읽는다. 그러하길래 책읽기는 불온한 것이다. 지배적인 것, 압도적인 것, 유일한 것, 의심받지 않는 것을 희롱하고, 조롱하고, 딴죽 걸고, 똥침 놓는 것이다.
  변신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픈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보라. 혁명전선에 뛰어든 체 게바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 않은가. - P. 76


08092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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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2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이책 서평단으로 받아서, 읽어야 되는데... 또 왠지 손이 안가고 있어요. 인식의 힘님 리뷰 덕에, 읽을 마음이 좀 나네요 ^_^

sceptic 2008-09-25 19:18   좋아요 0 | URL
그냥 편안하게 읽히던데요...^^ 손대면 금방 책장 넘어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