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해야 할 것
수잔 손택 지음, 김유경 옮김 / 이후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글들을 통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 인식의 힘은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준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수전 손택은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향기가 나고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달된다. 현장 운동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었던 사람은 물론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진보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순간이 있고,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기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미래를 향한 전망은 어둡기만 한 시간들을 견뎠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작가를 사회적 현상과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져야 하며, 모든 생이 어쩌면 작품 해석을 위한 도구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작가와 작품 그리고 현실의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강조해야 할 것>이라는 책은 그녀의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1부에서는 ‘내가 본 것들’을, 2부에서는 ‘내가 읽은 것들’을, 3부에서는 ‘그곳과 이곳’이라는 주제로 묶었다. 본 것은 물론 영화과 연극 무용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음악을 제외한 모든 예술은 시각을 통해 구현된다. 기술 복제의 시대로 명명되는 20세기의 예술은 영화로 대표된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식중의 하나로 영화를 선택한 켄 로치 같은 감독은 영화의 역할과 의미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지난 세기의 가장 큰 특징을 ‘영화’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이 될 것이다. 영화든 그림이든 관객과 애호가의 입장에서 그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작가와 소통할 수 없고, 작가는 작품 속에 갇혀 고립된다.

아무리 많은 영화가 만들어진다 해도, 아무리 좋은 영화가 만들어진다 해도, 영화애호가들이 사라지면 영화도 사라진다. 영화의 부활은 새로운 종류의 영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 P. 19

그림을 그릴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기억 속에 있는 그리고 기억에 의해 변형된 무엇이다. 또한 오랜 시간에 걸친 생각과 수없는 회상이라는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그림은 수많은 결심과 덧칠, 붓질이 쌓인 결과이다. 어떤 그림은 감정의 정확한 두께를 찾기 위해 몇 년에 걸쳐 그려지기도 한다. - P. 67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수전 손택은 동시대인으로서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나 보르헤스의 소설들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말걸기를 시도한다. 선명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타인의 글을 들여다본다. 투명하고 맑은 시선은 깊은 사유와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수전 손택의 글들은 그렇게 명징하고 서늘하게 핵심을 찔러댄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단단하고 건조하기보단 부드럽고 따뜻하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나 분명하고 선언적인 문체가 도드라지기도 하지만 재치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편안하지만 분명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라예보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면서 그녀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타인의 고통>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현장성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글들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다가온다. <해석에 반대한다>로 기억되는 그녀를 보다 다른 관점에서 혹은 다른 글들을 통해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독자에게 색다른 경험이다. 에세이의 형식은 편안하고 자유롭다. 분량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의 생각과 느낌들을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희곡이든 비평이든 그녀의 존재방식은 글쓰기였다. 글이 무기였고 행동이었다.

언어 외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강렬한 어휘 선택으로, 뛰어오르는 구두점으로, 쾌활한 문장 리듬으로 인간관계의 고통을 망각하게 하는 것. 더 섬세하고도 게걸스러운 방식의 앎을, 감정이입을, 견제 방식을 고안하는 것. 그것은 형용사의 문제이다. 강조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 P. 230

읽기는 쓰기에 앞선다. 그리고 읽기로 인해 쓰고자 하는 욕망이 촉발된다. 읽기는, 읽기에 대한 사랑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거나 과거에 자신이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멋진 기분전환이 된다. 기분전환, 위안, 고통, 그리고, 그렇다. 영감이 된다. - P. 361

  표지 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본다. 반백 그녀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가 바라보았던 곳은 어디일까? 현실 너머에 있는 이상적 공간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현실은 아니었을까 싶다. 삶에 대한 열정과 예술에 대한 심미안을 가진 그녀는 늘 실천하는 양심으로 비판적 지성으로 불리었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세간의 관심이 어떠하든 그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영혼의 울림은 독자에게 번역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렇게 그녀를 독자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언어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는다.

나는 번역하지 않는다. 나는 번역된다. - P. 470


07092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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