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성님 동상을 나가라고 하니
어느 곳으로 가오리오 이 엄동설한에
어느 곳으로 가면 산단 말이오
갈 곳이나 일러주오
지리산으로 가오리까 백이숙제 주려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1995년 강변가요제에서 대학생 두 명이 ‘육각수’라는 이름으로 나와 <흥보가 기가 막혀>란 노래를 불렀다. 이야, 가사도 기가 막히는군, 했더니 판소리 흥보가의 노랫말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무장단 창조>
"아이고 형님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니리>
"잔소리 말고 나가!"
<중모리>
나가란 말을 듣더니마는 "아이고, 여보 형님 동생을 나가라고허니 어느곳으로 가오리까? 이 엄동설한풍의 어느 곳으로 가면 살듯허오 지리산으로 가오리까 백이숙제 주려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이놈 내가 너를 갈 곳까지 일러주랴? 잔소리 말고 나가거라!" 흥보가 기가 맥혀 안으로 들어가며 "아이고 여보 마누라! 형님이 나가라고 허니 어느 영이라 거역허며 어느 말씀이라고 안가겄소, 자식들을 챙겨보오"
(흥보가 노랫말은 http://www.koreartnet.com/wOOrII/sori/pansori/pansori_5madang.html에서 가져왔습니다.)
문득 육각수의 이 노래가 그리워진다. ^^
그런데 왜 이 노래가 생각났느냐 하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에서 이 노래에 나오는 ‘백이숙제’에 관한 내용을 읽었기 때문이다. 수양산에서 주려 죽었다는 백이와 숙제를 그냥 옛 중국의 유명한 선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관중과 포숙아처럼 둘이 절친한 친구였나 보다 하면서.
그런데 백이와 숙제는 두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형(伯 : 맏이 백)인 이공(夷公)과 동생(叔 : 아재비, 아우 숙)인 제공(齊公)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두 사람의 원래 이름은 묵윤(墨允)과 묵지(墨智)라고 한다. 이공과 제공은 두 사람이 죽은 뒤 임금이 내린 시호다.
이를테면 맏이인 예진이와 아우인 연우를 함께 ‘백진숙우’라 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 때 고죽국(孤竹國) 왕의 아들들이었는데, 아버지가 왕위를 동생인 숙제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한다. 동생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사양했는데, 형인 백이도 마찬가지로 왕위를 사양했다. 두 사람은 함께 고죽국을 떠나, 주나라 문왕의 덕이 높다고 생각하고 찾아가 신하가 되었다. 그런데 문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무왕이 은나라를 쳤다. 백이와 숙제는 그것이 옳지 않다 하여 주나라의 녹을 받지 않으려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결국 굶어 죽었다고 한다.
백이숙제의 고향 땅 이름도 고죽국(孤竹國)이다. 참... 고고한 대나무 같은 사람들만 사는 곳인가.
국(國)이라 하면 독립된 한 나라 같은데, 고대 중국에서 국(國)은 군(郡)보다 큰 지방 정권을 말한다. 중국은 땅도 넓고 민족도 다양해 지역마다 각기 다른 우두머리가 임금 노릇을 했다. 그중 힘세고 싸움 잘하는 사람이 다른 지방 정권을 정복하면, 그 지방 정권의 영역을 직접 다스리기도 했지만, 때 되면 공물이나 군사를 바치라고 하고 원래 임금을 그냥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아무개를 무슨 국(國)을 다스리는 왕으로 봉한다” “아무개를 무슨 군(郡)을 다스리는 공으로 봉한다” 하고 조서를 내려준다. 당나라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인정하고, 후대에는 발해를 군이 아니라 국으로 승격하고, 명나라에서 누구를 조선국 왕으로 인정하고, 한 게 다 그런 의미다. 그래선지 중국의 역사를 끌고 왔다는 왕조들-은, 주, 진, 한, 위, 송, 명, 청 등등에는 ‘국’이란 말이 붙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중국이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고대 동아시아에 있었던 여러 나라 중에 중국의 지방 정권 아닌 나라가 없다.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가 힘세고 문물이 발달한 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대신 하사품을 잔뜩 받아 오는 게 고대 동아시아의 공무역 형태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