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쪽 (신경쇠약자)는 훌륭한 진보의 도구이기 때문에 진보를 통해서 그의 역할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전통과 인습이란 멍에에 대한 반역자이기 때문에 매우 풍부한 개혁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문명이 가장 발달한 사회는 대표의 기능이 가장 필요하고 발달된 사회이며, 동시에 그와 같은 사회는 고도의 복합성을 지니게 되어 끊임없는 변화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신경쇠약자들은 바로 그들의 수가 가장 많은 때에 생존해야 할 최선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은 그만큼 불합리하고 모순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진보를 자극한다.
119쪽 우리는 용어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실은 문제를 은폐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얼렁뚱땅 말로 넘어가는 것은 문제를 은폐하는 것일 뿐... 해결은 더욱 멀어진다.
134쪽 사실상 자살이나 살인의 증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혐오되는 경우에는 그 행동에 대한 감정이 말하는 것에 침투되므로, 개인적인 경향을 고무하기보다는 오히려 제한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사회가 퇴폐적일 때 사회의 불안정한 상태는 그와 같은 행동이 논의될 때마다 솔직하게 표현된 비도덕적 행동에 대한 탐닉이 자극되고, 그 행동의 비도덕성을 애매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살이나 살인의 실례가 선례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용과 무관심으로 인해서 그 행동에 대한 반동이 약화되기 때문에 사회는 실제로 위험해지는 것이다.
말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문제... 문제를 쉬쉬 숨기면 공개적 논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수도 없고, 그러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284쪽 실제로 그 현상이 가족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혼이 드문 나라에서보다 이혼이 빈번한 나라에서는 기혼여자도 역시 자살로부터의 보호를 적게 받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역시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가족관계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와 정반대인 것이다. 기혼여자의 자살방지계수는 남편들의 계수가 떨어짐에 따라 비례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또한 이혼의 빈도와도 비례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결혼의 유대가 더운 빈번하게 끊어지는 사회일수록 아내들은 남편들에 비하여 더욱 자살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다.
이혼이 자유로운 사회일수록 여성의 자살률이 낮다. 그리고 결혼 생활이 남자들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사회일수록 기혼 여성의 자살률이 높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결혼해서 좋아지는 만큼 여자의 상태는 나빠진다. 수치상으로 봤을 때, 적어도 19세기 유럽에서는, 결혼한 남자들은 그 아내의 뼛골을 파먹으며 산 것이여...
290-291쪽 일반적으로 여성의 성적 욕구는 정신적인 성격이 적으며, 그녀들의 정신생활은 덜 발달되어 있다. 여성들은 유기체의 욕구에 보다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을 인도하기보다는 그것에 따르게 되므로 유기체가 능률적인 규제력을 갖는다.
여성이 공적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덜 정치적이라 해서, 정신생활이 덜 발달되었다는 논리는 뭐냐?
368쪽 여성은 여성 고유의 기질로 인해서 남성보다 생명을 더 존중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여성은 생존경쟁에 깊숙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만큼의 기회를 갖지 못할 뿐인 것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생명을 존중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출세한 여성은 더욱 잔인할 수도 있다.
(391쪽) 가장 현저한 형태의 비도덕적 행동인 범죄조차도 반드시 불건전한 병적 증세만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392쪽) 어느 정도의 범죄가 발견되지 않는 사회는 없다. 도덕이 일상적으로 침해받지 않고 살고 있는 국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란 필연적인 것이고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회조직의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범죄는 정상적인 것이다. (중략) 필연적인 불완전성은 병이 아니다. (393쪽) 그러나 범죄는 오직 비난되고 억제될 때에만 유용하다. 범죄를 정상적인 사회학적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범죄를 면죄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범죄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 정상이라면 범죄가 처벌되어야 한다는 것도 정상이다.
이 책에서 읽은 가장 놀라운 생각... 다른 측면으로 연장해서 생각해볼까. 장애인이란 인간 사회에 반드시 일정 부분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사회 구성원 중 일부로서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정상이다. 사회 구성원 중 일부가 반드시 장애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정상이라면, 장애인을 치료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도 정상이다.
395쪽 사회에서는 무제한의 비판정신과 자유로운 연구가 계속되는 그룹이 있어야 하고, 또한 군대처럼 옛 권위의 종교가 그대로 유지되는 그룹도 있어야 한다. 물론 정상적인 시기에는 그와 같은 특수한 초점의 영향은 어느 수준에서 제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감정은 특수한 상황에 관련된 것이며 일반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제한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는 단일한 시기에서도 여러 가지의 상이한 상황을 당면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전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한 사회 속에 여러 성격을 지닌 집단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만, 필요악을 설정하는 듯해서... 잘 모르겠다.
396쪽 집합적인 슬픔의 경향은 지나치지만 않다면 각기의 존재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오직 순수한 기쁨만이 정상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슬픔에 대하여 완전히 무감각해 가지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은 여러 가지 슬픔을 포용함으로써만 견딜 수 있으며, 따라서 기쁨은 어느 정도 우울함을 내포할 수 있다. 우울증은 그것이 지나칠 때만 병적이 된다. 그러나 생활에 있어 우울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도 역시 병적이다. 행복한 과장은 그 반대의 경향에 의해서 조절되어야 한다. (중략) 지나치게 명랑한 도덕성은 이완된 도덕성이다.
이의 없다! 슬픔을 모르면 행복해질 수 없다!
밑줄긋기만으론 만족하지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