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지 그를 뽑은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역시 단돈 얼마쯤을 보냈다. 돈을 준 사람은 국민들밖에 없으니 두려울 것도 국민들밖에 없다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선거 따위에서는 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내 친구들은 기세 좋게 건배를 외치며 생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그날 저녁 그 맥주집에서 승리를 만끽하는 테이블은 우리 뿐이 아니었다. 탄핵 위기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화가 났고 퇴근길이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촛불을 들었으며, 둘레에 나같은 사람이 그토록 많다는 것에 뜻모르게 들떴다.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잦은 말실수(라고 생각되는 것들) 때문에 나는 그를 미워했고 심지어는 부끄러워했다. 나는 그런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나 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어지럽다. 그래도 버텼어야지, 자기가 뭐라고 죽어버리는 거야. 돈 없고 빽 없으면 대통령까지 되었다 해도 끝이 이렇다고--거봐라 하고 누군가들은 좋아할 거 아냐. 아니다, 우리는 왜 그를 뽑았을까, 이토록 정치적이지 못한 사람을. 이런 바보를. 이 바보야, 그냥 구차하지, 그냥 뻔뻔하지, 왜 죽어버린 거야.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몰라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더니 밥을 먹으면서도 울고 잠을 자면서도 울고 CSI를 보면서도 울고 미사시간에도 울었다. 왜 우는지 나도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에게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만 같다. 당분간 무얼 읽고 무얼 써야 될지 모르겠다. 이런 일에도 교훈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현자든지 그것을 알려준다면 위로를 삼을 텐데. 우리 모두가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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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2009-05-2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글을 보고 눈물이 마구 나와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자기가 뭐라고 죽어버리는거야..." 이 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네꼬 2009-05-28 22:37   좋아요 0 | URL
쟈니님, 저는 이 댓글을 보다가 울었어요.

rainy 2009-05-25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구차하지.. 그냥 뻔뻔하지..
아무래도 나에게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만 같다..
네꼬님..

네꼬 2009-05-28 22:38   좋아요 0 | URL
rainy님, 정말 길고도 긴 한주였어요.

paviana 2009-05-25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같이 울어요.손 꼭 붙잡고요.

네꼬 2009-05-28 22:39   좋아요 0 | URL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같이 울어줄 사람이에요. 손을 잡아줄 사람.

2009-05-25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8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9-05-2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 무기력해집니다. 그냥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 집니다.
'그냥 살았어야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였을텐데요.
참으로 참으로 허무합니다.

네꼬 2009-05-28 22:40   좋아요 0 | URL
세실님. 이런 일에도 교훈이 있을까요? 허무도 참 커다란 허무예요.

지누션 2009-05-28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멀리 있구나. 친구야. 여기서 인터넷 기사를 읽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니, 내 무릎에 있던 진우가 "엄마 대통령 계속 보니 졸려."하면서 잠이 들더라. 아.. 아.. 멀리서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 아무 것도 하기가 싫구나.

2009-05-28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9 0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런 말 참 유치한 줄은 알지만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으므로 그냥 해보겠다. 멋있는 남자의 조건은 무엇일까? 네꼬씨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안 끌려본 적이 없는 타입을 말하자면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꼭 되게 웃겨서가 아니라 내가 재밌는 말을 했을 때 그게 왜 얼마나 어떻게 재미있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나의 동거녀는 똑똑하지 않은 남자에게는 안 끌린다고 했다. 내 친구는 약간 느끼한 것 같은 남미의 남자들을 좋아한다. 운동선수라면 사족을 못 쓰는 친구도 있고, 누가 뭐래도 크고 비싼 선물을 주는 남자에게 넘어가는 친구도 있다. 운전을 잘하는 남자에게 정신을 놓는 친구도 있고, 옷 잘 입는 남자에게서 눈을 못 떼는 친구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여인들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동의하고 있는 유형이 있으니 그건 바로 노래를 잘 하는 남자다. 남자는 진심이 담긴 노래를 부르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큐트한 남자는 영국에 사시는 개러스 멀론씨(34), 런던 심포니 시민 합창단의 지휘자다. 그는 어렸을 때는 곧잘 노래를 부르던 남자아이들이 커가면서 노래부르기를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고 이걸 바로잡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소년합창단을 꾸리기로 계획하고 찾은 랭커스터 중등학교는 학생수가 1200명에 이르는데(1200명의 남자 청소년들이라니!) 심지어 스포츠명문이기까지 하다. 합창단에 들어오라는 권유에 아이들은 "애들 앞에서 노래하면 집에 가는 길에 공격당해요"라고 대꾸한다. "남자가 노래를 부른다니, 그건 게이들이나 하는 거예요" "노래라뇨? 이런 거요? (이어서 비트박스와 랩 시범)" 그래도 개러스는 꿋꿋하게 음악시간을 이용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무작정 운동장을 누비며 아이들을 하나씩 만나 합창단에 들게 하고 무서운 (우리식으로는 학생주임 정도 되는) 선생님을 조르고 졸라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노래를 부르게 하며 급기야 로열 앨버트 홀(전 모르지만 아마 되게 큰 극장인가봐요)에 아이들을 세울 계획까지 세운다. 바로 내 사랑 EBS의 다큐 10+ 에서 방송하는 <개러스 선생님의 합창단 프로젝트-소년이여, 노래하라!>(5월  5일 ~ 26일 (화) 밤 11시 10분 ~ 12시)이야기다. 이 4부작 다큐멘터리는 지난 4월 British Academy Television Award 2009에서 Best Feature 상을 받았다. 원제는 <The Choir- Boys don't sing>.  2007년 같은 부문 상을 받은 <The Choir>의 두번째 이야기 되겠다.(이것도 내 사랑 EBS에서 방송한 적 있는데 나는 그때 개러스씨를 처음 알았다.)   

지난 화요일 첫방송에서는 음악시간에 엉망으로 잡담하고 도무지 노래할 생각이 없는 아이들과 "경험이 많은 선생님이라면 포기했겠죠." 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개러스의 대립, 뛰어난 재능을 보고 개인 교습을 해주려 하지만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 임란의 등장(아래 동영상에서 중간 솔로를 맡은 소년), 체육 선생님에게 노래하랬더니 '당신이 먼저 나랑 운동을 하면'이라 대꾸하는 웃기고 무서운 장면, 조회 시간에 혼자 꿋꿋하게 노래를 부르는 개러스의 고군분투 등이 방송됐다. 첫방송을 놓치신 알라딘 친구 여러분들께, 이번 화요일부터는 같이 보자고 알려드린다. "past"를 '파스트'라고, "can't"를 "컨트"라고 발음하는 초절정 매력남 개러스 멀론과 다큐멘터리 전반에 흐르는 아름다운 클래식 연주만으로도 분명 만족하실 거다. 혹시 내 말을 안 믿으실까봐 이 둔한 고양이발로 동영상까지 찾았다.(아이고 허리야) 바로 그 "로열 앨버트홀"의  공연 장면. (자 빨리 스피커 켜세요. 이어폰 꽂으세요. 모니터 앞으로 바짝 오세요. 더 바짝.)  

 

 

다른 동영상을 보니, 공연을 끝낸 아이들은 벅찬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무대 뒤에서 소리지르고 손뼉을 마주치고 선생님께 감사의 환호를 보내고 가족들과 포옹한다. "Stand by me"의 시작부분 솔로를 맡았던 소년은 "왜 우는지도 모르고" 운다.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래서 말해주고 싶었다. 얘, 너는 이제야 진짜로 남자가 되어가고 있는 거야.   

 

 

*붙임.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하나 더 보시라고. 이건 연습공연쯤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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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5-1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건 제가 니나와 내린 결론인데요
똑똑한 남자가 유머도 잘해. 아니, 그러니까, A가 꼭 B는 아닌데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의 유머를 잘하는 남자들은 꼭 똑똑하기까지 하더라, 뭐 이런 결론인거죠 ㅋ

파스트와 컨트, 그 딱 저것만은 아닌 그 미묘한 경계선상에 있는 발음, 저도 좋아해요- 어디 영국식 영어 가르쳐주는데 없나 (일단 하는 것부터 좀 제대로 하지?) 막 고민했었는데 ㅋㅋㅋ 방송 궁금한데요, 챙겨볼 자신은 없고. 으흑.

네꼬 2009-05-11 00:24   좋아요 0 | URL
"똑똑한 남자가 유머도 잘해"에 전격 동의. 똑똑하다고 꼭 유머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유머감각이 있으려면 일단 똑똑해야 되는 것은 사실. (그래서 찾기 어렵나봐. ㅠㅠ)

그 미묘한 영국식 영어 발음 진짜 매력 있죠. (@_@) 그것도 그렇지만 정말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클래식들이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챙겨서 봐요, 울지 말고. 원한다면 내가 알람해줄게. (개러스에 정신 팔려 일은 다 내팽개치고 있는 네꼬.)

L.SHIN 2009-05-11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번째 노래는..내가 좋아하는 EVA CASSIDY의 노래네요..^^
그닥 뛰어난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값진, 일반인들의 순수한 노래..그들의 긴장감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웃음) 아름다운 남자군요.

네꼬 2009-05-11 18:51   좋아요 0 | URL
아, 엘신님 오래간만이에요. 필드 오브 골드는 전 몰랐던 노랜데 에바 언니의 것과 스팅의 것이 다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아마 이 소년들은 에바 언니의 것을 편곡한 듯. 사실 듣다 보면 음정도 박자도 조금 불안하지만 전 어쩐지 그래서 더 좋더라고요.

프레이야 2009-05-11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이 담긴 노래를 부르는 남자, 남자의 완성형..
이말에 일면 동의해요.^^ 저도 연애할 때 옆지기의 노래,
미성에 반한 것도 있거든요. 근데 그것도 좀 변하고 목소리도 탁해져요.
최백호가 좋아요. 그런점에서요.(뜬금없이) ㅎㅎ

네꼬 2009-05-11 18:53   좋아요 0 | URL
'미성에 반한 것'이라는 대목에서 어질어질했는데, 최백호가 좋다는 엉뚱한 결론에 저도 웃었습니다. 하하. 가만 떠올려보면 그동안 '잘' 하는 남자는 사귀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래서 동경이 더...?

LAYLA 2009-05-1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사람을 볼 때 겉모습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저에게 하는 말이 '넌 물건 고를 때 얼마나 이쁜지 하나하나 따지지...사람 볼 때도 똑같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래는 당연하죠 :) 노래 잘하는 사람은 무조건 멋져보여요!

네꼬 2009-05-11 18:54   좋아요 0 | URL
하하.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알려드리자면, 우리 동거녀는 못생긴 자동차는 지나가기만 해도 싫어해요. ㅎㅎ 예쁜 게 좋죠. 그게 어떤 기준에서든. 그런 의미에서 노래는, 잘하는 게 좋죠? 무조건! (이상한 연결이지만 아무튼.)

마늘빵 2009-05-1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 흠흠, 발성연습 중이에요.

네꼬 2009-05-11 18:55   좋아요 0 | URL
아프님 안녕? 요새 바쁘지 않아요? '밴드'를 하셨다면서요. 노래도 불렀어요? 아프님 노래부르는 거 함 들어봐야 될 텐데. 알라딘 처자들을 모아서. (^^)

보석 2009-05-11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휘하면서 웃는 게 정말 즐거워 보이네요.^^ 화요일 EBS란 말이죠. 내일이군요. 훗훗.

네꼬 2009-05-11 18:56   좋아요 0 | URL
그렇죠, 개러스 선생님 웃는 모습, 좋아 보이죠. (흐믓흐믓) 동지를 하나 구했도다. (흐믓흐믓) 우리 화요일 밤에 함께 즐거워보아요. ㅎㅎ

치니 2009-05-1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다큐 본 적 있어요, 딱 한 번 봤지만 인상 깊었는데도 그 다음에는 챙겨보질 못했네요.
(솔직히) 개러스 선생님의 외모는 제 취향이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매력적이에요.
네꼬님은 아시죠? 제 취향. 내 사랑 로베르토 ~ 헤헤헤.

네꼬 2009-05-11 20:59   좋아요 0 | URL
전편인 [The Choir]를 보셨군요! 저도 그 다큐멘터리 좋아했는데 아쉽게도 마지막회를 못 보았다능. (쿵쿵 머리를...) 저도 사실 이런 외모가 제 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왜 넘어갔을까요? 넋을 놓고 보았어요. (ㅠㅠ 얇은 내 심장) (*로베르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저도 지금 바쁜 일 끝나면 치니님께 땡스 투 한 그 영화를 보려고 벼르고 있어요!)

마노아 2009-05-1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막 벅찬 감동에 난 눈물도 찔끔 났잖아요. 너무 멋져요. 이렇게 소개해주는 네꼬님은 진정 사랑스러운 고양이에요! 충성!!!

네꼬 2009-05-21 10:00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저 너무 한참 있다가 답 달죠? 그래도 충성이에요? 응? ㅎㅎ (다음주 화요일이면 방송 끝이에요 ㅠㅠ)

kimji 2009-05-1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눈이 움푹 들어간 남자가 좋아요!! (푸르스름한 수염 자국에도 꿈뻑 넘어가요;; )
(눈이 쑥 들어간 것에 홀딱 빠져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나니 남편 키가;; 그저 눈만 들어가 있던 남자였던 거지요;; 그 와중에 코도 낮으면 어떡하냐구요;; 에휴=3=3 )
아무튼, 저도 얼결에 전편이 다큐를 봤던 모양이에요. 흐흐-
올려주신 노래 잘 들었어요.
개러스 선생님 웃는 모습을 보니, 그냥, 다리에 힘도 빠지고;; (개러스 선생님도 눈이 들어갔잖아요!! )

네꼬 2009-05-21 10:0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래도 눈은 (kimji님 보시기에 원 없이) 들어가셨으면 됐죠! ㅎㅎ 저도 그 '눈 움푹'에 끌리는 마음 압니다요 알아요. (고개 떨어져라~) 개러스 선생님은 웃을 때 눈도 들어가고 입도 아주 예쁘죠. 네, 저는 마음을 딴데 두고 이 다큐를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1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잘하는 사람 부러워요.

네꼬 2009-05-21 10:02   좋아요 0 | URL
전 노이에자이트님처럼 글 잘 쓰시는 분이 부러워요. :)
 


아기는
큰다 큰다
기지개를 켤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떼를 쓰고 울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달음박질 할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집집마다 동네마다. 
 


윤석중 「아기는 큰다 큰다」 (1948)



문학이라는 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좋아지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굳이 거슬러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예나 지금이나 작품들에는 편차가 있고 결정적으로 독자에 따라 호오가 갈리게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흐름을 되돌리고 싶은 장르가 있으니 바로 동시-동요다. 60년 전 동요의 “아기는 큰다 큰다 / 집집마다 동네마다”는 얼마나 간결하고 순박하며 따뜻하냔 말이다. 읽기도 외우기도 쉽고 노래를 붙이기도 쉽다. 게다가 자고 일어나는 것, 뛰어노는 것, 심지어 떼를 쓰는 것까지 어린이에겐 ‘크는 과정’이라는 통찰과 너그러운 시선을 보라지. ‘집집마다 동네마다’에 묻어있는 정겨움이란. 예쁜 노랫말이 주는 연둣빛 뚝뚝 떨어지는 감동은 다른 어떤 예술의 그것도 대신하지 못한다. 자, 이번 어린이날에는 진짜 동시와 동요를 읽어보아요. 
 

『날아라 새들아』(윤석중 동요선집, 창비 1983; 1991)
개정을 했다지만 본문의 서체와 책의 모양새가 약간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훌륭한 동요집을 여태 재개정하지 않은 창비가 서둘렀으면 좋겠지만 또 막상 이 책의 동요들을 읽다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화려한 요즘 동시집들에 비하면 촌스러워 보이지만, 시에 집중하기가 좋다. 그림이 간결하고 무엇보다 윤석중의 시 자체가 이미지를 떠올리기 좋은 덕분. 천여 편에 이른다는 윤석중의 작품들 중에서 추린 시가 무려 200여 편이다. “새 신을 신고 / 뛰어 보자 팔짝 /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 앵두 따다 실에 꿰어 / 목에다 걸고 / 검둥개야 너도 가자 / 냇가로 가자”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좁다란 학교길에 / 우산 세 개가 / 이마를 마주대고 / 걸어갑니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읽으며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노래를 부른 분들은 조용히 손을 듭니다. 어린 시절 조금쯤 윤석중에게 빚을 지셨군요. 갚으실 땝니다.
 

『귀뚜라미와 나와』(겨레아동문학연구회 엮음, 보리 1999)
‘한국 근대문학사의 횡재’라는 최원식의 추천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근대 아동문학의 성과를 정리한 ‘겨레아동문학선집’(전10권)은 한 권 한 권이 벅차게 귀하지만 나는 『귀뚜라미와 나와』를 특별히 좋아한다. “넣을 것 없어 / 걱정이던 / 호주머니는, // 겨울만 되면 /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윤동주, 호주머니-전문.) “방그죽 입을 벌린 밤송이에서 / 알암밤 형제가 내다봅니다 / 다람쥐 있나 없나 내다봅니다.” (현동염, 알암밤 형제.) “가갸 거겨 / 고교 구규 / 그기 가. // 라랴 러려 / 로료 루류 / 르리 라.” (한하운, 개구리-전문.) 정말 아무데나 펼쳐도 이런 시들 나온다. 신나는데 하나 더 읽어드릴까요? “비오는 날 / 빗방울들이 / 빨랫줄 위에서 / 동동동 / 줄타기 연습하오 // 뒤에 오는 / 빗방울 하나 / 앞선 놈 밀치다 / 뚜-욱-딱 / 둘이 다 떨어져요” (송창일, 빗방울-전문.) 
 


『할아버지 요강』(임길택, 보리 1995)
어느 평론가의 말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린이가 아니고서 동심을 가진 채로 시를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임길택의 시가 그 생각을 바꿔 놓았다’(원종찬의 『동화와 어린이』에 이런 내용의 문단이 있어요.) “마흔 여섯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했습니다”라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고 그저 착한 시, 또는 결연한 이념(?)시를 떠올려선 안 된다. “공부를 않고 / 놀기만 한다고 /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 잠을 자려는데 / 아버지가 슬그머니 /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자는 척 / 눈을 감고 있으니 / 아버지가 /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 미워서 / 말도 안 할려고 했는데 /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흔들리는 마음-전문) 

 


 『노래하는 강아지똥』 (권정생 원작, 백창우 지음, 길벗어린이 2009)
네꼬씨가 이렇게 동시를 좀 읽어달라고 애걸복걸해도 ‘그래도 어른이 쑥스럽게...’ 라는 생각이 든다거나, 둘레의 어린이가 아무리 시를 읽어도 별 감흥이 없어한다거나(물론 그럴 땐 그냥 억지로 읽히면 된다), 역시 둘레의 어린이가 ‘쏘리쏘리쏘리쏘리 내카내카내카 먼저’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못 봐주겠다거나, 아니면 그냥 색다른 (새로운) 음악을 들어보고 싶은 분들에게 맞춤한 책이 바로 지난주에 나왔다. ‘노래마을’과 ‘굴렁쇠아이들’을 이끄는 백창우. 복습해보자.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나이 서른에 우린’ 또 있다. ‘부치지 않은 편지’(김광석) ‘내 사람이여’(임동원/김광석) 그렇다, 바로 그 백창우다. 알려진 대로 백창우는 ‘아이들에게 아이들 노래를 돌려주자’는 취지로 많은 동요 앨범을 냈다. 이원수, 이문구 등의 동시에 노래를 붙이기도 했고, 전래동요를 되살렸으며, 스스로 동시를 쓰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노래하는 강아지똥』은 권정생의 「강아지똥」에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노래극의 형태로 들을 수 있는데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신나게, 때로는 슬프게 원작의 감동을 전한다. 알라딘에서 미리듣기 이벤트중이다( 요기서 ). 굴렁쇠 아이들이 노래를 많이 했고 백창우 자신이 내레이션을 하기도 했으며(듣고 있노라면 어째 울컥한다) 이홍렬 아저씨가 우정출연(?)한다. 진짜 되게 좋다. 
 



*
페이퍼의 제목 “물건이 좋지 않으면 권하지 않습니다”는 저의 완소 웹진 텐아시아 의 한 꼭지 10choice 카피에서 베껴왔어요. 텐아시아 자체가 제가 권하는 물건. 여러분, 네꼬씨는 물건이 좋지 않으면 권하지 않습니다. 싱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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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5-0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들지 않았더라면 추천도 하지 않았어요.ㅎㅎㅎ
훌륭한 동시집들이에요. 어휴, 지금 노래 듣고 있는데 완전히 신선하고 신나요. 네꼬님 표 추천 최고예요!

네꼬 2009-05-07 09:12   좋아요 0 | URL
백창우의 이번 앨범의 전의 것들보다 뭐랄까, 온가족이 함께 듣기 좋달까요. 저는 아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마노아님도 즐겁게 들으셨다니 야호예요. 호홋, 뿌듯해라.

코코죠 2009-05-0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아름다운 호객행위 고양이 같으니. 어쩌면 그 곰살맞은 발로 요로코롬 이쁜 글만 토닥토닥 쓰는지! 아아 얄미운 당신은 정말이지 "매일매일 페이퍼 10개씩 쓰는 약" 같은 독한 처방전이 필요한 낭만 고양이.
자, 저도 빚지고만 살 순 없으니 아끼는 동시를 털어놓겠어요.

*

언니의 언니

윤석중



난 밤낮 울 언니 입고 난
헌톨뱅이 찌꺼기 옷만 입는답니다.

아, 이, 조끼두 그렇죠,
아, 이, 바지두 그렇죠.
그리구, 이 책두 언니 다 배구 난 책이죠,
이 모자두 언니가, 적어 못쓰게 된 모자죠.

어떻게 언니의 언니가 될 순 없나요?

*

하나 더...


*

배추

김순희

배추는
속에 있는 아가가 춥다고
자꾸만
이불을 덮어준다




네꼬 2009-05-07 09:1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언니의 언니 너무너무 귀엽네요. 윤석중의 동시 동요 들은 지금 읽어도 전혀 예스럽지 않아요. 아니 이렇게 귀한 동시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어떻게,"에 담겨 있는 절박한 마음 알 것도 같아요. ㅋㅋㅋㅋ 저 근데 두 시를 읽다 보니까 "배추"가 언니 같아요. 동생은 언니의 언니가 되고 싶고 언니는 동생 이불을 덮어주고. (제멋대로구나~) 오즈마님이야말로 페이퍼 열 개 쓰는 약 있으면 내가 몰래 밥에 타서 먹이리.

무스탕 2009-05-04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삼 고양이가 글을 아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요 ^^

네꼬 2009-05-07 09:16   좋아요 0 | URL
저는 무스탕님이 제 친구여서 다행. :) 저 퍼스나콘 너무 예쁘다고 전에 제가 말씀 드렸죠?

kimji 2009-05-04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하는 강아지똥> 이벤트를 놓친게 영 아쉽습니다(제가 열심히 감기로 바쁠 때였군요). 그래도 님 페이퍼 아니었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 했어요. 덕분에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고맙습니다^^ 소개해준 시집 모두 보관함에 넣었어요. 매번, 주문할 때마다 한 권씩 사야겠어요!

네꼬 2009-05-07 09:18   좋아요 0 | URL
응? 지나간 이벤트가 있나요? 미리 듣기는 지금도 할 수 있는데... 가족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좋은 앨범입니다. 처음부터 틀어놓으면 마지막 곡까지 노래극을 감상할 수도 있고, 함께 달린 책으로 노랫말만 읽을 수도 있어요. 참 악보도 있어요. (이것 참.. 저는 길벗어린이 출판사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ㅠㅠ) 그나저나 감기는 어떠세요? 요맘 때 감기가 독해서 고생들 하던데. ♨

전호인 2009-05-0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지 않으면 사지도 않죠..ㅋㅋ
좋은 추천 완전감사 ^*^

네꼬 2009-05-07 09:19   좋아요 0 | URL
단골손님이시구나! ^^ 전호인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이용해주세요.(응?)

다락방 2009-05-0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저는 어떻게 하다가 네꼬님과 친구가 되었을까요? 하늘 아래 태어나 제가 한 짓 중 가장 잘한 짓이어요. 불끈!!

네꼬 2009-05-07 09:2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서재에서 마주친 거 오래간만인 거죠? 우리 손잡고 빙글빙글 5초만. (^^)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만, 저는 서재 안 들어올 때도 종종 (예를 들면 점심으로 순대국 먹을 때라든가..) 다락님 생각해요. 예쁜 아가씨를 사모하는 동네 건달 고양이 모드예요.

깜장고양이 2011-04-2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석중 동시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여기 알게 되어 글 남긴 거 오늘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인 거 같습니다. 야옹~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 - 2009
열린책들 편집부 엮음 / 열린책들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열린책들은 정말 좋은 출판사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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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네코무라 씨 하나
호시 요리코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품절 되기 전에 빨리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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