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큰다 큰다
기지개를 켤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떼를 쓰고 울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달음박질 할 때마다.

아기는 큰다 큰다
집집마다 동네마다. 
 


윤석중 「아기는 큰다 큰다」 (1948)



문학이라는 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좋아지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굳이 거슬러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예나 지금이나 작품들에는 편차가 있고 결정적으로 독자에 따라 호오가 갈리게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흐름을 되돌리고 싶은 장르가 있으니 바로 동시-동요다. 60년 전 동요의 “아기는 큰다 큰다 / 집집마다 동네마다”는 얼마나 간결하고 순박하며 따뜻하냔 말이다. 읽기도 외우기도 쉽고 노래를 붙이기도 쉽다. 게다가 자고 일어나는 것, 뛰어노는 것, 심지어 떼를 쓰는 것까지 어린이에겐 ‘크는 과정’이라는 통찰과 너그러운 시선을 보라지. ‘집집마다 동네마다’에 묻어있는 정겨움이란. 예쁜 노랫말이 주는 연둣빛 뚝뚝 떨어지는 감동은 다른 어떤 예술의 그것도 대신하지 못한다. 자, 이번 어린이날에는 진짜 동시와 동요를 읽어보아요. 
 

『날아라 새들아』(윤석중 동요선집, 창비 1983; 1991)
개정을 했다지만 본문의 서체와 책의 모양새가 약간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훌륭한 동요집을 여태 재개정하지 않은 창비가 서둘렀으면 좋겠지만 또 막상 이 책의 동요들을 읽다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화려한 요즘 동시집들에 비하면 촌스러워 보이지만, 시에 집중하기가 좋다. 그림이 간결하고 무엇보다 윤석중의 시 자체가 이미지를 떠올리기 좋은 덕분. 천여 편에 이른다는 윤석중의 작품들 중에서 추린 시가 무려 200여 편이다. “새 신을 신고 / 뛰어 보자 팔짝 /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 앵두 따다 실에 꿰어 / 목에다 걸고 / 검둥개야 너도 가자 / 냇가로 가자”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좁다란 학교길에 / 우산 세 개가 / 이마를 마주대고 / 걸어갑니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읽으며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노래를 부른 분들은 조용히 손을 듭니다. 어린 시절 조금쯤 윤석중에게 빚을 지셨군요. 갚으실 땝니다.
 

『귀뚜라미와 나와』(겨레아동문학연구회 엮음, 보리 1999)
‘한국 근대문학사의 횡재’라는 최원식의 추천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근대 아동문학의 성과를 정리한 ‘겨레아동문학선집’(전10권)은 한 권 한 권이 벅차게 귀하지만 나는 『귀뚜라미와 나와』를 특별히 좋아한다. “넣을 것 없어 / 걱정이던 / 호주머니는, // 겨울만 되면 /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윤동주, 호주머니-전문.) “방그죽 입을 벌린 밤송이에서 / 알암밤 형제가 내다봅니다 / 다람쥐 있나 없나 내다봅니다.” (현동염, 알암밤 형제.) “가갸 거겨 / 고교 구규 / 그기 가. // 라랴 러려 / 로료 루류 / 르리 라.” (한하운, 개구리-전문.) 정말 아무데나 펼쳐도 이런 시들 나온다. 신나는데 하나 더 읽어드릴까요? “비오는 날 / 빗방울들이 / 빨랫줄 위에서 / 동동동 / 줄타기 연습하오 // 뒤에 오는 / 빗방울 하나 / 앞선 놈 밀치다 / 뚜-욱-딱 / 둘이 다 떨어져요” (송창일, 빗방울-전문.) 
 


『할아버지 요강』(임길택, 보리 1995)
어느 평론가의 말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린이가 아니고서 동심을 가진 채로 시를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임길택의 시가 그 생각을 바꿔 놓았다’(원종찬의 『동화와 어린이』에 이런 내용의 문단이 있어요.) “마흔 여섯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했습니다”라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고 그저 착한 시, 또는 결연한 이념(?)시를 떠올려선 안 된다. “공부를 않고 / 놀기만 한다고 /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 잠을 자려는데 / 아버지가 슬그머니 /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자는 척 / 눈을 감고 있으니 / 아버지가 /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 미워서 / 말도 안 할려고 했는데 /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흔들리는 마음-전문) 

 


 『노래하는 강아지똥』 (권정생 원작, 백창우 지음, 길벗어린이 2009)
네꼬씨가 이렇게 동시를 좀 읽어달라고 애걸복걸해도 ‘그래도 어른이 쑥스럽게...’ 라는 생각이 든다거나, 둘레의 어린이가 아무리 시를 읽어도 별 감흥이 없어한다거나(물론 그럴 땐 그냥 억지로 읽히면 된다), 역시 둘레의 어린이가 ‘쏘리쏘리쏘리쏘리 내카내카내카 먼저’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못 봐주겠다거나, 아니면 그냥 색다른 (새로운) 음악을 들어보고 싶은 분들에게 맞춤한 책이 바로 지난주에 나왔다. ‘노래마을’과 ‘굴렁쇠아이들’을 이끄는 백창우. 복습해보자.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나이 서른에 우린’ 또 있다. ‘부치지 않은 편지’(김광석) ‘내 사람이여’(임동원/김광석) 그렇다, 바로 그 백창우다. 알려진 대로 백창우는 ‘아이들에게 아이들 노래를 돌려주자’는 취지로 많은 동요 앨범을 냈다. 이원수, 이문구 등의 동시에 노래를 붙이기도 했고, 전래동요를 되살렸으며, 스스로 동시를 쓰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노래하는 강아지똥』은 권정생의 「강아지똥」에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노래극의 형태로 들을 수 있는데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신나게, 때로는 슬프게 원작의 감동을 전한다. 알라딘에서 미리듣기 이벤트중이다( 요기서 ). 굴렁쇠 아이들이 노래를 많이 했고 백창우 자신이 내레이션을 하기도 했으며(듣고 있노라면 어째 울컥한다) 이홍렬 아저씨가 우정출연(?)한다. 진짜 되게 좋다. 
 



*
페이퍼의 제목 “물건이 좋지 않으면 권하지 않습니다”는 저의 완소 웹진 텐아시아 의 한 꼭지 10choice 카피에서 베껴왔어요. 텐아시아 자체가 제가 권하는 물건. 여러분, 네꼬씨는 물건이 좋지 않으면 권하지 않습니다. 싱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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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5-04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들지 않았더라면 추천도 하지 않았어요.ㅎㅎㅎ
훌륭한 동시집들이에요. 어휴, 지금 노래 듣고 있는데 완전히 신선하고 신나요. 네꼬님 표 추천 최고예요!

네꼬 2009-05-07 09:12   좋아요 0 | URL
백창우의 이번 앨범의 전의 것들보다 뭐랄까, 온가족이 함께 듣기 좋달까요. 저는 아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마노아님도 즐겁게 들으셨다니 야호예요. 호홋, 뿌듯해라.

코코죠 2009-05-0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아름다운 호객행위 고양이 같으니. 어쩌면 그 곰살맞은 발로 요로코롬 이쁜 글만 토닥토닥 쓰는지! 아아 얄미운 당신은 정말이지 "매일매일 페이퍼 10개씩 쓰는 약" 같은 독한 처방전이 필요한 낭만 고양이.
자, 저도 빚지고만 살 순 없으니 아끼는 동시를 털어놓겠어요.

*

언니의 언니

윤석중



난 밤낮 울 언니 입고 난
헌톨뱅이 찌꺼기 옷만 입는답니다.

아, 이, 조끼두 그렇죠,
아, 이, 바지두 그렇죠.
그리구, 이 책두 언니 다 배구 난 책이죠,
이 모자두 언니가, 적어 못쓰게 된 모자죠.

어떻게 언니의 언니가 될 순 없나요?

*

하나 더...


*

배추

김순희

배추는
속에 있는 아가가 춥다고
자꾸만
이불을 덮어준다




네꼬 2009-05-07 09:1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언니의 언니 너무너무 귀엽네요. 윤석중의 동시 동요 들은 지금 읽어도 전혀 예스럽지 않아요. 아니 이렇게 귀한 동시를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어떻게,"에 담겨 있는 절박한 마음 알 것도 같아요. ㅋㅋㅋㅋ 저 근데 두 시를 읽다 보니까 "배추"가 언니 같아요. 동생은 언니의 언니가 되고 싶고 언니는 동생 이불을 덮어주고. (제멋대로구나~) 오즈마님이야말로 페이퍼 열 개 쓰는 약 있으면 내가 몰래 밥에 타서 먹이리.

무스탕 2009-05-04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삼 고양이가 글을 아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요 ^^

네꼬 2009-05-07 09:16   좋아요 0 | URL
저는 무스탕님이 제 친구여서 다행. :) 저 퍼스나콘 너무 예쁘다고 전에 제가 말씀 드렸죠?

kimji 2009-05-04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하는 강아지똥> 이벤트를 놓친게 영 아쉽습니다(제가 열심히 감기로 바쁠 때였군요). 그래도 님 페이퍼 아니었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 했어요. 덕분에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고맙습니다^^ 소개해준 시집 모두 보관함에 넣었어요. 매번, 주문할 때마다 한 권씩 사야겠어요!

네꼬 2009-05-07 09:18   좋아요 0 | URL
응? 지나간 이벤트가 있나요? 미리 듣기는 지금도 할 수 있는데... 가족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좋은 앨범입니다. 처음부터 틀어놓으면 마지막 곡까지 노래극을 감상할 수도 있고, 함께 달린 책으로 노랫말만 읽을 수도 있어요. 참 악보도 있어요. (이것 참.. 저는 길벗어린이 출판사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ㅠㅠ) 그나저나 감기는 어떠세요? 요맘 때 감기가 독해서 고생들 하던데. ♨

전호인 2009-05-0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지 않으면 사지도 않죠..ㅋㅋ
좋은 추천 완전감사 ^*^

네꼬 2009-05-07 09:19   좋아요 0 | URL
단골손님이시구나! ^^ 전호인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이용해주세요.(응?)

다락방 2009-05-0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꼬님!!


저는 어떻게 하다가 네꼬님과 친구가 되었을까요? 하늘 아래 태어나 제가 한 짓 중 가장 잘한 짓이어요. 불끈!!

네꼬 2009-05-07 09:2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서재에서 마주친 거 오래간만인 거죠? 우리 손잡고 빙글빙글 5초만. (^^)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만, 저는 서재 안 들어올 때도 종종 (예를 들면 점심으로 순대국 먹을 때라든가..) 다락님 생각해요. 예쁜 아가씨를 사모하는 동네 건달 고양이 모드예요.

깜장고양이 2011-04-2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석중 동시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여기 알게 되어 글 남긴 거 오늘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인 거 같습니다.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