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까지 많이 바쁠 예정이라, 조금 일찍(?) 시작해볼까 하고 들었다. 1권은 얇군.. 하면서. 4권은 사야지.. 하면서. 경자년을 푸코로 마무리하게 되었다는 것은 대환영인데, 차분차분히 이해하면서 제대로 읽을 틈이 날 지 모르겠다. 암튼 일단 시작.
억압은 사라지라고 정죄하는 것으로뿐만 아니라 침묵하라는 명령, 실재하지 않는다는 단언, 따라서 그 모든 것에는 말할 것도 볼 것도 알 것도 없다는 확증으로 작용한다. 이런 식으로 균형을 잃고 위선의 논리에 빠진 부르주아 사회는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타협을 하게 된다. 비합법적 성생활에 정말로 자리를 내줄 필요가 있다면, 다른 곳에서, 즉 생산의 회로가 아니라면 적어도 이윤의 회로로 편입될 수 있는 곳에서 소동이 일도록 하라. 유곽과 요양원은 이와 같은 허용의 장소가 된다. (p11)
어찌 보면 성생활과 억압, 이것을 연결하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단순명료할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푸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푸코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는 거겠지. 그가 말하는 "억압의 가설"은 1) 성의 억압은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와 관계된 문제) 2) 권력의 메커니즘,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요컨대 억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역사-이론적 문제) 3) 억압을 겨냥하는 비판적 담론은 그때까지 이의없이 기능한 권력 메커니즘의 통로를 차단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억압'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하는 (그리고 아마 왜곡할) 것과 동일한 역사적 망(網)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일까? 억압의 시대와 억압의 비판적 분석 사이에 정말로 역사적 단절이 존재하는 것일까? (역사-정치적 문제)의 세 가지 의혹에서 출발한다 (p18). 흥미롭다.
어제 다 읽은 이 책의 말미에 이런 말이 있었다.
마지 피어시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p385)
그렇구나. 왠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구절이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서. 매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삶과 사랑이라니. 삶도 사랑도 그냥 그대로 쑥쑥 커나가는 것이 아니구나.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사랑은 어쩌지? 남녀 사랑만 사랑은 아니니... 인류를 새롭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자.. 라고 하려니, 아 트럼프의 소송 기사가 뜨네? 인류애 소멸. 그냥 내 반려 식물을 새롭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자.... 호프 자런의 책이 한 권 더 나와 있던데 읽어봐야겠다. 이 분, 이 <랩걸>에서 쓰다 만 얘기들이 정말 많아 보인다.
추워졌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스미는 요즘이다. 책읽기에 좋은 계절에, 일을 하는 나지만, 삶과 사랑을 새롭게 만들어내겠다는 일념으로 오늘 하루도 버텨보자. 이렇듯, 책은.. 내게.. 의지를 준다. 버텨낼 의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