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에 들어갔더니 남자 동기들이 청량리 588을 얘기했었다. 나는 처음에 뭔지 몰랐고 왜 그렇게 그 얘길 하면서 낮게 키득거리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왜 그러는 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게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왜 그걸 가지고 키득거리고 농짓거리를 하는 거지? ... 20대 때 첫 직장에 들어갔다. 몇 번 썼었는데.. 첫 직장의 남자들은 정말 저질인 사람이 많았다. 어쩌면 그게 그 시대 직장을 다녔던 중년 남자들의 민낯인 지도 모르겠다. 난 그들과 함께 있는 게 너무 싫었고 술자리에서 하는 성희롱의 언사들을 듣고 있으면 구역질이 났다. 책에서 접했던 상황들이, 그 당시 나는 남들보다 책을 훨씬 많이 읽어서 세상을 '좀더' 안다고 착각하던 때였는데도, 그들이 하는 말들이 내가 읽은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라는 것, 뭔가 구체적이고 살갗에 벌레가 앉아서 스물스물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아주 선명하게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읽는 것과 당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어쩄든, 어느날인가 남자 부장 한 명과 남자 대리 한 명과 내가 자동차를 몰아 출장을 가게 되었다. 운전면허증은 있었지만 차를 몰지 못했던 나는 대리가 모는 차 뒷칸에 앉아 앞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애써 무시하며 앉아 있었다. 경기도 북부쪽으로 가는 거였고 그 날따라 차가 막혔다. 그랬더니 대리가 "어쩔 수 없네." 하고는 운전대를 꺾어 원래 가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나야,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아니니 그냥 따라갈 밖에 없었고 그냥 멍하니 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지름길이라고 택한 곳이 청량리였다. 청량리역 뒷편 좁은 길가. 그 길은 너무 좁아서 더 막혔고 나는 속으로 어째서 이런 길을 택한 거야 하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바깥에는 허름한 낮은 집들이 보였고.. 여자들이 보였다. 대낮이었는데, 그 앞에 주차한 자가용들이 여러 대여서 여기저기 길을 막고 있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부장이 얼굴이 벌개져서는 말했다. "oo 대리,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막 흥분시키는 거야?".. 그러면서 둘이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거렸다. 키득. 키득.

 

밖에는 드문 드문 여자들이 서있었다. 대부분 다 늘어진 옷을 입고 혹은 딱 붙은 짧은 치마를 입고, 그냥 서 있었다. 지나가는 차를 보며, 퀭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문득 남자가 하나 지나가자, 한 여자가 그 남자를 잡았다. 남자가 뿌리치고 가자, 여자는 다시 서 있던 곳에 돌아와 담배를 물었다. 대낮인데.. 나는 마치 그런 일은 대낮에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인 양, 대낮에만 일어나지 않으면 되는 양, 생각하며 그 길을 지나쳤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들을 쳐다보며, 그 눈을 보며, 그 분위기를 느끼며 있던 시간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선명히 기억된다. 아마도 내가 처음 그 곳에 가 보아서였을 것이고, 그 시기의 앞과 뒤에 남자들이 했던 말들, 행동들이 중첩되어 이해라는 형태로, 그리고 그 뒤에 날아드는 분노라는 형태로 함께 기억되어서인게 아닌가 싶다.

 

"여성은 인간인가?" (p41)

 

 

2.

 

중학교 때 너무나 좋아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애들이 드문데, 그 아이는 수없는 책들을 읽으면서도 전혀 잘난 체를 하지 않는 아이였다. 나랑 절대 맞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아이가 좋았고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다 믿었다. 고등학교를 지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까지도 만나고 놀고 했었는데 여전히 나는 (아마도) 그 아이를 맹목적으로 좋아헀던 것 같다.

 

어느날인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때, 이화여대에는 여성학 석사과정이 있었고 (지금도 있나?) 어쩌다 그 얘기가 나왔는데 그 아이가 그랬다. "페미니즘은 아니야. 그건 휴머니즘이어야 한다고 봐. 그냥 페미니즘은 말도 안돼." 스쳐가듯 한 이야기가 내게 꽂힌 건, 그 이후에도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어야 한다고 한참 생각했던 건,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다 믿었기 때문이고.. .어쩌면 내가 여성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을 하지 않고 그냥 그 단어 그대로, 그 단어가 멋져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한참을, 그렇게 생각했다.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이, 사람이어야, 인간이어야, 인간취급을 받아야 휴머니즘을 얘기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이어야 할 수 있지?... 의문은 불신을 낳고 불신은.. 헤어짐을 낳는 것인지. 이제는 그 아이와 만나지 않게된 지 한참 되었다. 아주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 들은 것까지가 전부다. 잘 살면 된 게지. 다만, 이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참 시간이 지나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가 왔었는데 난 무덤덤히 반응하고 끊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여성에게 성적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반면, 남성은 행위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성애화된 사회는 불평등을 성별화한다... (중략) ... 사회 정치적으로 구성되지 않고 생물학적으로만 주어지는 섹스는 없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조건은 생물학적 조건보다 우선한다. 성적인 욕망은 욕구와 필요성의 상호 작용 속에서 구축된다. 남성이 여성의 몸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섹스는 문화의 사회적 구성물이며 성별 위계 질서의 정치적인 산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인 남성 권력의 조건이다. (p41)

 

 

3.

 

이 책을 처음 접할 때의 두려움은 이제 없다. 이 얘기를 이제 읽어야 할 때가 온 거다. 애써 외면했던 이유는 무얼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여러가지 치욕스럽고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웠던 여러 상황들이 이제 와 겹치는 게 싫었고, 그런 내가 매매춘을 하는 여성과는 (그나마) 다른 층위에 있다고 열심히 생각해온 나 자신의 부조리를 들춰내는 게 두려웠고, 무엇보다 이런 내용을 더 알게 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성을 이야기할 때, 모니크 위티그가 말했던, 하나만의 젠더로서의 여성을 이야기할 때, 섹스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음을, 이제쯤 되니 깨닫게 되고 그래서 이 책을 지금 읽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어쩌면 초기에 읽었다면, 내가 여성주의 책을 읽기 시작한 초기에 읽었다면, 난 나가 떨어졌을 것이다. 무서워서,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리고 너무나 비참해서. 그러나. 이제 읽을 수 있고, 정말 한줄 한줄 빼곡히 밑줄을 쳐가며 열심히 읽게 된다.

 

 

인간이 육체로 환원되고, 동의가 있건 없건 타인의 성적 서비스를 위한 도구로 화할 때, 거기에는 이미 인간에 대한 폭력이 자행된 것이다. (p43)

 

강간은 남성이 강취하는 것이다. 매춘에서 남성이 산 섹스는 그들이 강간으로 강취한 섹스와 같은 것이다. 이 섹스는 탈신체화(disembodiment)된 것이며, 남성을 위해,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몸 위에서 일어난 것이다. 돈을 지불하고 섹스를 할 것인지, 혹은 강제로 아니면 동의를 받고 할 것인지는 남성이 결정한다. (p59)

 

 

살인,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강간, 그리고 매매춘 자체는 비인간화된 섹슈얼리티의 결과이고 억압의 조건이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자유주의 법 구조가 언제 어디에서 폭력이 발생되었는지 여부를 결정한다고 할 때, 가부장적 억압을 통한 섹슈얼리티의 비인간화는 개인에게 발생한 폭력으로부터 분리된다. 원인과 결과가 분리된다. 지배는 계속된다. (p73)

 

 

좋은 책이다. 아무리 읽어도 주옥같다. 계속 읽어보자. 지금 80페이지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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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8-10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 좋은 책을 읽으셔서 그런걸까요, 비연님의 이 글도 너무 좋습니다. 항상 느끼는건데 비연님은 참 정리를 잘하세요. 제가 갖지 못한 면이라 매우 부럽습니다. 체계적인 글쓰기를 하시는 분..

2. 쪽수를 적어주셔 감사합니다. 21쪽인 제가 부끄럽다고 합니다.

3. 좋은 책을 함께 읽을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제가 골라서 더 행복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으쓱)

비연 2020-08-10 12:1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와락~ 이 책을 골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으쓱으쓱 여러번 해도 됩니다~^^
저는 다락방님의 솔직하면서도 명쾌한 글이 좋은데... 서로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거겠죠, 우리?
덥고 습하고 비가 왕창 왕창 계속 쏟아지는 여름이지만, 이 책과 함께 해서 너무 행복합니다~

수이 2020-08-10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이 밑줄 올리신 거 저도 지금 책 들춰보니 저도 모두 밑줄 쳤네요 ^^ 이번 책은 많은 것들을 들춰보게 만들 거 같아요, 걔들이랑 나랑은 달라, 이런 관점으로 냉소적으로 바라볼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순간 삐끗 하면 저들과 같은 집단이 될 수도 있다라는 불안감이 한동안 강하게 들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 길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하게 만든 이들에게도 함께 읽어보지 않으련 하고 말하고 싶어지구요. 친구 중에 고급 콜걸 일을 알바로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결국 그 길로 한번 들어선 후에 빠져나오지 못하더라구요. 재력가의 정부가 되어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지만 그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자괴감을 어떻게 해서든지 부수려고 엄청 노력하던데 그게 잘 안되더라구요.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책을 골라주신 락방님 으쓱으쓱 백만번 하셔도 될듯요.

비연 2020-08-10 13:48   좋아요 0 | URL
앗. 밑줄 친 게 같다니.. 우힝.. 넘 좋네요^^ 저도 이 책에서 저 자신과 제 주변에서 머리 안과 밖으로 벌어지는 부조리함이라든가 괴리라든가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건드려지기 싫은 부분들을 뚫어져라 쳐다 봐야 하는 느낌. 다시한번, 좋은 책임을 느껴요.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하게 하다니. 이 책이!

미미 2020-08-10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예요! 저도 읽어볼래요 이책.

비연 2020-08-10 14:27   좋아요 1 | URL
책은 더 좋답니다~ 추천에요^^ 함께 읽어 보아요~

공쟝쟝 2020-08-18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책읽기는 생각이 참 많아져서 진도가 참 안나가지는 것 같아요, 별하나에 사랑과 도 아니고 글 한 줄에 기억과, 또 한 줄에 상처와, 옛사랑과 엮이는. 좋은 리뷰 또 읽고 싶습니다!

비연 2020-08-23 23:33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을 이제야 봤네요... 정말이지 페미니즘 책읽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고 생각이 많아지고... 밑줄 긋느라 정신없구요... 이렇게 같이 읽어나가니 공유할 얘기도 많고.. 정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