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12. 장자에게 배운 아내 사랑


고소영과 장동건이 결혼할 때 생각나시나요? 장안이 떠들썩했죠. 팬들은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연인처럼 마음이 허무해지는 고통을 호소하고 위로를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연예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죠. 옛날 중국에 살았다던 한 사나이는 만나는 사람이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좋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를 본 여자들은 두 번째 부인이라도 좋으니 같이 살고 싶다고 부모들을 졸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그 남자가 그 나라에서 가장 못생긴 사나이였다는 겁니다. <장자>에 나오는 '애타타(哀駘它)'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 한 추남이 있는데 이름이 애타타라 합니다. 사내들이 그와 함께하면 사모하여 떠날 줄 모르고, 여인들이 그를 보면 부모에게 떼를 쓰길 '남의 처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하고, 수십 명의 여인들이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그가 무엇을 창도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다만 항상 화락하게 한다는 것뿐입니다. 군주나 대인의 자리도, 남을 죽음에서 구한 일도 없고, 녹이 많아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가망도 없으며 도리어 추하여 천하를 놀라게 할 뿐입니다. 화락할 뿐 어떤 주장도 없고 지혜도 드러나지 않는데도 남자고 여자고 간에 그 앞에 모여듭니다. 이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인이 그를 불러보았더니 과연 천하가 놀랄 만큼 추했으나 그와 함께 기거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과인은 그의 사람됨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도 못 되어 과인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마침 재상 자리가 비어 있어 그에게 국정을 맡기려 했습니다. 그는 번민하다가 후에 승낙은 했으나 마음으로는 사양하는 것 같았습니다. 과인은 부끄러웠으나 결국 나라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과인을 떠나 가버렸습니다. 과인은 슬픔에 잠겨 죽을 것 같습니다. 마치 나라에 더불어 즐거워할 사람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 <장자> 5-4

<장자>에는 장애인, 꼽추, 절름발이, 봉사, 미치광이 등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추남'도 단골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못 생기고, 추하고, 피하고 싶은 인물들을 통해서 선입견과 집착을 걷어내고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장자가 사용한 장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장자 시대에는 사람 목숨이 파리보다 더 천하게 취급받고, 어처구니 없는 명분으로 발꿈치를 잘려 절름발이가 된 사람이 유난히 많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극단적인 시대였기에 장자가 초인적인 힘으로 철학을 펼쳐냈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그런데 '애타타'라는 추남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나라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이 사모하게 만들었을까요? 아직은 비밀입니다. 애타타가 멋진 남자라면, 애타타를 탄생시킨 장자는 얼마나 멋진 남자일까요?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동양철학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 중에서 '장자'를 제외하고는 남자다운 사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했듯 '노자'는 개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에서 아내를 사랑한 남편 이야기를 통해서 동양철학이 부부의 문제, 특히 아내에 관한 문제를 무척 중시한다고 쓰고 싶지만 솔직히 부부에 대한 문제 중에서 모범으로 쓸 만한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앞서 소개했듯 공자와 공자의 아들은 모두 홀아비이고, 맹자는 아내 얘기는 하나도 안 했죠. 중국의 영웅 중에서 '오기'라는 장군은 아내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장군 승진을 위해서 제나라의 아내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오기는 팔에 심각한 상처가 난 병사의 고름을 직접 빨아서 치료를 해주었는데, 어느 날 병사의 아내가 오기를 찾아와 제발 자기 아이의 종기만은 입으로 빨리 말라고 호소를 합니다. 자기 남편이 오기 장군에게 감동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앞장섰다가 전사했는데, 아들까지 당신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는 거죠. 한비자의 아내 얘기도 유명한데, 어느 날 한비의 아내가 '제발 우리 남편에게 베 백 필만 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 옆에서 보던 한비가 백 필보다는 오백 필이나 천 필은 어떠냐고 묻자 아내는 '이보다 많으면 당신은 첩을 살 것'이니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는 거죠. 노자의 <도덕경>은 여성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드러내주었지만 여성과 남성의 화합에 대해서 공헌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나마 남성의 자기반성을 이끌어낸 것은 맹자였습니다. 남편의 반성문은 동양철학에서 무척 희귀하다는 점에서 보면 귀한 기록입니다. 

제나라에 아내와 첩을 한집에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이 외출을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돌아왔다. 아내가 음식을 준 사람이 누군지 물으면, 그는 한결같이 부귀한 사람들의 이름을 댔다. 아내가 첩에게 말했다. "남편이 외출을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은 뒤에 돌아와 그 음식을 준 사람을 물으면, 다들 부귀한 사람이었는데, 일찍이 멀쩡한 사람이 찾아 온 적이 없으니, 내가 남편이 가는 곳을 엿보려고 하네."
일찍 일어나서, 비스듬히 남편이 가는 데를 따라가니,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남편과 더불어 서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동쪽 성곽 분묘(墳墓) 사이에 제사지내는 사람에게 가서, 그들의 먹고 남은 음식을 빌어먹고, 부족하면 또 둘러보고 다른 곳으로 갔다. 이것이 실컷 먹고 만족하는 방법이었다. 그의 아내가 돌아와서 그의 첩에게 말했다. "남편이란 우리가 우러러보며 평생을 같이할 사람이다. 지금, 이 같은 꼴이라니!" 하고는 그 첩과 더불어 남편을 원망하면서 서로 뜰 가운데서 목 놓아 우는데, 남편이 이런 줄도 모르고는 으스대며 밖에서 들어와서, 아내와 첩에게 교만을 부렸다. 군자의 입장을 통하여 이를 본다면, 사람이 부귀와 영달을 추구하는 방법들이 그 아내와 첩을 수치스럽지 않게 하고, 서로 목 놓아 울지 않게 하는 것은 아주 드물 것이다. 
- <맹자> 8-33

어쩌면 이 구절은 우리 사회가 왜 정직이 실종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곳이 되었는지를 고발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들과 이야기할 때와 아버지들과 이야기할 때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어머니들과 이야기할 때는 공감을 위주로 대화가 흘러갑니다. 내 입장을 밝히거나 토론이 붙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들과 대화를 하면 논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판별하자는 이야기가 아닌데도 이성 중심의 대화가 됩니다. 남성들이 가득한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감정이 쉽게 무시되거나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군대 시절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나는 예전에는 이성과 감정 중에서 이성의 편이었습니다. 서양철학을 보다 보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 고대 철학자들은 육체와 감정을 극복의 대상으로 정해놓고 이야기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감정이 철학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르네상스 이후였습니다. 서양 역시 사상적으로 고리타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 역시 감정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은 점이 아쉽습니다. 철학의 화자가 대부분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장자'의 아내 생각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장자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 소재로서 아내를 데려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글에는 왠지 장자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장자의 부인이 죽어 혜자가 문상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사람이 더불어 살며 아들을 키우고 늙어 몸이 죽었다면 곡을 안 해도 될 것이오. 그렇지만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아내가 처음 죽었을 때는 나라고 어찌 슬픈 마음이 없었겠소? 그러나 아내의 시원을 살펴보니 본래 생명이란 없었소. 생명뿐 아니라 형체도 없었고 형체만이 아니라 기(氣)도 없었소. 무엇인가 혼돈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생겼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고, 형체 속에서 생명이 생겼소. 그리고 오늘은 다시 변해서 죽음이 된 것이오. 이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이 운행한ㄴ 것과 같을 뿐이오. 그런데 누군가 천지라는 거대한 방에 누워 잠을 자려 하는데 내가 소리를 지르며 곁에서 운다는 것은 천명을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소. 그래서 곡을 그친 것이오."
- <장자> 18-4

<장자>에는 상가(喪家)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것 역시 '슬픔의 공간'으로 규정된 곳을 장자가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장치로 활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장자는 고정관념을 파고들거든요.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참 장자답게 아내를 보내줬구나' 하는 생각을 한 사람은 나 하나만은 아니겠지요. 남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선배'들이 조언을 합니다. '그러다가 평생 아내한테 눌려 살 걸' 남편은 바짝 긴장이 돼 동료와 지인들의 조언을 듣습니다. 그렇게 조언을 듣고 와서 집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전쟁'입니다. 여자들의 남편 욕과 남자들의 아내 욕은 조금 다릅니다. 여자들의 남편 욕은 욕을 하는 순간 공감이 되며 사라져버리는 반면, 남자들의 아내 욕은 사라지지 않고 생명력이 길다는 점입니다. 집에 와서 꼭 반영되며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차라리  남자들이 만나서 아내의 사랑을 얻는 방법, 아내의 점수를 따는 방법, 가족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많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빠들은 이것 역시 집에 와서 실천하고 반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아빠가 아무리 가족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고, 가족과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아빠의 자리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타타'가 만나는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버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천자(天子)를 모시는 시녀가 되면 손톱을 다듬지 않고 귀를 뚫지 않습니다. 처를 얻은 자는 외근을 중지하고 공역을 시키지 않습니다. 이처럼 육체가 온전하면 오히려 족히 이처럼 하거늘 하물며 덕이 온전한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지금 애타타는 말도 없이 신뢰를 받고 아무런 공도 없이 사랑을 받았으며 남이 나라를 주면서도 받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라 하니 그는 반드시 온전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그 덕을 드러내지 않는 자일 것입니다.
- <장자> 5-4

아빠들은 가족을 만들었다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것을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드러내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으면서 더욱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빠가 만든 업적은 더욱 더 위대해집니다. 남자들이 만나면 주식 얘기나 부동산, 재테크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나는 남자에게 최고의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투자는 아내와 아이들,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확실한 보험이 없죠. 아줌마들과 집에서 남편에 대한 수다를 떨다가 무척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남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하는데, 순간 번쩍 하는 섬광이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남자, 늙어서 따뜻한 밥은 좀 얻어먹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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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1. 설득 당하는 기술

 

 

"아이와 단 둘이 있을 땐 느리게 가는 것에 개의치 않았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다른 부분을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빨라졌었나 봐요."

아이를 키우는 한 어머니와 메신저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에 어머니가 제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육아서와 아동심리학, 심지어 동양철학에 나와 있는 대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부모님이 있다면 그것은 신(神)이겠죠. 사람이니까 흔들린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마음 공부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공자의 한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회는 그의 마음이 석 달을 두고 인을 어기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도달할 따름이다."
- <논어> 6-6

아이가 심한 장난을 하면 부모님은 참지 못하고 아이를 혼냅니다. 때로는 크게 혼낼 때도 있습니다. 혼내 놓고 나면 맥 없이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후회를 합니다. '내일은 좀더 사랑해줘야지' '다음에는 좀 더 참아야지' 하지만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가고, 어느새 아이를 혼내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너무 자책하지는 마세요. 동양철학에서는 '당연한 마음의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맹자가 그 과정을 자못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우산(牛山)의 나무는 처음에는 무성하고 아름다웠다. 그것이 큰 나라의 교외에 있었기 때문에 도끼를 가진 사람들이 이를 찍어대니, 무성하게 자랄 수가 있겠는가? 밤낮으로 잘라는 바요, 비 이슬이 적셔 주는 바라, 싹과 가지가 돋아남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소와 양이 또 들어와서 그것을 뜯어먹었다. 그래서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되었다. 사람이 그 민둥산을 보고서는 처음부터 재목이 없었다고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라 하겠는가?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도,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으랴? 그 양심(良心)을 방치해 버리는 것은 역시 나무에다가 도끼를 대는 것과 같다. 하루 하루 이를 찍어내면, 무성하게 자랄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길러지는 양심과 새벽의 기운은 그 좋아하고 싫어함이 사람과 서로 근접하다는 것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대낮에 하는 행위가 또 이것(양심과 새벽기운)을 어지럽히고 없애버린다. 이것을 어지럽히는 일을 반복하면, 밤에 길러지는 기운은 존재할 수 없다. 밤에 길러지는 기운이 존재할 수 없다면, 그는 금수와 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가 금수와 같은 것을 보고서는 일찍이 재질이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성정(性情)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에 배양함을 얻으면, 어떤 사물이나 자라지 않음이 없고, 만약 그 배양함을 잃으면, 어떤 사물이나 소멸하지 않음이 없다. 공자는 '잡아주면 살아 남고, 버려 두면 없어진다. 출입에 일정한 시기가 없으니, 그 고향을 알지 못한다.'하셨으니, 바로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
- <맹자> 11-8

맹자는 모든 사람들이 밤과 새벽에는 맑은 기운이 충전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밤의 기운'[夜氣]라고 합니다. 하지만 낮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어지러워진다고 합니다. 아이를 야단칠 때는 미안한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다가 밤에 잠을 자거나 새벽에 깨서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 차분히 전날 있었던 일을 반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일종의 딜레마가 만들어집니다. 밤에는 충전되고 낮에는 방전되는 맑은 기운은 때로는 충전이 안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맑은 기운이 넘쳐서 어지러운 낮에도 튼튼하게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LTE 스마트폰은 밤에 충분히 충전을 해도 건전지가 빨리 떨어집니다. 그래서 낮에도 틈이 날 때마다 충전을 해줍니다. 마음의 맑은 기운도 똑같은 방식으로 충전할 수 있습니다. 틈틈이 시간의 속도를 줄이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거죠. 충전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단 한번의 충전으로 하루를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욕심이죠. 마음이 빨라지려고 할 때는 의식적으로 느리게 지연시키고, 주위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어서 흔들릴 때는 그것을 통해서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을 생각하십시오. 바야흐로 '영업의 시대'에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광고, 그리고 여러 매체들이 하는 설득술을 이겨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고대의 선비들이 생활했던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설득해야 했고, 죽지 않기 위해서 변명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공자는 급한 물살처럼 흘러나오는 설득의 말에 대해서 무척이나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자장이 현명함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물이 젖어들듯이 하는 은근한 참언이나 피부를 찌르는 듯한 하소연이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현명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물이 젖어들 듯이 하는 은근한 참언과 피부를 찌르는 듯한 하소연이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멀리 내다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논어> 12-6

가랑비에 옷 젖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설득과 피부에 몹시 와 닿아 마음이 넘어가버리는 하소연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교구나 전집을 파는 곳에서 설명을 좀 들어 보면 '이 사람들이 목숨 걸고 영업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책을 쓰고 책 팔러 다니는 영업자나 다름 없지만, 이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 안일하게 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부모님들이 설득이 안 되면 그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이 상황에서 무척 절묘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습니다. 지금부터 '설득 당하는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럴 듯하게 꾸민 달콤한 말은 덕을 어지럽히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그르친다."
- <논어> 15-26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듣기 좋은 말이나 잘하고 보기 좋게 태도나 꾸미는 자들 중에는 인한 이가 드물다."
- <논어> 1-3, 17-17 (2회 나옴)

유명한 교언영색(巧言令色)에 관한 구절이 논어에는 여러 번 나옵니다. 유가철학은 본질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이 지루해합니다. 춘추시대 유세가들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국어(國語)>라는 책과 전국시대 유세가들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책에 보면 제자백가와 각종 유세가들이 수도 없이 나오지만 공자와 맹자 같은 유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설득술로서 유학의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기 좋은 말'[巧言]이나 이단(異端)을 많이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비해 노자와 장자는 유가와 제자백가 학자들이 세워 놓은 원칙들을 모조리 부정(不定)해버리는 '부정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매력을 얻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동양철학의 말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전쟁'을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생각에 따르면 부지불식간에 설득이 된다면 그것은 옳은 방향이 아닙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동의를 하면 잘 된 결정입니다.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구 영업하시는 분들의 설명을 듣다 보면 귀신에 홀린 것처럼 나도 모르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지 않으셨나요? 그렇게 결제하고 나면 본전 생각이 자꾸 나서 아이를 더 채근하게 되죠. 그 다음 장면은 여러분도 예측이 될 것입니다. 맹자는 "마음속이 기뻐서 진실로 복종한다"(맹자3-3)고 말했습니다. 정말 좋은 설득은 듣는 사람이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나도 모르게 설득이 되어 버리는 방식의 설득은 오래 가지 못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모든 좋은 판단에는 '나'라는 요소가 들어 있고, 그것이 동양철학이 줄곧 이야기하는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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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우리 부모님 용돈 드리면 어떨까?"

어엿한 직장을 다니는 남편은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싶은 마음에 제안을 합니다. 그래도 지금 수입으로는 한달이 빠듯해서 더 이상 뺄 곳이 없는데 아내는 속 좋은 소리를 하는 남편이 답답합니다. '아직 우리 살림이 나아지지 않았는데 조금 기다렸다가 용돈 드리자'고 달래도 보고 설득도 해보지만 남편은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이 문제로 다투다가 서로 상처를 입었습니다. 며칠 후 아이가 평소 무척 갖고 싶어하던 교구가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육아 카페에 50% 할인을 해서 구매를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거절합니다.  지난 번에 분명히 구매를 하자고 협의했고 예산도 만들어놨는데 황당합니다. 아내는 지난 번 부모님 용돈 건으로 이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치사스럽다고 치를 떱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일상다반사를 동양철학에서는 과유불급(過猶不及)으로 설명합니다. 

자공이 여쭈었다. "사와 상은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지나치고, 상은 모자라지." "그러면 사가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이나 같다."
- <논어> 11-15

동양철학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절이라 그런지 중요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공자는 한탄하며 "도가 펼쳐지지 않는 까닭을 이제 알겠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구나. 도가 밝게 드러나지 못하는 까닭도 이제 알겠다. 어진 이는 지나치고 못난이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구나."(중용 4장)라고 합니다. 아내는 지나치게 사정을 잘 알고 남편은 사정에 어두울 때 서로 스트레스가 커집니다. 마치 도가 펼쳐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내는 답답하고 남편은 기분 나쁜 나머지 둘 다 손해 보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남편과 아내 사이에만 이런 갈등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는 더 심합니다. 자기가 해달라는 것을 거절당했을 때 아이는 이유를 막론하고 떼를 쓰거나 마구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경우의 공통점이 느껴지시나요? 이때도 역시 엄마가 이후 사정을 너무 뻔히 알기 때문에 사달이 생깁니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까닭은 엄마는 너무 앞서가고 남편과 아이들은 너무 뒤처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 나오더라도 상대방의 동의 과정을 통해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부정적인 감정이 격화돼 좋은 관계를 저해합니다. 아내와 엄마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짜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괴롭고 스트레스 받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백 걸음이 아니라 백 사람의 한 걸음'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동양철학에서 조언하는 대안은 '어리석음'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다. 그의 지혜로움은 누구나 따를 수 있으나, 그의 어리석음은 따를 수가 없다."
- <논어> 5-20

지혜를 배우기는 쉽지만 어리석음을 배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소풍 가면 일회용 카메라로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소풍이 끝나고 나서 사진관에 일회용 카메라를 맡기면 필름을 현상해 줍니다. 당시에는 필름 한 장 현상하는 데 100원~150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내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그땐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내 사진을 찍어주면 100원이든 150원이든 꼭 주라고 하면서 내가 사진을 찍고 건네줄 때는 사진값을 한푼도 받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어릴 적에 왜 그렇지 논리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되잖아요. 너무 이상하고 합리적이지 않고 어리석게 보이잖아요. 학창시절에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철이 좀 들고 나서는 이해가 되더라구요.  '너는 받지 말고 꼭 줘라.'는 말씀은 사실 미련한 거죠. 하지만 미련한 것 안에 오묘한 진리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 서당 훈장선생님이 해주신 중국여행 다녀온 이야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모임에서 단체로 중국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중국 현지에서 입국 신청서를 작성할 때 마을 이장님이 자기 이름을 한자로 못 쓰는 거예요.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한자로 제 이름도 못 쓴다는 소문이 돌까봐 두려워 이장님은 서당 훈장님께 한자를 물어봤습니다. 훈장님은 한문을 수십 년 동안 했으니 물어봐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이 때 훈장님의 답변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훈장님은 그 자리에서 이장님의 이름을 써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머니에서 훈장님의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보여 드렸습니다.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어요."

훈장님 당신도 당장 생각이 안 나서 주민등록증 보고 썼다면서 이장님을 안심시켜주셨습니다. 이장님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무사히(?) 입국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나이 드신 분들이라면 '어리석음의 지혜'를 저마다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어르신들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죠. 사진값을 받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당장 100원을 손해 보더라도 사진 값을 안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들을 말씀하신 것이고, 주민등록증을 꺼내 이장님을 보여드렸던 훈장님은 이장님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배려해 주신 거죠.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감정을 거스르는 행동을 '역린(逆鱗)을 건드린다'고 부릅니다. 용에게는 역린이라는 비늘이 있는데 이것을 잘못 건드리면 건드린 사람을 반드시 물어 죽인다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삼국지에 나온 유명한 계륵(鷄肋) 사건도 '어리석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조조의 부하인 양수(楊修)는 조조가 무심코 내뱉은 "오늘 암호는 계륵(鷄肋)으로 하게"라는 말에 직속부하들에게 철군 명령이 있을 것이니 짐을 꾸리게 했습니다. 먹자니 애매하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고기의 갈비뼈처럼 상황이 꼬인 답답한 심경을 포착한 것이지요. 평소 양수의 명석한 두뇌와 재치를 사랑하면서도 한편 시샘을 느끼던 조조는 양수가 자기 마음을 이번에도 귀신처럼 꿰뚫자 불같이 노하며 군심(軍心)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목을 벱니다. 양수가 화를 입은 것은 너무 똑똑했기 때문이죠. 장자는 미치광이 접여라는 인물을 통해서 '어린석음', '쓸모없음', '헛똑똑'에 대해 성토합니다. 

공자가 초나라에 가는데 초나라 광인 접여가 문 앞에서 놀다가 말했다. "봉이여! 봉이여! 어쩌다가 이처럼 덕이 쇠락했는가? 오는 세상은 기다리지 말고 가는 세상은 좇지 말라!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은 안민(安民)하지만 천하에 도가 없으면 성인은 안생(安生)한다네! 오늘날 시절은 형벌을 면할 자 드무니 복은 깃털보다 가벼운데 실을 줄 모르고 화는 대지보다 무거운데 피할 줄 모르네! 아서라! 그만두게! 남을 덕으로 다스리는 것을! 위태롭다! 위태롭다! 땅에 금을 긋고 달리네! 미혹된 가시밭길! 나의 가는 길 해치지 말라! 우리가 가는 좁은 길! 우리 발을 해치지 말라! 산(山) 나무는 스스로 적을 부르고 등잔불은 스스로 몸을 태운다. 계피는 먹을 수 있으므로 베이고 옻은 쓸 수 있으므로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유용한 것을 쓸 줄 알지만 무용한 것은 쓸 줄은 모르는구나!"
- <장자> 4-13

노자도 역시 "알면서 모르는 것이 최상이요 모르면서 안다 함이 병이다."(도덕경 71)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오묘한 어리석음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남편이 부모님 용돈을 드리겠다고 하면 남편의 뜻을 존중하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 의견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뜻이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꺾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아내 입장에서 볼 때는 '어리석은 결정'이지만 남편은 그 결정의 결과에 대해서 두고두고 가져가기 때문에 나중에 아내의 발언권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반대의 상황에서도 성립합니다. 만약 아내의 의견이 최선이었다면 당연히 결과도 그렇게 나오겠죠. 아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내복을 입고 가겠다고 하면 아이랑 싸울 게 아니라 내복을 입고 가겠다는 마음을 존중하되 내복을 입고 갔을 때 아이들이 놀리거나 추울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합니다. '엄마가 민준이 사랑하니까 민준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 이것 역시 엄마가 봤을 때는 '어리석은 결정'입니다. 그 결정에 대한 결과를 아이가 충분히 경험하고 나면 다음에는 엄마의 말을 더 귀담아 듣겠지요. 둘째 민서 같은 경우도 앉아서 우유를 먹지 않으려고 하는데, '편하게 먹어도 좋은데, 바른 자세로 앉아서 먹지 않으면 우유를 흘릴 거야.'하고 경고를 해줍니다. 일어서서 먹거나 돌아다니면서 먹으면 분명히 우유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예전에 이야기했던 것을 환기시키면 아이는 알아듣습니다. '어리석음'을 이용하는 전략은 엄마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엄마는 한 박자만 기다리면 됩니다. 이 한 박자를 기다리지 못해서 그 동안 엄청난 다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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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9. 노자가 말하는 아빠의 생존전략


노자 <도덕경>에 아빠는 없지만 엄마와 아기 이야기는 숱하게 나옵니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아빠 이야기나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 살펴봤지만 노자는 당최 아빠 생각이 없나 봅니다. 노자의 '엄마 예찬론' 들어보실래요?

큰 나라는 하류라, 천하가 모이는 자리요 천하의 암컷이다. 암컷은 가만히 있음으로써 수컷을 이기고 가만히 있음으로써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큰 나라를 얻는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는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얻고 어떤 나라는 아래에 있어서 얻는다. 큰 나라는 남을 함께 기르려고 하는데 지나지 않고 작은 나라는 들어가서 남을 섬기려고 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두 나라가 저마다 바라는 바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큰 나라가 마땅히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 노자, <도덕경> 61장

노자와 공자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노자와 공자의 생몰연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공자는 C551년~BC479년, 노자는 BC604년~BC531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노자에게 도에 대해서 물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자의 사상과 노자의 사상을 비교해 보면 노자가 공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음과 양 중에서 공자는 양, 노자는 음을 상징하고 여성과 남성 중에서 노자는 여성, 공자는 남성을 상징하는데, 노자가 볼 때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원인입니다. 세상이 공자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만큼 혼란이 심해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묵점 기세춘 선생 같은 학자들은 <도덕경>이 <논어> 이후에 완성된 것이고, 여러 명이 저술에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방각본 고전문학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완성된 것이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개인이 아니라 직책이거나 여러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도덕경>은 일대 혼란기를 살았던 민중들의 울분과 통찰이 담긴 철학으로 읽힙니다. 당시 민중들이 보기에 권력자들이나 지식인,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너무 편협해 보였던 거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장자>를 저술한 '장주'라는 철학자는 <도덕경>의 취지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언어로 노자의 철학을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장자를 노자의 주석가라는 주장도 나오는데, 엄밀히 보면 노자의 철학과 장자의 철학은 차이점도 많습니다. 노자의 철학에 동의하는 장자의 <장자>라는 책에는 공자와 노자가 대화를 나누는 우화가 담겨 있는데,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장자의 '소설'로 읽어 주십시오.

노담이 "어디 묻겠는데, 인의가 인간의 본성일까요?" 라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군자란 어질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의롭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의는 정말 인간의 본성입니다. 또 무엇을 할 게 있겠습니까?" 노담이 말했다. "묻겠는데, 무엇을 인의라 하는 거요?" 공자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즐기며 기뻐하고 널리 사랑하여 사심이 없는 것, 이것이 인의의 참모습입니다." 노담이 말했다. "아, 말세의 쓸모없는 소리로다. 저 널리 사랑한다는 따위는 너무도 먼 일이 아니겠소. 사심을 없앤다는 게 곧 사심이오. 당신이 만약 이 천하의 순박함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면 말이오. [저 자연을 보시오] 곧 천지에는 본래부터 일정한 법칙이 있고, 해와 달에는 애초부터 밝은 빛이 있으며, 별은 본래부터 하늘에 즐비하고, 새와 짐승은 애초부터 무리를 이루며, 나무들은 본래부터 대지에 서 있소. 당신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어도] 덕에 의거해서 행동하고 도를 따라서 걷고 있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오. [더 이상] 또 억지로 애써서 인의를 내걸고 북을 두드리며 도망자를 찾는 따위 짓을 어째서 할 필요가 있단 말이오? 아, 당신은 인간의 본성을 어지럽히고 있소."
- 장자, <장자> 13-8

'노담'은 노자의 다른 이름입니다. 공자는 고대의 가치를 회복해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개인적으로는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남성'입니다. "사십이나 오십이 되어도 성취한 바가 없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도 두려워할 게 못되는 사람이다."(논어9-22)라는 말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노자는 이와는 많이 다르죠. 노자가 <도덕경>에서 어떻게 엄마를 찬양하고 아빠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지 가정생활과 육아의 관점에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가사와 육아. 이 두 글자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엄마라면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사와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아빠들은 어느 정도 추측만 할 뿐이죠. 집안일은 무한반복됩니다.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나요? 요리도 해야 하고,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 입맛에 맞게 바꿔줘야 하고, 먹고 나면 설거지도 해야 합니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사람 수만큼 빨래가 쌓이는데 세탁기 돌리고 탁탁 털어 널고 마르면 걷어서 개킨 다음에 꺼내 입을 수 있도록 자리에 놓아야만 옷을 다시 꺼내 입을 수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 일반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는 쌓여만 갑니다. 틈틈이 쓸고 닦고 청소하지 않거나, 이불을 털어서 일광욕을 시켜주지 않으면 어김없이 아이들이 콜록콜록 기침하고 열이 납니다. 아이가 어리면 이런 주사 저런 주사를 맞으러 다녀야 하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크고 작은 '앓이'를 하면 병원에도 자주 갑니다. 반복되는 일을 한번이라도 넘기면 악취와 아비귀환이 벌어집니다. 자기 옷을 찾아서 헤매는 아이들, 양말을 못 찾아서 방황하는 아빠들. <돼지책>이라는 그림책을 보면 집안일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홀로 우뚝 서서 바뀔 줄을 모르고 두루 행하되 잠시도 쉬지를 않으니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도덕경 25장)는 구절은 마치 고단한 엄마의 심정을 알고 한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엄마가 있는 집에서는 마치 자동으로 모든 집안의 사물들과 옷가지와 음식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엄마의 노동이 다 들어간 거죠. 그래서 가정이 편안해집니다. 남편이든 아이들이든 모두 집안의 엄마에게 의존을 하고 있습니다.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고마워하기보다는 당연하게 여기죠. 이렇게 엄마는 집안의 주인이 됩니다. 일을 하면 주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되는 게 인생의 법칙이니까요. 

강과 바다가 넉넉히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은 그것들 아래에 있기 때문이요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백성 위에 오르고자 할 때에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할 때에 반드시 몸을 뒤에 둔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백성 위에 오르지만 그들이 무거워하지 않고 백성 앞에 서지만 그들이 해를 입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온 세상이 그를 기꺼이 받들어 모시되 싫어하지 않거니와 다투지를 않으므로 세상이 그를 상대하여 다툴 자가 없다.
- 노자, <도덕경> 66장

아빠들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회사 생활 힘들다, 때려 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집안 일하랴 아이들 돌보랴 가뜩이나 힘든 엄마에게 아빠의 '회사 때려 치겠다'는 말은 무척 스트레스를 줍니다. 아빠가 회사 일 힘들다고 말할 때는, 회사 일을 하는 자신에 대한 은근한 과시가 담겨 있습니다. 푸념조로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의 과시가 있는 거죠.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합시다! 노자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옳다 하는 자는 인정받지 못하며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도에서는 일컬어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 하여 도는 언제나 이것들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를 지닌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 노자, <도덕경> 24장

지금도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는 남편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자가 볼 때 이런 모습은 허무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아빠의 권위가 얼마나 갈 것 같으신가요? 가정의 권력관계는 생명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중심으로 힘이 이동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가장 많이 돌보고 아이가 편안해하는 사람이 이른바 '실세'가 됩니다. 아이가 편안해하는 사람이 꼭 엄마일 필요는 없지만, 아빠가 그렇게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도덕경>에는 집안에서 큰소리치고, 유세 부리고, 권위를 내세우는 아버지에게 경고를 해놓은 구절이 무척 많습니다. 두 개만 소개합니다. 

자연은 거의 말이 없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 누가 이러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이 이렇게 오래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 노자, <도덕경> 23장

모든 사물은 강장(强壯)해지면 노쇠하니 이를 일컬어 도에 어긋난다고 하거니와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난다. 
- 노자, <도덕경> 30장

나는 <도덕경>을 읽으면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생존전략을 찾았습니다. 아빠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포지셔닝, '신의 한 수'는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인 남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석 시인의 '오라 망아지 토끼'라는 시에는 압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린 백석이 망아지를 달라고 조르면 아버지는 길가에서 "매지('망아지'의 함경도 방언)야 오나라, 매지야 오나라"를 커다랗게 외치며 아이의 마음을 달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백석 시 곳곳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나는 백석의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다정다감하긴 했지만 어머니에게는 권위적이었습니다. 집에서 목소리를 높일 때가 많으셨죠.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기가 꺾이고 영향력이 어머니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편과 아버지가 젊고 힘이 있을 때 해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 가족들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 살, 다섯 살인 아이들인 20년쯤 지났을 때는 저보다 힘이 강성해질 것입니다. 그때 약해진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아이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할까? 그것은 지금의 나 하기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랍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눌려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철학적으로 확정해준 사람이 바로 노자입니다. 아빠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아빠에게 살 길을 마련해준 노자는 역시 요물입니다. 아빠들을 들었다 놨다 하거든요. 강한 것은 곧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말이거든요. 약하고 부드럽고 낮은 것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양의 족속들', 즉 강하고, 남성적이고, 지위가 있고, 경제력이 있고, 여러 가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생존할 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한 노자의 말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지며 만물 초목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다가 죽으면 바싹 말라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이런 까닭에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나니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있다. 
- 노자, <도덕경> 7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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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9. 노자가 말하는 아빠의 생존전략


노자 <도덕경>에 아빠는 없지만 엄마와 아기 이야기는 숱하게 나옵니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아빠 이야기나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 살펴봤지만 노자는 당최 아빠 생각이 없나 봅니다. 노자의 '엄마 예찬론' 들어보실래요?

큰 나라는 하류라, 천하가 모이는 자리요 천하의 암컷이다. 암컷은 가만히 있음으로써 수컷을 이기고 가만히 있음으로써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큰 나라를 얻는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는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얻고 어떤 나라는 아래에 있어서 얻는다. 큰 나라는 남을 함께 기르려고 하는데 지나지 않고 작은 나라는 들어가서 남을 섬기려고 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두 나라가 저마다 바라는 바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큰 나라가 마땅히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 노자, <도덕경> 61장

노자와 공자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노자와 공자의 생몰연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공자는 C551년~BC479년, 노자는 BC604년~BC531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노자에게 도에 대해서 물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자의 사상과 노자의 사상을 비교해 보면 노자가 공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음과 양 중에서 공자는 양, 노자는 음을 상징하고 여성과 남성 중에서 노자는 여성, 공자는 남성을 상징하는데, 노자가 볼 때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원인입니다. 세상이 공자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만큼 혼란이 심해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묵점 기세춘 선생 같은 학자들은 <도덕경>이 <논어> 이후에 완성된 것이고, 여러 명이 저술에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방각본 고전문학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완성된 것이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개인이 아니라 직책이거나 여러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도덕경>은 일대 혼란기를 살았던 민중들의 울분과 통찰이 담긴 철학으로 읽힙니다. 당시 민중들이 보기에 권력자들이나 지식인,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너무 편협해 보였던 거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장자>를 저술한 '장주'라는 철학자는 <도덕경>의 취지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언어로 노자의 철학을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장자를 노자의 주석가라는 주장도 나오는데, 엄밀히 보면 노자의 철학과 장자의 철학은 차이점도 많습니다. 노자의 철학에 동의하는 장자의 <장자>라는 책에는 공자와 노자가 대화를 나누는 우화가 담겨 있는데,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장자의 '소설'로 읽어 주십시오.

노담이 "어디 묻겠는데, 인의가 인간의 본성일까요?" 라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군자란 어질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의롭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의는 정말 인간의 본성입니다. 또 무엇을 할 게 있겠습니까?" 노담이 말했다. "묻겠는데, 무엇을 인의라 하는 거요?" 공자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즐기며 기뻐하고 널리 사랑하여 사심이 없는 것, 이것이 인의의 참모습입니다." 노담이 말했다. "아, 말세의 쓸모없는 소리로다. 저 널리 사랑한다는 따위는 너무도 먼 일이 아니겠소. 사심을 없앤다는 게 곧 사심이오. 당신이 만약 이 천하의 순박함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면 말이오. [저 자연을 보시오] 곧 천지에는 본래부터 일정한 법칙이 있고, 해와 달에는 애초부터 밝은 빛이 있으며, 별은 본래부터 하늘에 즐비하고, 새와 짐승은 애초부터 무리를 이루며, 나무들은 본래부터 대지에 서 있소. 당신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어도] 덕에 의거해서 행동하고 도를 따라서 걷고 있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오. [더 이상] 또 억지로 애써서 인의를 내걸고 북을 두드리며 도망자를 찾는 따위 짓을 어째서 할 필요가 있단 말이오? 아, 당신은 인간의 본성을 어지럽히고 있소."
- 장자, <장자> 13-8

'노담'은 노자의 다른 이름입니다. 공자는 고대의 가치를 회복해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개인적으로는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남성'입니다. "사십이나 오십이 되어도 성취한 바가 없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도 두려워할 게 못되는 사람이다."(논어9-22)라는 말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노자는 이와는 많이 다르죠. 노자가 <도덕경>에서 어떻게 엄마를 찬양하고 아빠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지 가정생활과 육아의 관점에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가사와 육아. 이 두 글자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엄마라면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사와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아빠들은 어느 정도 추측만 할 뿐이죠. 집안일은 무한반복됩니다.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나요? 요리도 해야 하고,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 입맛에 맞게 바꿔줘야 하고, 먹고 나면 설거지도 해야 합니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사람 수만큼 빨래가 쌓이는데 세탁기 돌리고 탁탁 털어 널고 마르면 걷어서 개킨 다음에 꺼내 입을 수 있도록 자리에 놓아야만 옷을 다시 꺼내 입을 수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 일반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는 쌓여만 갑니다. 틈틈이 쓸고 닦고 청소하지 않거나, 이불을 털어서 일광욕을 시켜주지 않으면 어김없이 아이들이 콜록콜록 기침하고 열이 납니다. 아이가 어리면 이런 주사 저런 주사를 맞으러 다녀야 하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크고 작은 '앓이'를 하면 병원에도 자주 갑니다. 반복되는 일을 한번이라도 넘기면 악취와 아비귀환이 벌어집니다. 자기 옷을 찾아서 헤매는 아이들, 양말을 못 찾아서 방황하는 아빠들. <돼지책>이라는 그림책을 보면 집안일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홀로 우뚝 서서 바뀔 줄을 모르고 두루 행하되 잠시도 쉬지를 않으니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도덕경 25장)는 구절은 마치 고단한 엄마의 심정을 알고 한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엄마가 있는 집에서는 마치 자동으로 모든 집안의 사물들과 옷가지와 음식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엄마의 노동이 다 들어간 거죠. 그래서 가정이 편안해집니다. 남편이든 아이들이든 모두 집안의 엄마에게 의존을 하고 있습니다.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고마워하기보다는 당연하게 여기죠. 이렇게 엄마는 집안의 주인이 됩니다. 일을 하면 주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되는 게 인생의 법칙이니까요. 

강과 바다가 넉넉히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은 그것들 아래에 있기 때문이요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백성 위에 오르고자 할 때에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할 때에 반드시 몸을 뒤에 둔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백성 위에 오르지만 그들이 무거워하지 않고 백성 앞에 서지만 그들이 해를 입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온 세상이 그를 기꺼이 받들어 모시되 싫어하지 않거니와 다투지를 않으므로 세상이 그를 상대하여 다툴 자가 없다.
- 노자, <도덕경> 66장

아빠들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회사 생활 힘들다, 때려 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집안 일하랴 아이들 돌보랴 가뜩이나 힘든 엄마에게 아빠의 '회사 때려 치겠다'는 말은 무척 스트레스를 줍니다. 아빠가 회사 일 힘들다고 말할 때는, 회사 일을 하는 자신에 대한 은근한 과시가 담겨 있습니다. 푸념조로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의 과시가 있는 거죠.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합시다! 노자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옳다 하는 자는 인정받지 못하며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도에서는 일컬어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 하여 도는 언제나 이것들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를 지닌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 노자, <도덕경> 24장

지금도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는 남편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자가 볼 때 이런 모습은 허무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아빠의 권위가 얼마나 갈 것 같으신가요? 가정의 권력관계는 생명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중심으로 힘이 이동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가장 많이 돌보고 아이가 편안해하는 사람이 이른바 '실세'가 됩니다. 아이가 편안해하는 사람이 꼭 엄마일 필요는 없지만, 아빠가 그렇게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도덕경>에는 집안에서 큰소리치고, 유세 부리고, 권위를 내세우는 아버지에게 경고를 해놓은 구절이 무척 많습니다. 두 개만 소개합니다. 

자연은 거의 말이 없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 누가 이러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이 이렇게 오래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 노자, <도덕경> 23장

모든 사물은 강장(强壯)해지면 노쇠하니 이를 일컬어 도에 어긋난다고 하거니와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난다. 
- 노자, <도덕경> 30장

나는 <도덕경>을 읽으면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생존전략을 찾았습니다. 아빠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포지셔닝, '신의 한 수'는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인 남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석 시인의 '오라 망아지 토끼'라는 시에는 압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린 백석이 망아지를 달라고 조르면 아버지는 길가에서 "매지('망아지'의 함경도 방언)야 오나라, 매지야 오나라"를 커다랗게 외치며 아이의 마음을 달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백석 시 곳곳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나는 백석의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다정다감하긴 했지만 어머니에게는 권위적이었습니다. 집에서 목소리를 높일 때가 많으셨죠.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기가 꺾이고 영향력이 어머니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편과 아버지가 젊고 힘이 있을 때 해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 가족들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 살, 다섯 살인 아이들인 20년쯤 지났을 때는 저보다 힘이 강성해질 것입니다. 그때 약해진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아이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할까? 그것은 지금의 나 하기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랍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눌려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철학적으로 확정해준 사람이 바로 노자입니다. 아빠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아빠에게 살 길을 마련해준 노자는 역시 요물입니다. 아빠들을 들었다 놨다 하거든요. 강한 것은 곧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말이거든요. 약하고 부드럽고 낮은 것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양의 족속들', 즉 강하고, 남성적이고, 지위가 있고, 경제력이 있고, 여러 가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생존할 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한 노자의 말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지며 만물 초목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다가 죽으면 바싹 말라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이런 까닭에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나니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있다. 
- 노자, <도덕경> 7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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