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8. 연애와 육아의 공통점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만화책이었습니다. 지금도 만화책을 치워버리는 부모님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화책으로 세상을 배운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나는 지금도 틈틈이 만화책을 봅니다. 만화책을 찾는 까닭은 재미도 재미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진리’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재밌게 읽었던 <마스터 키튼>이라는 만화에는 명탐정 배넘 부인이 나오는데 특유의 추리력으로 주인공 '마스터 키튼'을 능가합니다. 키튼에게 “당신은 아직 멀었수.”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이 분이 육아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배넘 부인 : 명탐정이 될 비결을 가르쳐 드릴까요?
마스터 키튼 : 네?
배넘 부인 : 연애를 많이 할 것!
마스터 키튼 : 네에….
- <마스터 키튼> 16. 루너딜의 석양





사랑은 한편으로는 유치하고 한편으로는 톡 쏘는 맛입니다. 연애도 그렇죠. 연애 전문 용어 중에 ‘밀땅’이 있습니다. 밀고 당기기의 줄임말이죠. 감정의 신축과 이완을 이용해서 그야말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기술이 밀땅인데, 연애 고수들은 반드시 익혀야 하는 필수 과목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와서 “제발 저랑 결혼해 주세요. 당신을 위해서 내 한몸 바칠게요. 뭐든 해드릴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매달린다면 당신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실 건가요? 이 질문을 받은 분들은 모두 거절하겠다고 했습니다. 거절의 이유는 “내가 왠지 손해보는 장사인 것 같아서.” “너무 매달리면 재미없어서.” 등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 매달리는 남자, 누구랑 닮지 않았나요? 아이들을 대하는 엄마와 아빠가 아이들에게 저렇게 비춰진다면 어떠시겠습니까? 사람은 재미와 긴장을 추구하고, 아이들은 더 하기 때문에 지루하게 만들면 교육 효과가 떨어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효율성이 떨어지는 말이 ‘잔소리’라고 누군가 말하더군요. 연애할 때의 감정을 최대한 동원해서 육아를 한다면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연애든 육아든 사람과의 관계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고, 희노애락이 있는 드라마라는 점에서 쌍둥이와 같죠. 공자도 맹자도 밀땅을 즐겼습니다. 공자의 수제자 안연의 고백을 통해서 공자가 얼마나 ‘밀고 당기기’의 달인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안연이 한숨지으며 말하였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며, 바라보면 앞에 계시는 듯하더니, 홀연히 뒤에 계신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유도해 주시어, 학문으로써 우리를 넓혀 주시고, 예로써 우리를 단속해 주신다.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어, 나의 재능을 다하고 나니, 자신 속에 우뚝 선 바가 있는 듯하다. 비록 선생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고자 하나, 찾아 들어갈 수가 없다." 
- 논어9-10

공자에 대한 평가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글인데, 때로는 공자가 마치 신(神)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신적인 요소를 제거하면 순수한 ‘밀땅’을 볼 수 있습니다. 공자 선생님이 자신을 밀고 조이고 앞에 갔다 뒤에 왔다 하니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고 그만둘 수도 없었던 안연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공자는 연애의 기술을 교육에 적용한 경우입니다. 내 강의를 무척이나 집중해서 듣던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척 권위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신은 아이에게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대요. 그런데 너무 강한 신념을 가져서 그런지 아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아이가 엄마를 발로 차거나 심한 장난을 치면 어떻게 하세요?” 하고 물어 봤더니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 ‘하지마 아파’ 한데요. 나는 이 분께 ‘밀땅’의 기술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아이가 심한 장난을 할 때는 엄격한 표정으로 “안 돼!”하고 따끔하게 말하면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 해집니다. 이 분위기가 계속 되면 아이가 주눅 들 수 있으니 다시 다정다감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엄마랑 장난 치고 싶었어? 우리 배게 놀이 할까?” 하면서 이완을 시켜줍니다. 그 어머니가 집에서 직접 해보고 나서 효과가 있었다고 말해줬습니다. 다만, 그 다음부터는 어머니가 자신의 방법으로 응용하고 업데이트를 해줘야 합니다. 육아는 바이러스와 백신의 관계와 같습니다. 좋은 백신을 소개 받아서 바이러스 치료를 할 수 있지만, 바이러스 또한 가만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스스로를 진화시키면서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부모님 강의 할 때 연애 이야기를 예시로 드는데, 그 때마다 졸던 분들도 눈이 반짝 반짝 빛납니다. 그게 바로 연애의 힘이 아닐까요? 이번에는 좀 재미있는 밀땅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공자께서 무명에 가셨는데 현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느냐?" 자유가 대꾸하였다. "전에 제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들었는데,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다스리기 쉽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언(偃)의 말이 옳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
- 논어17-4

'언'은 자유의 이름입니다. 가족이 생활하다 보면 인상 쓸 일이 많습니다. 가끔 생각지도 않았던 농담을 던지면 분위기가 달라지죠. 요즘은 특히 ‘연예감’이나 ‘개그감’이 강조되는데, 바로 ‘재미’가 삶의 활력소이기 때문입니다. ‘재미’는 아이들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장난감을 만들어냅니다. 둘째 민서가 간밤에 열이 있어서 해열제를 먹였는데, 다음날 어린이집에서 풍선으로 허리띠를 만들어서 허리에 둘러 왔습니다. 풍선 허리띠 틈에 해열제통을 넣어서 칼처럼 휘둘렀습니다. 이번에는 밀땅을 통해서 교육을 시킨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자가 제나라를 떠나 시내에 머물렀다. 어떤 사람이 제나라 왕을 위해 맹자의 떠나지 못하게 만류하러 찾아와 꿇어앉아 말을 했으나, 맹자는 대답도 않고 침대에 기대어 누웠다. 
손님은 얹짢아 하며 말했다. "제자가 목욕재계한 뒤에 감히 말씀드리는데, 선생님은 누우시고 듣지도 않으시니, 다시는 감히 뵙지 않겠습니다." 
맹자가 말했다. "편히 앉으시오. 내가 분명히 그대에게 말하겠소. 옛날 노목공은 자사의 곁에 사람이 없으면, 자사를 안심시킬 수 없었고, 예류와 신상은 목공의 곁에 사람이 없으면, 그들 자신을 편안하게 할 수 없었소. 당신이 나이든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있으나, (목공이) 자사를 만류한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니, 그대가 나이든 사람을 거절한 것이오? 나이든 사람이 그대를 거절한 것이오?"
- 맹자4-11

맹자를 만류하러 찾아온 사람에게 진정 제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만류하는 것인지, 아니면 맹자를 만류한 공로를 차지하기 위한 욕심으로 만류하는 것인지 밀땅의 기술로 물어본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말로서 설득할 수 있고, 말이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고대의 스승들은 그 사람들 머리 위에 있었습니다. 말로 안 되면 행동이나 농담이나 밀고 당기기의 기술로 뜻을 전달하는 데 달인이었습니다. 맹자가 드러누운 것은 요즘 말로 하면 ‘비언어 소통 방법’입니다. 육아를 할 때 비언어가 참으로 중요한데 미국 UCLA 대학의 명예 교수인 알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의 연구에 의하면 완전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가 잘 어우러져야 된다고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언어적인 요소보다 비언어적 요소가 절반이 넘는 55%를 차지한다고 하는데, 비언어적인 요소로는 얼굴 표정, 시선, 눈 맞춤의 정도, 몸의 자세, 태도, 몸놀림, 숨결의 정도 등이 포함됩니다. 이런 표현 방식은 연애를 할 때 무척이나 활성화됩니다. 마셜 매클루언은 연인들끼리 대화할 때는 말을 더듬는다고 하는데, 사랑의 감정은 여러 감각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말이 필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 1년 정도(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아내는 아이와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연애할 때 나를 보던 눈빛을 아이에게 보내니 남편으로서는 섭섭하고 아기에게 질투가 날 수도 있겠지요. 맹자는 “먹여주고서도 사랑하지 않으면, 개를 먹이는 것같이 그를 대하는 것”(13-3)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배우자와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지 얼마나 되었나요? 사랑하는 마음이 강할 때 사랑한다는 말로 나타납니다.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으면 사랑의 마음이 크다고 할 수 없고, 실제로 크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배우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사랑이 바닥난 경우가 참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랑이나 연애감정이란 것이 물잔처럼 비는 게 아니라, 풀 베는 예초 기계처럼 먼지가 덮여 있을 뿐이므로 먼지를 걷어내고 조금만 수리하면 금방 되살아나는 감정입니다. 가족들에게 ‘칭찬놀이’를 하게 하면서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처음에 부모님들은 “내 아이에게 칭찬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뭘 칭찬하라는 거죠?”라는 항의를 했지만, 나는 “칭찬할 게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칭찬하세요.”하고 맞섰습니다. 아이들이 써 낸 책놀이 종이에 부모님 대신 칭찬을 하는 일을 한동안 했습니다. 부모님들은 조금씩 칭찬에 눈을 떴습니다. 나중에 부모님들이 나에게 고맙다고 한 말 중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칭찬놀이를 통해서 아이를 다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입니다. ('칭찬놀이'의 사례와 방법은 졸저 <책 놀이 책>을 참조하세요) 가족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일 때 종이를 펼쳐 놓고 서로 칭찬을 한번 적어보세요. 사랑의 감정 위에 아무리 오랫동안 시간의 먼지가 쌓였다고 하더라도 툭툭 털면 그 온도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연애 적 추억을 떠올리며 부부생활과 육아를 연애하듯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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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7. 정지 신호를 잘 지키면 육아의 길이 행복해진다


동양철학을 읽기가 쉽지 않은 까닭은 ‘첫 구절’부터 내용이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예 ‘동양철학의 첫 구절을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쓸 때 제목이나 소제목 같은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글을 시작할 때 주제를 충분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논어>나 <맹자> 같은 경전의 소제목은 글이 시작하는 단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첫 구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경전 <대학>은 '큰 배움'이라는 뜻이지만 모든 교육자와 부모님들께 '교육'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첫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그치는 데에 있다. – 대학경문


밝은 덕을 밝힌다는 명명덕(明明德)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고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왜 밝을 명(明)이 두 번 들어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인문학인데, 밝은 덕이란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잘 들여다 보면 밝은 덕의 요소가 있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맑은 마음, 또를 밝은 도리가 있는데 이걸 명확히 확인시켜주는 게 명명덕의 정신입니다. 예컨대 아이가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으려고 할 때 부모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는 눈에 보이는 음식을 왜 먹어서는 안 되는지 몰라서 부모에게 “왜?”하고 물어봅니다. 


“땅에 떨어진 것 먹으면 아파.” 

- 왜? 

“아프면 병원 가야 해.”

- 왜? 


이렇게 아이의 질문이 반복되면 부모는 슬슬 짜증이 나며 “먹지 마!”하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아이가 장난으로 자꾸 물어보는 경우도 있는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왜?’ 하고 물어봐주는 아이가 정말 예쁜 아이 아닌가요? “네가 땅에 떨어진 것 먹고 병원 가면 아빠 마음이 아파. 아빠 마음이 아프면 좋겠어?” 하고 되물으면 아이는 “아니!”하고 대답하며 땅에 떨어진 음식으로부터 관심을 끊습니다. 아이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밝혀 주는 것이 명명덕입니다. 엄마가 뭔가를 잘못 말하거나, 오해해서 혼내고 나서 나중에 사과하는 것도 일종의 명명덕입니다. 아이는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이는 알 거라고 생각하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가끔 아이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 빈 그릇에 물을 붓듯이 영어를 가르치면 영어가 쌓이고, 과학을 가르치면 과학이 쌓인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에게서 배웁니다. 책을 오래 읽은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읽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치 아이를 '반쯤 켜진 전구'로 보고 나머지 스위치를 찾아서 켜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요? 아이의 인식 수준을 마음속으로 어림해서 행동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의 양심에 물어보고 최선의 대답을 해줍니다. 


재신민(在新民)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달려 있다는 뜻인데, 여기서 ‘백성’을 ‘아이’ 또는 ‘가족’과 바꿔도 뜻이 통합니다. ‘아이와 새롭게 만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이루고 오랫동안 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지만, 그만큼 서로에 대해서 많이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아이들도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집니다. 하지만 부모인 우리 어른들은 역동적인 현실이 어지러워 자기만의 관념의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관념이 때로는 보호막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관념이 그물처럼 자신을 조여 온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래서 실제 자기의 모습을 봐달라고 계속 요구를 합니다. 바로 ‘새로움에 대한 요구’입니다. 혹시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만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내 아이나 가족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제3자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실제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관념 속에 오랫 동안 가둬놓았다면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계모가 아이를 죽도록 때린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죽은 아이의 아버지는 ‘몰랐다’고 말합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마음속에 갇힌 채로 점점 죽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한때 드라마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오피스 와이프(office wife)’나 ‘오피스 허즈번드(office husband)’는 어떤가요? 실제 부부나 애인 관계는 아니지만 직장에서 아내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 동료를 오프스 와이프, 남편처럼 친하게 지내는 남성 동료를 오피스 허즈번드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새로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관념 속에 갇혀 있으면 숨이 막히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회사나 집 밖에서 자신의 실제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이것은 단지 변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피스 와이프가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마음이 돌아서게 된 데에는 서로의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많은 부모들을 만나다 보니 부부 사이가 최악인 경우, 이혼한 경우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동료와 바람이 나서 동거를 하고 자기와 아이는 돌볼 생각도 하지 않는 남편의 이야기에 화가 납니다. 하지만 이내 슬퍼졌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에 대한 분노만 키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인생 자체가 혼자 살아가는 거잖아요. 연애를 하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결혼을 했다가 헤어질 수도 있지만 ‘다시’ 나의 인생을 시작할 뿐입니다. 이것 또한 새로움입니다. 만약 이 경우 ‘나 질문법’으로 물어볼 수 있다면 훨씬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 먼지와 사무실 먼지 속에서 보냅니다. 하지만 가끔 바깥으로 나가서 새로운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가족을 새롭게 만난다’, ‘내 아이를 새롭게 만난다’는 것은 바로 이 느낌입니다. 

대학의 첫 번째 구절에서 가장 오묘하고 강력한 말은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 멈출 때를 안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는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과 같습니다. 축구 스타 박지성 선수가 국가대표팀을 은퇴했을 때, 초롱이 이영표 선수가 축구선수 생활을 은퇴했을 때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아주 적절한 시점에 멈췄기 때문입니다. 최적의 타이밍에 멈출 줄 아는 감각이야말로 인생을 빛내주는 기술입니다. 


육아서를 읽으면 자주 볼 수 있는 구절이 ‘아이의 마음을 만져주라.’는 말입니다. 마치 진리처럼 남용되는 말이지만 모든 상황에 다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을 읽고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의 마음을 만져주려고 노력합니다. 어느새 아이는 부모의 머리 위에서 장난을 칩니다. 벽을 만났으니 멈춰야 할 때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때리거나 심한 장난을 할 경우 따끔하게 “안돼”라고 경고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원칙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구절 역시 어떤 경우에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역시 이 구절을 읽은 부모는 원칙을 세운다고 이거 하면 “안 돼”, 이거 해도 “안 돼”라고 합니다. 아이는 잔뜩 주눅이 들어서 행동을 할 때마다 부모의 눈치를 볼 지도 모릅니다. 결국 마음을 만져주려 해도 벽을 만나고, 엄격하게 해도 벽을 만납니다. 벽이란 다름 아닌 아이의 마음이죠. 그건 아이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릅니다. 벽을 만났다면 그 자리에서 멈추고 돌아가야 합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정지 신호를 만나면 차를 멈추고 신호를 기다립니다. 축구 경기를 할 때도 반칙이 심한 경우는 ‘레드 카드’를 받는데 이 카드를 받는 사람은 그날 경기를 거기까지 하고 퇴장합니다. 인생도 이렇게 친절하게 정지 신호가 적절히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정지 신호 없는 도로를 위태롭게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하지만 육아에서는 분명한 정지 신호가 있습니다. 바로 아이의 반응과 표정입니다. 아이는 집에서 ‘새로움’을 담당합니다. 부모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끼기도 합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병사합니다. 임종의 순간 제갈량은 심복인 조자룡에게 비단 주머니 세 개를 주면서 위기의 순간에 열어보라고 합니다. 나도 부모님들께 드리는 비단주머니가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꺼내보라고 하는 주머니 속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혹시 내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닐까?”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온갖 압박을 받습니다. 학부모 모임에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상담에서, 심지어 동네 아줌마들과 키즈카페에 가서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이웃들이 아이를 어떤 학원에 보내거나 무엇인가를 가르치거나 오르다 같은 고급 용구를 들이면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서 교육을 시키려고 하면 주위의 지인으로부터 "미쳤어?" "너 제정신이야?" 하는 핀잔을 듣습니다. 이때는 동양철학에 말하는 '일시정지' 카드를 활용하세요. 


공자가 말했다.  

"길에서 들은 말을 길에서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 논어17-14


만약 길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아이에게 적용하면 100% 아이에게 피해를 줍니다. 일단 정지한 후에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는 거죠. 예컨대 오르다 세트를 구입한 친구 집에 갔다가 오르다 자랑을 늘어놓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당장 우리에게 사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친구 집 아이는 오르다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고, 우리 아이도 그런 놀이를 마음에 들어할 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효과를 줄 수 있는 상품 중에서 오르다보다 더 저렴한 것은 없는지, 우리 가정 형편에 구입해도 좋은지 등등을 따집니다. 이 고민을 배우자와 함께 이야기한다면 훨씬 더 좋아집니다. 다만 마음에 이미 결정을 하고 나서 통보 식으로 말하거나 배우자를 설득하려고 한다면 더 나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동양철학이 그리는 인간상은 “반성하는 인간”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용기’라는 중용의 말이나,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인간도 아니다’는 맹자의 말도 반성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반성을 하게 되던가요? 사람은 거울을 볼 때만 반성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다른 사람을 나의 거울로 이용합니다. 부모 역시 자기 스스로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행동을 바라볼 때만 자신이 틀릴 수 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말과 행동을 거울로 삼아서 되돌아보지 않으면 결국은 더 큰 문제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밥 안 먹고 딴짓하는 민준이의 식판을 치우고 나서, 민준이가 동생의 식판을 치워버리는 모습을 거울 삼아 나의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문제가 나를 찾아왔을까요? 생각만 해도 오싹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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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6]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께 (3)

동양철학과 육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답은 없고, 다만 정성이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부모님들을 만나면 항상 강조하는 말은 ‘제발 육아서 읽고 감정이입하지 말라’입니다. 육아서는 아동심리학 등 심리학 연구 결과에 근거하는데, 심리학 연구는 인간의 일반적인 평균값을 말합니다. 평균값이 뭔가요? 어떤 반의 수학 성적 평균이 70점이지만 한 친구는 0점을 받을 수도 있고, 다른 친구는 100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특별하고 특수합니다. 육아서에 감정이입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죠? 동양철학을 쓴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이어서 남자의 시선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 여자에 대해서 언급한 구절이 가끔 있습니다. 

<강고>에 이르기를 '갓난아기를 끌어안은 듯 한다'고 하였으니 마음으로 정성껏 추구한다면 비록 실정에 딱 드러맞지는 않더라도 가까이 갈 수는 있을 것이니 자식 기르는 것을 배운 후에 시집가는 여자는 없다. 
ㅡ 대학9장
※ 강고(康誥)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篇名)

가끔 일본에서 조카가 머물렀다가 갑니다. 조카는 우리 첫째 민준이보다 한 살이 많은 형입니다. 조카가 네 살이던 여름이었습니다. 덥기도 덥고, 조카는 아토피까지 있어서 엄마에게 짜증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특히 새벽 3시 정도만 되면 자다가 일어나서 엄마에게 침대에서 내려가라고 하고, 텔레비전에서 뽀로로 틀어달라고 하기도 하고, 갑자기 배고프다고 밥상을 차려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같이 황당한 투정이지만,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가라 울어댔습니다. 조카의 엄마는 밤마다 아이와 전쟁을 치르는 통에 해쓱해졌습니다. 나도 새벽까지 일을 하는 올빼미족이라 조카 모자의 모습을 계속 지켜봤습니다. 처음에는 성가셨지만 나중에는 안타깝고 측은했습니다. 하루는 울고 있는 조카를 안고 창가로 갔습니다. ‘하루라도 편안하게 잠을 자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고 조카를 꼭 안고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애가 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름날 밤이었지만 방충망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살갗에 닿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조카를 봤더니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습니다. 옆에 있는 부채로 살살 흔들어 주면서 달랬더니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이 들었습니다. 이날의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성(誠)’이라는 글자를 무척 강조합니다. <중용>에는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정성이 없다면 세상에 어떤 것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정성[誠]은 하늘의 도요, 정성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니, 원래 성[誠]은 힘쓰지 않고 중심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 얻으며 조용히 중도에 합치되니 성인이요, 정성[誠]에 힘쓰는 자는 착함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 
- <중용> 20장

정성은 마치 태양의 내리쬠과 같은데, 훌륭한 사람은 태양을 닮으려고 한다는 동양철학의 ‘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들인 정성을 생각해 보시면 성(誠)의 의미가 다가옵니다. 먹고싶은 것 참고, 먹기 싫은 것도 참고, 감기약도 참아가며 열 달을 버텼습니다. 그 옆에서 아빠도 전전긍긍하면서 보낸 세월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뭇 생명들이 이런 정성스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은 생명에 대해서 세심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아이의 손이 가는 모든 것에 아이의 숨결이 있습니다. 아이의 감정 역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이 죽는 게 아니고 아이의 기가 푹 죽는 것 역시 일종의 죽음으로 볼 수 있겠지요. 정성이란 것은 이런 것들에 세심히 신경 쓴다는 말입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서점에서 육아서를 찾아가며 배운 것도 일종의 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천여 명의 부모님을 만나면서 참 고맙고 행복했던 것은 부모님의 마음에 가족에 대한 사랑과 선의가 충만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랑과 선의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방해 때문에 아이에게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기까지 합니다. 갈 곳을 잃은 부모님의 사랑, 길이 끊어져 버린 선의를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결국 이에 대한 해답도 정성에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아이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어쩌면 자신의 관념을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의 관념 속에 갇힌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부모의 사랑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배신감에 사무칩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도 부모는 자신의 방식대로 아이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부모와 아이는 계속 멀어집니다. 아이에게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아이의 주변을 살핀다는 말입니다.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아이가 노는 공간, 걷는 길, 좋아하는 책 등 아이의 손길이 닿는 곳에 대해서 세심하게 신경 쓴다는 의미입니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는 물건에 담긴 영혼 하우(hau)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증여론>은 마르셀 모스가 아메리카, 멜라네시아, 뉴질랜드의 원시인의 생활방식을 인류학적으로 연구해 증여(선물)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기초라는 걸 밝힌 책입니다. 

증여자가 내버린 경우에도 그 물건은 여전히 그에게 속한다. 그는 그것을 통하여, 마치 그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것을 훔친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수익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우(hau)'는 그것을 소지하는 자를 쫓아다닌다. 
- 마르셀 모스, <증여론>(한길사), 68쪽

하우는 '바람'과 '영혼'을 동시에 가리키는 영적인 힘을 말합니다. 길을 가다가 쓸 만한 의자나 가구를 발견해서 집에 들이면 가끔 아이가 병이 드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어른들은 ‘동티’가 났다고 말합니다. 민준이와 민서가 사촌형에게 옷을 물려 받았다면 옷의 주인으로부터 양도되었고, 옷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 때문에 동티가 나지 않습니다. 벼룩시장에서 아이 옷가지나 장난감을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내서 물건을 양도 받았고, 물건 주인의 신원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길을 가다가 쓸 만한 물건을 발견했을 때는 양도 받은 것도 아니고 물건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영혼이 가녀린 아이가 유탄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미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부모님들에게 책놀이를 가르쳐주면 부모님들은 집에 가서 아이와 즐겁게 책놀이를 즐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부모님이 아이가 책놀이를 거부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거든요. 몇 일 동안 고민을 하며 이유를 살펴봤지만, 뚜렷이 알 수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그 부모님이 고백했습니다. 

“아이랑 함께 읽는 책은 어른이 보기에 좀 따분하잖아요. 그래서 주말에 아이 책을 옆에 놓고 소설책을 읽었는데 아이가 그 모습을 봤나 봐요. 그때부터 아이가 책놀이하는 책을 거부하더라고요.”

아이와 함께 읽는 책에 아이의 영혼이 담겨 있는지 그 부모님은 몰랐던 겁니다. 아이의 영혼은 부모님의 영혼보다 더 맑고 민감해 합니다. 특히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에 대해서 무척 예민합니다. 그런 것들을 소중하게 다뤄주면 아이는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한 어머니는 아이가 학습만화에 빠지는 것이 싫어서 집에서 학습만화를 다 치워버렸습니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더욱 학습만화에 집착했습니다. 아이에게 학습만화는 생명과 같이 애착이 있는데, 엄마가 집에서 학습만화를 치워버리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저항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잔뜩 주눅이 들고 수동적인 아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에 비하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아이는 그나마 건강한 편입니다. 이렇게 정성의 세계는 무척 복잡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눈을 뜨는 순간 아이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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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5. 육아는 오디션이다
(부제 :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께 (2))

아이를 기르는 부모님은 오디션을 치르는 배우와 같습니다. 심사위원은 바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마음 깊이 새기고, 나중에 똑같이 따라합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있을 때 싸움을 무력으로 저지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 가거나 사회에 나가서 싸우는 모습만 보면 덮어 놓고 반대하거나 싸움을 멈출 생각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 싸우는가?' 하는 생각은 영원히 사라집니다. 버스나 지하철이 파업하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비난만 하는 것처럼. 가정에서 배운 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증자가 말했다. '열 개의 눈이 부릅떠 보고 있고 열 개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데 무섭지 않은가
ㅡ 대학6장

가정에서 아이들이 경험하는 일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무한반복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입니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하나의 오디션인지도 모릅니다. 서울생협의 의뢰를 받아 조합원 어머니들에게 강연을 하고 나서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아주머니가 아기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수업을 들었던 유모차 엄마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울고 떠들어서 전 집중을 잘 못했는데, 선생님은 강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셨나요?”

만약 그 순간 내가 ‘뭐, 그런 부분도 있죠.’라고 대답했다면 나는 인생 오디션에서 실패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나는 순간 나의 대답의 찾았죠. 

“물론 아이들이 울고 떠들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강의하는 데 지장을 미치죠. 하지만 부모 강의를 계속 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어왔는데, 그 다음에는 아이 엄마의 마음이 들어오더군요. 오죽했으면 아이가 떠들어 실례가 됨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들을까? 이 마음이 대견하고 고마워요.”

갑작스럽게 받은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한 거였지만, 나중에 집에 돌아가고 나서 안도했습니다. 어른들끼리의 대화에서도 이렇게 살 떨리는 오디션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이들과의 일상에서는 어떨까요? 부모님들의 주의집중과 긴장이 요구됩니다. 동양에서는 ‘마음 씀’과 ‘마음 반응’을 정확히 구분합니다. 강연을 할 때 아이들이 떠들면 주의력이 분산되고 짜증이 올라오는 것은 마음의 반응입니다. 마음은 원래 도망을 잘 치고, 조그만 것에도 반응을 잘 합니다. 맹자는 도망치지 않으면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문의 길이란 다름이 없다. 그 달아난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맹자11-11)라고 말했습니다. 유명한 ‘구방심(求放心)’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알아봐준다는 것이고, 사정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예양이란 자객은 자신의 주인을 위해 복수를 하다가 실패해 죽게 되자 조양자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서 죽고, 여인은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 사마천, <사기열전> ‘자객열전’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는 그저 욕심 때문에 서로의 것을 빼앗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 가지고 열 번을 다툰다고 해도 열 가지의 서로 다른 사정이 있기 마련인데, 이걸 알아주지 않으니 다툼은 더욱 심해지고 원망은 커집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친구관계인 관중은 친구 포숙의 마음 쓰는 방법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나는 세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 사마천, <사기열전>, ‘관안열전’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의 행동은 나름대로 아이들의 싸움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씀’이라기보다는 ‘반응’에 가깝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표정이 편안해집니다. 부모님이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려놓으면 아이들 표정이 편안해지나요? 여기에는 다만 힘의 논리만 작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이의 마음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동양철학의 목소리로 한번 들어볼까요?

무력으로서 사람을 굴복시키면, 마음으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맹자3-3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무엇이든지 적응하려고 해서 탈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사람의 이런 성향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말합니다. 휴리스틱(heuristic)은 ‘찾아내다’ ‘발견하다’는 뜻의 그리스 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로, 불확실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풀기 위해 쓰는 주먹구구식 셈법이나 직관적 판단, 경험과 상식에 바탕을 둔 단순하고 즉흥적인 추론을 뜻합니다. 운전을 처음 할 때는 핸들이나 라이트, 기어, 핸드 브레이크, 미러 등의 조작 방법이 복잡해 보이지만 6개월 정도만 운전하다 보면 따로 생각하지 않고서도 익숙하게 기계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눈 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차선을 바꿀 때, 후진으로 주차할 때 역시 느낌만으로도 반듯이 하는 수준이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과신하다 보면 접촉사고가 나는 경우도 생기죠. 휴리스틱은 익숙하고 반복되는 상황을 몸에 입력해 놓았다가 바로 반응해서 시간을 줄여주기도 하지만, 큰 실수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휴리스틱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부모의 관념 속에 아이를 밀어 넣고 선입견의 눈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면 아이 역시 부모를 관념 속에 밀어 넣고 선입견으로 바라봅니다.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그런 부모’, ‘그런 아이’가 되어 버립니다. 실제 부모와 실제 아이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제 ‘마음 쓰기’를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해졌죠?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다가 한 아이가 울면서 다가오면 그저 말없이 안아줍니다. 너의 아픔과 슬픔을 알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지어주면 아이는 부모가 자기의 편이라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때린 아이 앞에서 하면 자연스럽게 때린 아이가 틀렸다는 메시지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두 아이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에 동조해줄 때도 마찬가지로 다른 아이가 들을 수 없도록 귓속말로 해주거나 표정으로 동의를 해줍니다. 부모가 자기의 뜻을 알아준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은 분노가 누그러지거나 득의만면해집니다. 장난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둘이 다투다가 가지게 된 아이가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아서 냉장고에 올리거나, 다른 아이에게 장난감을 건네주는 것을 보면서 그 아이는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다른 방법을 쓰는 게 낫습니다. 다툼이 있는 장난감은 둘 다의 소유물이거나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것이 많습니다. 소유가 명확히 정해지면 아이들은 탐을 내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면 답을 하지 않거나 거절하는데, 그러면 조금 기다렸다가 마음이 풀리면 다시 물어봅니다. 나의 경우는 ‘시간’을 의인화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민준이가 한 살 많은 사촌누나와 주먹다짐을 하고 나서 크게 울면서 제게 왔을 때 안아주고 화해하게 했더니 사촌누나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였습니다. 아이에게 “민준아, 시간은 똑똑한 친구지? 시간한테 맡기고 조금 기다리면 어떨까?”라고 제안하고 그네타기를 같이 하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촌누나의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먼저 와서 아이에게 사과를 합니다. “그것 봐, 시간은 똑똑하다고 했지?”라고 말해줍니다. 물론 이렇게 좋게 끝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방법을 쓰면 언제나 효과가 있었습니다. 마음은 항상 달아나지만,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것도 잊지 않으니까요. 
이런 과정들이 어떻게 보면 상당히 번거롭고 복잡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하고 질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남은 세월을 생각해보세요. 부모가 없어져도 아이들은 부모와 관계 맺었던 경험을 종자돈으로 삼아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 씀이 아이의 인생에 큰 상처를 준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개만 보면 벌벌 떠는 사람의 한탄입니다. 

"어른들은 모두 내가 어려서 그런 거라고, 크면 괜찮아질 거라고만 하셨어. 하지만 개에 대한 두려움은 커서도 없어지지가 않았고 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개를 무서워했어. 그때 부모님이 나에게 개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무조건 피하기만 하지 않고 개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도와주셨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며 힘들어하진 않았을 테니까."
- 상진아, <행복한 놀이대화>, 89쪽

마음은 외과수술처럼 제거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알아주고 감싸주면서 치유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대상입니다. 장난감을 냉장고 위에 올리는 부모의 마음을 ‘마음 씀’의 방법으로 읽어 본다면, 아이들이 다투고 때리는 상황이 싫은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 원인이 장난감에 있다고 보고 애꿎은 장난감을 희생양으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의 마음속에 펼쳐지고 있는 근원적인 모습을 보면 부정적인 상황이나 싸움을 보면 피하고 싶은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을 피하고 싶어하는 부모님은 마음은 부모 역시 어렸을 적에 부모로부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모님의 부모님에게로 문제는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이들이 다시 부모가 되었을 때 또다시 부정적인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만큼은 상황을 직면하면서 슬기롭게 해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선에서 문제를 해소하는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부모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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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4.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께 (1)


남자 형제를 키우다 보니 아이들의 취향이 서로 비슷합니다. 또봇Z 신제품을 하나 사주면 서로가 갖겠다며 전쟁이 벌어집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다른 일을 보고 있을 때는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맞아서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이들이 싸우는지 알게 됩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아이들에게 가서 장난감을 빼앗은 다음에 아이들이 볼 수 있게 냉장고 위에 올리면서 한마디 합니다. 

“장난감 때문에 싸우면 냉장고에 올릴 거야!”

냉장고 위에는 또봇뿐만 아니라 파워레인저, 각종 자동차 등 장난감이 이미 많이 올라갔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닌가요? 나도 한때는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아버지였습니다. 형제를 키우는 부모님 중에서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지 않는 부모님은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참 많이들 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V를 보면 국회에서 멱살을 잡고 최루탄을 뿌리는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싸움을 잘 하는 게 아니라, 싸움에 취약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싸우는 상황에 무척 취약합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주먹이 나가거나 멱살을 잡는 게 더 편합니다. 오죽했으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까지 나왔을까요? 동양은 예부터 싸움 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오묘한 도를 설파하는 노자로부터 전쟁의 신이라 추앙받는 손자에 이르기까지 동양이 말하는 ‘싸움의 기술’은 싸움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훌륭한 사관(士官)은 무용(武勇)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을 내지 아니하며 잘 이기는 사람은 적과 맞붙지 아니하고 사람을 자 부리는 사람은 그 사람 밑으로 내려간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음의 덕이라 하고 이를 일러 사람 부리는 힘이라 하고 이를 일러 하늘의 짝이라 하니 옛날 도의 지극함이다. – 도덕경 68장

동양에서는 완력이나 지위, 목소리 등으로 위협하는 싸움을 비웃었습니다. ‘나는 용감함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맹자는 “왕께서는 작은 용감함을 갖지 마십시오. 대저 칼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화낸 눈초리로 쏘아 보며, '그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 내랴!'고 한다면, 이것은 필부의 용감함으로,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맹자2-3)라고 충고했습니다. 아이들이 싸울 때야말로 싸움의 기술을 가르칠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 나는 참 슬플 것 같습니다. 동양철학 중에서도 ‘믿고 쓰는’ 정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느림’입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처럼 동양은 느리게 걷고 느리게 사고합니다. 느린 시선으로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의 마음을 보면 ‘평화에 대한 집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송나라에 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에 심은 벼싹이 자라지 아니하는 것을 가엽게 여겨 이를 다 뽑아버렸다. 그 사람은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에게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다. 내가 벼싹을 자라게 도와 주었다’ 그의 아들이 황급히 뛰어나가서 밭을 살펴보니, 벼싹은 이미 말라버렸다. 천하에는 벼싹을 자라게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 맹자3-2

평화는 어떻게 찾아오나요? 한번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 ‘우리 이렇게 살지 말자’는 반성이 들면 평화가 옵니다. 미국이 인종차별에 대해서 세심한 제도를 갖출 수 있었던 까닭은 엄청난 인종차별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극우정당에 대한 정치적 견제 장치가 강한 까닭은 나치 정권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이 노동자 의식과 연대, 가치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를 보여주는 까닭은 잔인한 착취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시민운동, 시민사회, 시민 그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부족한 까닭은 그만큼 역사가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책과 라디오 등 미디어들이 어떻게 평화를 찾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기막히게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디어 전문가인 마셜 매클루언은 “새로운 미디어는 이전의 오래된 미디어가 평화롭게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두 개의 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듯 새로운 미디어는 낡은 미디어가 새로워진 환경에 맞는 새로운 형태와 자리를 발견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압박을 가합니다.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다니엘 네틀, 수잔 로메인에 따르면 지난 5백 년 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언어들 중 거의 절반 가량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주 방언 역시 2010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분류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와 미디어가 평화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싸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가 갖기 쉬운 ‘평화에 대한 집착’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디오가 나타난 뒤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는 옛날에 쓰던 말들이 되살아 났고, 이스라엘에서는 더욱 놀라운 언어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지금 수 세기 동안 책 속에서 줄어 있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커뮤니케이션출판부), 515쪽


아이들이 장난감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모습에서부터 다서 한번 천천히 생각해보면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싸우는 아이들을 무턱대고 수수방관할 필요는 없지만 부모님의 빠른 반응은 아이들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평생 동안 이와 비슷한 상황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장난감 가지고 다투는 것은 어른들이 이해관계나 가치판단 때문에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평화상태에 집착해 다투는 아이들을 서로 떼어 놓고 장난감을 냉장고에 올릴수록 아이들은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대응능력이 떨어집니다. 아이들 마음의 밭에 뿌려 놓은 벼싹을 뽑아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충분히 서로 감정표현을 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주먹다짐을 하더라도 성급히 떼어놓지 않아야 합니다. 아동심리학자들도 어린아이들의 근육과 완력이 세지 않기 때문에 어릴 적에 주먹질을 하거나 얻어맞은 경험을 미리 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합니다. 


역할극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대개의 부모님들은 형제들을 피고나 원고, 또는 변호사나 검사를 앞에 둔 판사처럼 행동합니다. 결론을 내 주는 거죠. 하지만 아이들이 싸울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좋은 역할은 바로 ‘기자’입니다. 기자는 상반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보고 기사에 반론을 싣습니다. 기자 스스로 판단을 하지 않고 독자들의 판단에 맡깁니다. 판사가 가지는 마음이 책임감이라면, 기자가 가지는 마음은 ‘궁금함’입니다. 궁금하지 않으면 혼을 내고 장난감을 냉장고에 올립니다. 나는 두 형제가 장난감을 가지고 싸울 때 조금 기다리고 개입할 타이밍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한명씩 이유를 물어봅니다. 아이들의 고조된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일을 그르칩니다. 부정적인 감정, 즉 화가 날 때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집니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일부러 속도를 느리게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종이와 펜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화가 나서 감정이 빨라진 상황에서 느리고 차분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가 주는 효과를 따로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세 살이기 때문에 두 살이 많은 형에게 맞고 나서 울면서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종이와 펜을 준비하고 최대한 다정하게 물어봅니다. “민서(둘째 이름)야, 왜?” 둘째는 울먹이면서 “형아가 때려쪄!”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종이에 둘째가 말한 내용을 소리 내서 천천히 받아 적습니다. 이때 둘째의 표정을 힐끗힐끗 바라보면서 변화를 관찰합니다. 그 다음에 ‘문제’의 형인 첫째를 부릅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취조를 하듯이 물어보거나, 아이가 방어를 하도록 물어보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살살 달래며 마치 ‘낚시’를 하듯 물어봅니다. “민준(첫째 이름)아, 민서가 울고 있네. 형아가 때렸다고 하던데.” 첫째는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점을 항변하기 위해서 대답합니다. “민서가 내 장난감 가져가잖아.” 나는 둘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펜으로 첫째가 했던 말을 소리 내서 천천히 받아 적습니다. 역시 첫째와 둘째의 표정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변화를 관찰합니다. 자신이 한 말을 부모가 받아 적었을 때 아이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이야기할 때 엄마는 대개 돌아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거든요. 아빠들은 책을 보거나 TV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입으로만 아이의 말에 대답을 하거든요. 이런 엄마 아빠가 아이가 한 말을 경청하고 펜으로 받아적는다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존중한다는 강력한 표현이거든요. 둘째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민서가 형아 장난감 가져갔다는데?” 둘째는 억울하다는 듯 대답합니다. “형아가 주기로 해놓고서 안 주잖아.” 둘째의 말을 똑같이 따라 씁니다. 아이들의 표정을 힐끗 힐끗 보라고 한 것은 아이들 표정에서 화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싸웠을 때 화가 풍선만큼 커졌다면, 펜으로 받아 적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나면 탁구공만큼 작아졌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말을 소리 내서 따라 하는 이유는 역시 존중의 표현입니다.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했는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판단하지 않아도 당장 아이들의 감정 상태를 존중하기만 하면 아이들의 화는 누그러집니다. 굳이 판단을 할 필요도 없고 잘잘못을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너희들이 장난감 때문에 싸우면 내 마음이 슬퍼져.”라고 말해도 충분합니다. 형제가 있는 아이들 싸우는 문제가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옆에서 한 엄마가 한마디 합니다. 이 말에 모든 부모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잠해집니다. 


“우리 가족은 아들만 하나라서 장난감 가지고 싸울 기회조차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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