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7. 정지 신호를 잘 지키면 육아의 길이 행복해진다
동양철학을 읽기가 쉽지 않은 까닭은 ‘첫 구절’부터 내용이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예 ‘동양철학의 첫 구절을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쓸 때 제목이나 소제목 같은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글을 시작할 때 주제를 충분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논어>나 <맹자> 같은 경전의 소제목은 글이 시작하는 단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첫 구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경전 <대학>은 '큰 배움'이라는 뜻이지만 모든 교육자와 부모님들께 '교육'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첫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그치는 데에 있다. – 대학경문
밝은 덕을 밝힌다는 명명덕(明明德)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고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왜 밝을 명(明)이 두 번 들어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인문학인데, 밝은 덕이란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잘 들여다 보면 밝은 덕의 요소가 있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맑은 마음, 또를 밝은 도리가 있는데 이걸 명확히 확인시켜주는 게 명명덕의 정신입니다. 예컨대 아이가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으려고 할 때 부모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는 눈에 보이는 음식을 왜 먹어서는 안 되는지 몰라서 부모에게 “왜?”하고 물어봅니다.
“땅에 떨어진 것 먹으면 아파.”
- 왜?
“아프면 병원 가야 해.”
- 왜?
이렇게 아이의 질문이 반복되면 부모는 슬슬 짜증이 나며 “먹지 마!”하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아이가 장난으로 자꾸 물어보는 경우도 있는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왜?’ 하고 물어봐주는 아이가 정말 예쁜 아이 아닌가요? “네가 땅에 떨어진 것 먹고 병원 가면 아빠 마음이 아파. 아빠 마음이 아프면 좋겠어?” 하고 되물으면 아이는 “아니!”하고 대답하며 땅에 떨어진 음식으로부터 관심을 끊습니다. 아이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밝혀 주는 것이 명명덕입니다. 엄마가 뭔가를 잘못 말하거나, 오해해서 혼내고 나서 나중에 사과하는 것도 일종의 명명덕입니다. 아이는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이는 알 거라고 생각하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가끔 아이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 빈 그릇에 물을 붓듯이 영어를 가르치면 영어가 쌓이고, 과학을 가르치면 과학이 쌓인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그런 식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에게서 배웁니다. 책을 오래 읽은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읽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치 아이를 '반쯤 켜진 전구'로 보고 나머지 스위치를 찾아서 켜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요? 아이의 인식 수준을 마음속으로 어림해서 행동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의 양심에 물어보고 최선의 대답을 해줍니다.
재신민(在新民)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달려 있다는 뜻인데, 여기서 ‘백성’을 ‘아이’ 또는 ‘가족’과 바꿔도 뜻이 통합니다. ‘아이와 새롭게 만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이루고 오랫동안 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지만, 그만큼 서로에 대해서 많이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아이들도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집니다. 하지만 부모인 우리 어른들은 역동적인 현실이 어지러워 자기만의 관념의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관념이 때로는 보호막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관념이 그물처럼 자신을 조여 온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래서 실제 자기의 모습을 봐달라고 계속 요구를 합니다. 바로 ‘새로움에 대한 요구’입니다. 혹시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만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 내 아이나 가족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제3자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실제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관념 속에 오랫 동안 가둬놓았다면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계모가 아이를 죽도록 때린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죽은 아이의 아버지는 ‘몰랐다’고 말합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마음속에 갇힌 채로 점점 죽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한때 드라마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오피스 와이프(office wife)’나 ‘오피스 허즈번드(office husband)’는 어떤가요? 실제 부부나 애인 관계는 아니지만 직장에서 아내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 동료를 오프스 와이프, 남편처럼 친하게 지내는 남성 동료를 오피스 허즈번드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새로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관념 속에 갇혀 있으면 숨이 막히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회사나 집 밖에서 자신의 실제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갑니다. 이것은 단지 변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피스 와이프가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마음이 돌아서게 된 데에는 서로의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많은 부모들을 만나다 보니 부부 사이가 최악인 경우, 이혼한 경우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동료와 바람이 나서 동거를 하고 자기와 아이는 돌볼 생각도 하지 않는 남편의 이야기에 화가 납니다. 하지만 이내 슬퍼졌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에 대한 분노만 키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인생 자체가 혼자 살아가는 거잖아요. 연애를 하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결혼을 했다가 헤어질 수도 있지만 ‘다시’ 나의 인생을 시작할 뿐입니다. 이것 또한 새로움입니다. 만약 이 경우 ‘나 질문법’으로 물어볼 수 있다면 훨씬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 먼지와 사무실 먼지 속에서 보냅니다. 하지만 가끔 바깥으로 나가서 새로운 공기를 마시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가족을 새롭게 만난다’, ‘내 아이를 새롭게 만난다’는 것은 바로 이 느낌입니다.
대학의 첫 번째 구절에서 가장 오묘하고 강력한 말은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 멈출 때를 안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는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과 같습니다. 축구 스타 박지성 선수가 국가대표팀을 은퇴했을 때, 초롱이 이영표 선수가 축구선수 생활을 은퇴했을 때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아주 적절한 시점에 멈췄기 때문입니다. 최적의 타이밍에 멈출 줄 아는 감각이야말로 인생을 빛내주는 기술입니다.
육아서를 읽으면 자주 볼 수 있는 구절이 ‘아이의 마음을 만져주라.’는 말입니다. 마치 진리처럼 남용되는 말이지만 모든 상황에 다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을 읽고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의 마음을 만져주려고 노력합니다. 어느새 아이는 부모의 머리 위에서 장난을 칩니다. 벽을 만났으니 멈춰야 할 때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때리거나 심한 장난을 할 경우 따끔하게 “안돼”라고 경고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원칙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구절 역시 어떤 경우에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역시 이 구절을 읽은 부모는 원칙을 세운다고 이거 하면 “안 돼”, 이거 해도 “안 돼”라고 합니다. 아이는 잔뜩 주눅이 들어서 행동을 할 때마다 부모의 눈치를 볼 지도 모릅니다. 결국 마음을 만져주려 해도 벽을 만나고, 엄격하게 해도 벽을 만납니다. 벽이란 다름 아닌 아이의 마음이죠. 그건 아이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릅니다. 벽을 만났다면 그 자리에서 멈추고 돌아가야 합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정지 신호를 만나면 차를 멈추고 신호를 기다립니다. 축구 경기를 할 때도 반칙이 심한 경우는 ‘레드 카드’를 받는데 이 카드를 받는 사람은 그날 경기를 거기까지 하고 퇴장합니다. 인생도 이렇게 친절하게 정지 신호가 적절히 들어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정지 신호 없는 도로를 위태롭게 달리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하지만 육아에서는 분명한 정지 신호가 있습니다. 바로 아이의 반응과 표정입니다. 아이는 집에서 ‘새로움’을 담당합니다. 부모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끼기도 합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병사합니다. 임종의 순간 제갈량은 심복인 조자룡에게 비단 주머니 세 개를 주면서 위기의 순간에 열어보라고 합니다. 나도 부모님들께 드리는 비단주머니가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꺼내보라고 하는 주머니 속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혹시 내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닐까?”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온갖 압박을 받습니다. 학부모 모임에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상담에서, 심지어 동네 아줌마들과 키즈카페에 가서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이웃들이 아이를 어떤 학원에 보내거나 무엇인가를 가르치거나 오르다 같은 고급 용구를 들이면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서 교육을 시키려고 하면 주위의 지인으로부터 "미쳤어?" "너 제정신이야?" 하는 핀잔을 듣습니다. 이때는 동양철학에 말하는 '일시정지' 카드를 활용하세요.
공자가 말했다.
"길에서 들은 말을 길에서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 논어17-14
만약 길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아이에게 적용하면 100% 아이에게 피해를 줍니다. 일단 정지한 후에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는 거죠. 예컨대 오르다 세트를 구입한 친구 집에 갔다가 오르다 자랑을 늘어놓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당장 우리에게 사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친구 집 아이는 오르다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고, 우리 아이도 그런 놀이를 마음에 들어할 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효과를 줄 수 있는 상품 중에서 오르다보다 더 저렴한 것은 없는지, 우리 가정 형편에 구입해도 좋은지 등등을 따집니다. 이 고민을 배우자와 함께 이야기한다면 훨씬 더 좋아집니다. 다만 마음에 이미 결정을 하고 나서 통보 식으로 말하거나 배우자를 설득하려고 한다면 더 나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동양철학이 그리는 인간상은 “반성하는 인간”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용기’라는 중용의 말이나,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인간도 아니다’는 맹자의 말도 반성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반성을 하게 되던가요? 사람은 거울을 볼 때만 반성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다른 사람을 나의 거울로 이용합니다. 부모 역시 자기 스스로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행동을 바라볼 때만 자신이 틀릴 수 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말과 행동을 거울로 삼아서 되돌아보지 않으면 결국은 더 큰 문제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밥 안 먹고 딴짓하는 민준이의 식판을 치우고 나서, 민준이가 동생의 식판을 치워버리는 모습을 거울 삼아 나의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문제가 나를 찾아왔을까요? 생각만 해도 오싹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