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2] 아이들과 잘 노는 방법은 따로 있어요


아이들과 노는 것에 연구를 해본 아빠들은 알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와 잘 놀 수 있는지. "아이들과 잘 노는 방법은 뭔가요?"라고 질문하는 순간, 아이들과 잘 놀지 못한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과 잘 노는 방법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잘 놀 수 있는지 이야기할까 합니다. 나도 한때는 아이들과 놀 거리를 연구해서 아이들 앞에 내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대견해하지만 아이들 보기에는 전혀 성에 안 차지요. 하지만 이 정도 아빠라면 전체 아빠의 2% 안에 들 것입니다. 20% 안에 드는 아빠들은 놀이공원이나 OO랜드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이기구 줄을 서고 있습니다. 빼곡하게 들어찬 OO랜드의 주차장을 보면 '부모님들, 애 쓴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놀이공원에 가서 아이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공으로 만들어진 재미 같습니다. 음식점에서 어른들이 인공조미료 MSG에 마비된 것이나, 어린이들이 인공 재미에 마비된 것이나 진배없지요. 나는 22%의 아빠들이 애틋하고 안타깝습니다. 최소한 아이들과 잘 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아빠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아이들과 놀고 싶어하는 아빠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이런 놀이 저런 놀이를 만들면서 생각난 것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정신이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옛것을 전달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 - <논어> 7-1 일부

보수주의자인 공자의 '옛 것'을 나는 아이들의 놀이와 감정으로 응용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놀이를 새삼 만들 필요는 없고 그저 아이들의 마음을 잘 살펴보면 그만이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은 스스로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유시인처럼 당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놀이를 일부러 만들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알았습니다.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른이 절대로 아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이제는 최소한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아이들이 놀이를 재밌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뒤탈이 나지 않도록 뒷받침을 해주는 게 부모의 포지셔닝입니다. 잘 만들어진 영화의 '조연배우'라고 하면 딱 맞는 비유입니다. 아이들과 내 고향 성산포 마을을 여행하듯 돌아다녔습니다. 성산일출봉이 몸통을 담그고 있는 수메밑 바다는 기다란 해변이 장관입니다. 특히 둘째 민서는 모래사장에서 모래놀이를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낭떠러지 옆에서 노는 것만 제어를 해주고 나머지는 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합니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을 눈썰매장으로 바꿔 버립니다. 조금 경사진 모래의 지면을 이용해 엉덩이로 해변까지 20미터를 넘게 나아갑니다. 계단 옆에 나 있는 돌담을 짚어서 곧바로 암벽타기에 들어갑니다.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밑에서 보조를 해주고, 가끔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서 올려줍니다. 아이들이 놀이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정말 현란합니다. 갑자기 한데 모여 모래를 퍼 담으며 단숨에 둔덕 하나를 만들어냅니다. 그 옆에는 똑같은 둔덕이 하나 생겼는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나뭇가지가 송송 박혀 있습니다. 왜 나뭇가지를 박았는지 물어보니 '뾰족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공자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말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어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를 운행하고 만물을 낳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 <논어> 17-19

우리 아이들은 생명과 자연을 많이 닮았습니다. 어른스럽다는 것은 아이들이 내는 생명과 자연의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침을 깨우는 새들처럼 사람의 정신을 깨우는 아이들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길들이려고 하기보다는 보조를 해주세요. '말의 무의미성'에 대해서는 동서양 할 것 없이 많은 말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불교의 사상을 비롯해서 노자와 장자의 철학 역시 말의 한계를 명확히 합니다. <논어> 등 공자의 언행 기록 중에는 공자가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했던 모습과 하늘을 보고 깊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동양의 사고방식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놀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동양의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동양철학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서당에서 <맹자>를 읽으면서였습니다. <맹자>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구절 중의 하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였습니다. 

맹자가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알고, 나는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배양한다."
공손추가 물었다. 
"감히 묻사오니,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말하기가 어렵다. 그 기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서, 이것을 곧바로 배양하여 상해가 없다면, 천지의 사이에 가득 메우게 되고, 그 기라는 것은 정의와 도덕에 배합된다. 이것이 없다면, 약해진다. 이는 정의가 모여서 생겨나는 것이지, 밖에서 엄습하여 이를 차지한 것이 아니다. 행위가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면, 기는 약해진다. - <맹자> 3-2 일부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연지기'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으로 공감이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슴으로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고향을 여행하면서 호연지기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산일출봉을 뒤로 하고 해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두어 시간을 그렇게 놀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때마침 성산일출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리허설을 하기 위해 밴드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자 어깨춤을 흠씬 추자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막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민서는 얼마나 흥겨웠는지 춤  추다가 자빠지고 일어서서 또 춤을 췄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습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신이 났는지 돌아오는 길에 식당 앞에서 다시 춤을 추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행복해졌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호연지기였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표정이 바로 호연지기였습니다. 그날 아이들은 밤 아홉 시에 일제히 잠이 들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10시나 11시에 겨우 자는 아이들이 일찍 단잠이 들었다는 말은 하루 종일 제대로 놀았다는 뜻입니다. 놀이공원과 이곳저곳 현장답사를 한 어른과 고향에서 하루 종일 신나게 논 어른은 여기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시골을 다니면서 아이들이 재밌게 놀 수 있게 함께 참여한 어른은 호연지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몸이 지치지만 마음은 지치지 않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놀이공원 등을 바쁘게 돌아다닌 어른은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칩니다. 규모가 큰 놀이공원에는 '놀이방' 시설이 있는데, 거기 있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의자나 모퉁이에 지친 표정으로 앉아서 쉬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 놉니다. 이것은 호연지기의 단절이자, 놀이의 단절이며, 어른과 아이의 단절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따로 놀고, 아이의 놀이에 어른이 참여하지 않는 놀이는 아이들에게는 인스턴트 음식과도 같습니다. 앞서 소개한 민준이와 민서의 신나는 하루를 '어른'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른이 어떻게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세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게임의 용어를 쓰자면, 어른들은 아이들의 플랫폼(platform)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항구의 접안 시설이나 전철역의 플랫폼은 배와 기차가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승객들이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바로 그 역할을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놀이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점과, 자신들은 부모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아이들의 심리상태는 무척 안정적이 됩니다. 다시 말해 맘 놓고 놀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놀이의 환경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추임새'로 재미를 더해줍니다. 모래성을 쌓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물어봅니다. 아이들은 로봇이 출동하는 산이라고 신나게 설명합니다. 아이들이 만드는 모습이나 만들어 놓은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나뭇가지는 왜 꽂았는지 물어보면 아이들의 대답은 더욱 구체적이 됩니다. 자신들이 한 행동을 설명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놀이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놀이는 많은 말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잘 지켜보면 무척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노는 아이들과 말을 섞음으로써 함께 놀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추임새'의 세계는 어른의 독특한 영역이 될 수 있으며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른의 추임새에 따라서 아이들의 놀이 쾌감이 무척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제 현장에서 들려오는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아이들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냅니다. 나는 리듬에 맞춰 약간 어깨를 들썩거린 것뿐인데 아이들은 흥에 빠져 정신없이 춤을 춥니다. 식당 앞에서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입으로 흥겨운 음악을 조금 들려주면 아이들은 리듬에 맞춰 그 자리에서 춤을 춥니다. 어른의 추임새는 아이들에게는 '스위치'와 같습니다. 나는 '호연지기 스위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호연지기란 다름 아닌 '연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호연지기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나 혼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며,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호연지기를 이해한 것은 함께 연결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들과 잘 논다는 것은 '함께'와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주연배우를 도와주는 조연배우의 포지셔닝과 추임새만 알아도 아이들과 잘 놀 수 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비싼 시간과 돈을 들이면서 아이들의 단순한 말초신경을 자극하기보다는, 집 주변의 공원을 산책하더라도 아이들에게 '놀이 감수성'을 키워주세요. 장난감이 아닌 것을 장난감으로 놀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아이들의 놀이 감수성과 호연지기는 충만한 상태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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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1] 육아서, 육아전문가를 대하는 자세


부모님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거나 책 놀이를 할 때 참으로 난처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처음 내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은 "무척 젊으시네요!"입니다. 그 말에는 의외의 신선함도 있지만 반신반의의 느낌도 있습니다. '아이를 키워보기나 한 거야?' 하는 의심이죠. 그래서 시작할 때 아예 나이와 아이 둘을 키운다는 사실을 밝혀놓고 시작합니다. 부모님들께 신뢰의 시선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동기부여를 주기 때문에 나쁘지 않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책을 펴내고 강의를 자주 다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내 이름 옆에 ‘책 놀이 전문가’, ‘육아 전문가’ 등 ‘전문가’라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의심’의 시선이 ‘의존’의 시선으로 바뀝니다. 드디어 강적을 만난 것이죠. 나는 참 난감합니다. 

내 아이와 같은 연령대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어떤 책을 읽히는지, 독서 목록을 추천해줄 수 있는지 여쭤보고, 자신이 구매하려고 하는 책이나 프로그램이 있는데 괜찮은지 여쭤봅니다. 스스로한테 물어야 할 질문을 받을 때는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난감한데, 원칙적으로 답하면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되돌아섭니다. 이런 경우를 계속 경험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질문은 답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동양철학을 ‘나를 향하는 마음공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동양철학은 ‘나’로부터 출발하고 ‘나’로 되돌아오는 여행입니다. 동양학을 만들어낸 철학자들이 던진 메시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자신감 때문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집안의 큰 어른인 까닭은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거나, 다른 사람이 책임을 가져가면 힘의 흐름이 그 사람에게 갑니다. 가장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정치지도자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예외 없이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정치를 합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권력공백'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공자가 사랑한 제자 자로가 공부한 방식을 보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동양철학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아직 실천하지 못했다면, 또 다른 가르침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 <논어> 5-13

대구의 어머니들과 강의 겸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습니다. 몇 분의 어머니 중에서 유독 한 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칭찬 놀이’를 하면서 서로의 좋은 점을 이야기할 때 그 어머니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은 다른 어머니들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 분의 생각과 육아 철학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육아서나 육아 프로그램을 보거나, 육아 강의를 들으면 그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참조할 뿐이에요. 나의 아이, 나의 가족이니까요.”라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부모님들께 듣고 싶은 바로 그 대답이었거든요. 

내가 의존적인 부모님들의 태도를 불편해 하는 까닭은 그 결과를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에 대해서 부모님이 의존하는 태도를 보이면 육아시장과 사교육 시장에서는 전문성을 상품으로 만들어 부모님들에게 영업을 합니다. 부모님의 불안한 마음을 만져주는 영업 전략은 대개 성공합니다. 문제는 그 집의 아이입니다. 원치 않는 책을 봐야 하고, 원치 않는 교육을 받아야 하거든요. 마치 주권 잃은 국가의 서러운 국민처럼, 부모가 육아 전문가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식민지에 사는 백성처럼 안타까운 신세가 됩니다. 사교육계에 있으면서 이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육아시장이든 사교육시장이든 현란한 '공포 마케팅'을 동원해서 먼저 그 가족의 기를 꺾어서 의존하게 만들려고 힘을 기울이는 마당에, 부모가 먼저 의존을 한다면 무척 반가운 일이죠. 하지만 의존을 하지 않는 부모가 되려면 아이의 행동을 자세히 살피고,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고, 아이가 즐겨 읽는 책을 자주 읽으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선택과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거든요. 그런데 의존을 하는 부모님들은 대개 쉬운 선택을 합니다. 동양철학이나 인문학을 자주 접하면서 ‘나’를 들여다보면 당연히 의존할 일이 없어지지만, 육아서에 의존하면 의존할 일이 자꾸 생깁니다. 이 문제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골치가 아픕니다. 다만 여기서는 의존하고 쉬운 선택을 할수록 아이가 불안정해지고 위태로워진다는 점만을 경고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동양철학은 ‘나의 행위’에 일종의 절대성을 부여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선언에서 풍기는 자신감이 느껴지시나요? 그러니까 동양철학을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나의 사소한 행동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는 구절을 소개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산을 쌓는 것에 비유하면 한 삼태기가 모자라서 이루지 못하고 그쳤더라도 나는 그만둔 것이다. 땅을 고르는 것에 비유하면 비록 한 삼태기를 덮고 나아갔더라도 나는 나아간 것이다.“
- <논어> 9-18

아이를 잘못 키워도 부모님의 책임이며,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도 부모님의 책임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육아 전문가와 아동 심리학자, 그리고 사교육 전문가가 찾아와도 아이에 대해서 부모만큼 전문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부모님들이 자신감을 갖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좋은 육아서 고르는 방법과 좋은 육아 전문가를 만나는 방법에 대해서 소개할까 합니다. ‘어머니께서 잘 모르셔서 그러는 모양인데.’라는 어투를 사용하는 전문가들의 말은 전부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어머니가 잘 모른다면 알 때까지 이해를 시켜줘야지 모르니까 자기의 말을 따르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양철학에서 교육과 토론의 대명사로 평가 받는 공자와 순임금의 방식을 보면 좋은 교육자란 어떤 모습인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운 분이구나. 순임금은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시고 백성들이 하는 말을 세심히 살피기 좋아하시되, 나쁜 것을 몰아내고 선한 것을 드높이되 그 양 끝을 붙잡으시되 그 중에 중심에 합치되는 것을 백성들께 베푸시니 이것이 바로 순임금인 까닭이구나."
- <중용> 6장

공자가 말했다. 
“나는 유식한가? 나는 무지하다. 다만 시골 사람이 나에게 물으면 허심탄회하게 나는 상하·장단의 양면을 인용하여 성의를 다할 뿐이다.”
- <논어> 9-7

그 다음은 ‘불안 마케팅’, ‘공포 마케팅’입니다. 어떤 책을 보거나 교육을 받지 않으면 마치 큰일 날 것처럼 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이 시켜서 구매한 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구매를 해도 불안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육아서를 읽을 때 불안한 마음이 더 강해진다면 덮으셔도 됩니다. 육아 강의를 듣거나 학원 상담을 받았을 때 불안함이 강해진다면 신뢰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은 ‘의도된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편안하게 머무르며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을 무릅쓰며 요행을 바란다. 공자가 말했다. "활쏘기는 군자의 자세와 같으니, (활을 쏘아) 정곡에 닿지 않으면 돌아와서 자신의 자세를 돌이켜보며 찾는다."
- <중용> 14장

조급해 하는 마음은 공격의 표적이 됩니다. 공자와 맹자가 미련해서 뜻을 이루지 못한 걸까요? 고위직 공무원이 되어서 자신의 원하는 정책을 맘껏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요? 사실 동양철학을 읽으면서 나도 이 점이 궁금했습니다. 맹자의 제자 역시 스승의 자세가 답답했나 봅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니다. 

진대(陳代)가 말했다. “제후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도량이 협소한 것 같습니다. 이제 이들을 한번 만나보시면, 크게는 왕업을 성취할 수 있고, 작게는 패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록에는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한다.’ 하였습니다. 아마도 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 <맹자> 6-1장

<논어>나 <맹자> 등 동양철학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의 행동이 무척 위선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뜻을 굽히면 많은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한심하게 생각할까? 공자의 제자 자로도 공자에게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백성도 있고 귀족도 있고 토지신도 있고 곡식신도 있는데, 어찌 반드시 독서를 해야만 배웠다고 하십니까?”라는 말로 스승의 ‘유연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공자는 아예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거지만 사랑을 채워준 만큼 아이들은 자라고, 사랑이 왜곡되거나 편향되지 않고 제대로 전달되는 만큼 아이들이 발전합니다. 인풋(input) 아웃풋(output)의 관계가 명확합니다. 그 사이에 요행은 없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부모님들은 보다 쉬운 방법, 요행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행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만병통치약을 팔았던 사람들과 같죠. 이런 경우 “어디서 약을 팔아?!”라는 반문을 해야 마땅하죠. 맹자는 아이에게 보탬이 된다는 막연한 기대나, 사사로운 욕심으로 요행을 바라는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결국 뜻을 이룰 수 없을 거라고.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한다’란, 이익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만약 이익을 가지고 따진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곧게 하여 이익이 된다면, 역시 하겠는가?
- <맹자> 6-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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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0] 소중한 내 아이에게 함부로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말라


“학교에 독서치료 봉사를 나가고 있는데 한 학생이 ADHD(주의력 결핍/과잉행동 장애(Attention Deficit/Hyperactivity Disorder) 증세를 보였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우리 애가 왜 ADHD냐며 한사코 프로그램을 거부하더라고요. 빤히 증세가 보이는데 왜 그렇게 부정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부모님 강의를 다니다 보면 강호의 고수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독서치료하시는 분을 만나기도 하고, 책 놀이를 하시는 분, 성인 독서 강좌를 강의하시는 분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직업을 내려 놓으면 다들 아이를 키우는 부모죠. 무료로 독서치료 봉사를 하시는 분이 들려주시는 말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 아이가 정말로 주의력 결핍 장애에 걸린 게 맞는지 하는 의심에서부터 그 아이의 부모님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전에는 신문에서 ‘아이들의 스마트폰 중독’ 현상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설령 그런 징후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언어로 규정짓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자 증자의 집 이웃사람이 증자 어머니에게 "증자가 사람을 죽였대요!"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다른 사람이 똑같은 얘기를 하자 증자의 어머니는 불안해했고, 또 다른 사람이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자 증자의 어머니는 짜던 베틀을 던지고 담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이처럼 도량이 넓고 지혜로운 사람도 규정 짓는 말을 여러 번 들으면 진짜가 됩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엄연히 있는데도 우리들은 이름 짓고 규정 짓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나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병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은 스물 한 살 때입니다. 그 때 ‘환자’가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 비로소 환자가 되었습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려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영화를 보러 갔을 때 나는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환자복이 제게 주는 중압감이 상당했습니다. 이름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인데, 함부로 부르니 위험합니다. 부모님들이나 매체에서 아이들에 대해서 심리학적 용어를 구사할 때 보게 되는 심리를 생각해봤습니다. ADHD, 조울증, 분리불안 등 심리학 용어가 우리 문화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지만, 마치 말을 처음 배운 아이가 눈에 보이는 것에 자기가 배운 단어를 다 들이대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나의 세 살 민서는 '친구'라는 단어를 배웠는데, 호랑이와 고양이가 닮았으니까 '친구'라고 말합니다. 다만 아이와 다른 점은 마치 사실인 양 착각하며 폭력적인 양상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카드모스 왕 이야기는 언어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상징합니다. 카드모스는 페니키아 알파벳을 그리스에 최초로 들여온 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카드모스 신화에서는 알파벳을 '용의 이빨'로 묘사됩니다. 미디어 전문가 마셜 매클루언은 카드모스 신화를 분석하면서 언어의 폭력성을 통찰했습니다.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신화(카드모스 왕과 알파벳)도 오랜 과정을 한 순간 번뜩이는 통찰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알파벳이란, 권력과 권위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군사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의미했다... 보다 배우기 쉬운 알파벳과 가볍고 값싸며 들고 다니기 편리한 파피루스의 등장으로 인해 권력은 승려 계급에서 군인 계급으로 넘어갔다. 도시국가들의 몰락과 제국 및 군인 관료층의 발흥 등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카드모스와 용의 이빨에 관한 신화에 함축되어 있다. 
-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커뮤니케이션북스), 169쪽

서양의 언어가 맹수의 이빨처럼 덮썩 무는 특성이 있는 반면, 동양의 언어는 비유와 은유로 에둘러 표현합니다. 정확성보다는 은은히 의미를 풍기고 생각할 시간을 위한 '틈'을 잊지 않습니다. 예전에 서당에 다닐 때 훈장님이 들려주신 조선자 생각이 납니다. 어느 할머니와 딸이 한복집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딸은 어머니에게 한복 만드는 법을 배운 데다 공부까지 많이 해서 제법 규모 있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할머니의 한복점을 많이 찾았고, 딸의 한복점은 장사가 잘 안 되었습니다. 딸이 의아하게 생각해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손가락 마디만 한 조선자를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자는 눈금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옷을 지으러 오는 사람에 따라서 때로는 길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짧게 할 수도 있습니다. 조선자에는 ‘틈’이 있었고, ‘틈’ 속에는 할머니의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까지 딸에게 전수해 줄 수는 없었겠죠. 정확한 치수를 재며 한복을 만든 딸의 제품을 입은 사람들은 왠지 몸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할머니의 한복점을 찾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장자>에 나오는 바퀴 고치는 노인의 이야기에서도 알려줄 수 없는 모호한 진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신이 하는 일로 본다면 바퀴를 깎는데 느슨하게 하면 헐거워 견고하지 못하고 단단히 조이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슨하지도 않고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으로 얻어지고 마음으로 감응할 수 있을 뿐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치란 그런 사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신도 신의 아들놈에게 가르쳐줄 수 없고 신의 아들 역시 신에게서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칠십 년을 일하며 늙었으나 아직도 수레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 <장자> 13-11

중국에서 예부터 내려오던 말 중에서 ‘자[尺]’에도 짧은 데가 있고, ’치[寸]‘에도 긴 데가 있다’도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나라의 충신(忠臣) 굴원(屈原)이 참소를 당해서 점을 쳤을 때 나온 점괘에 이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나 장단점이 있다는 뜻이니 규정짓지 말라는 경고를 합니다. 이름 부르는 것을 무서워할 줄 아는 동양의 오랜 문화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이름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어른들이 편협한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덮어씌운 언어라는 ‘딱지’는 아이들을 억누릅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노자와 장자는 이름을 부를수록 도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파멸을 재촉하는 일이라고 작정해서 경고합니다. 말을 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라는 노자와 장자의 오묘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도를 말로 하면 말로 된 도가 도 그 자체는 아니다. 이름을 붙이면 이름이 곧 이름의 주인은 아니다. 이름 없는 것에서 하늘 땅이 비롯되고 이름 있는 것에서 만물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언제나 보고자 하는 마음 없이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면 껍데기 현상을 본다.
- <도덕경> 1장

무시(無始)가 말했다. 
“도는 귀로 들을 수 없다. 들었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눈으로 볼 수 없다. 보았다면 도가 아니다. 
도는 입으로 말할 수 없다. 말했다면 도가 아니다.“
- <장자> 22-14

지금부터 이름을 붙이는 질곡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생각해볼까 합니다. 내가 쓰는 방법은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붙였던 이름을 거둬들이면 오히려 가려졌던 눈이 뜨이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학습만화에 중독된 아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 문의를 하십니다. 나는 ‘중독’이라는 말을 먼저 제거합니다. 학습만화를 다른 장르에 비해서 유독 즐기는 것일 뿐 ‘중독’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학습만화’를 건드립니다. 아이가 학습만화에 몰입하는 이유는 학습만화에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학습만화가 원인이라면 집에서 학습만화를 모두 없애버리면 원인이 해결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학습만화를 다 치웠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개중에서는 학습만화를 치웠더니 아이가 학습만화를 보지 않고 좀 나아졌다고 말씀하시는 부모님도 계십니다. 나 스스로가 어렸을 적에 만화책에 몰입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는 다만 부모의 눈을 피해 학습만화를 볼 뿐입니다. ‘학습만화 중독’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부모님은 문제를 단순화해서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육아 문제를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어떤 부모가 육아를 이렇게 힘들어 하겠습니까? 애초부터 몇 마디 말로 원인을 찾고 정리하려는 습관을 버리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의 학습만화 문제 때문에 애를 태우는 부모님들의 질문을 받으면 나는 동요를 불러드립니다.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동요 ‘어른들은 몰라요’ 일부)

여기까지 멈춘 후 다음 구절이 무엇인지 부모님께 여쭤봅니다. 이때 부모님들의 표정과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마치 준비 안 된 질문을 받을 때의 당황스러운 표정! 나는 노래를 이어서 부릅니다.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동요 ‘어른들은 몰라요’ 일부)

참으로 감동적인 모녀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한 어머니는 가끔 딸과 함께 호텔 예약을 한다고 합니다. 호텔에 갈 때는 커다란 트렁크에 만화책을 가득 담고 갑니다. 2박3일 동안 맛난 음식 먹으면서 실컷 만화책을 보지요. 얼마 전 그 어머니의 대학생 따님을 만났는데 자신의 생각과 비전이 뚜렷했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엄마와 호텔에서 만화책 보던 그 때가 참 즐거웠다고 회상하더군요. 나도 그 모습을 상상하니 행복했습니다. 만화책을 좋아하는 딸의 욕구를 흠뻑 채워준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만화책'과 '엄마', '자유'가 모두 반영되었다는 점입니다. 아이 혼자 호텔방에서 만화책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감옥'입니다. 엄마가 함께 놀면서 만화책을 보았기 때문에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아이가 무엇인가 집착한다는 것은 욕구불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부분이 불만인지는 아이에 따라 다르겠지요. 학습만화에 몰두하는 아이는, 학습만화를 볼 때 부모의 표정이나 반응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을 때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는 무척 큽니다. 학습만화를 볼 때마다 그런 껄끄러운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아예 채워주라고 합니다. 아이와 학습만화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는 에너지를 조금 할애해서 아이와 함께 학습만화를 재밌게 보거나, 아예 서점에 가서 학습만화를 사서 아이와 함께 보는 것을 권합니다. 좀더 나아간다면 부모님이 학습만화를 재밌게 읽고 나서 좋았던 이유를 아이에게 말해주고, 아이 역시 학습만화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이야기하게 합니다. 아이는 부모님이 학습만화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긍정해주는 것을 느끼고 불만이 해소됩니다. 이제 학습만화는 다른 장르 중의 하나일 뿐이지요. 아이가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 특히 어떤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학습만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부모님이 학습만화를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이름’을 붙임으로써 없던 긴장과 욕구불만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의심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조언도 분명히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검증입니다. 부모가 주변의 우려와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검증을 해보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길에서 들은 말을 길에서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 <논어> 17-14

학습만화 중독, 스마트폰 중독, ADHD 등 우리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보이거나 주변에서 보인다고 하거나, 심지어 소아정신과 의사가 그렇게 진단한다고 하더라도 규정을 짓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고 틀림없는 이름은 바로 ‘내 아이’, ‘내 가족’입니다. 소중한 내 아이에게 함부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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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9] 최고의 조건은 '무조건'


“아빠, 밥 먹으면 TV 틀어줄 거야?”
“엄마, 착하게 있으면 또봇 사줄 거야?”

아이들을 움직이기 위해서 가끔 ‘사탕’이나 ‘TV' 같은 조건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그 맛을 알아버려서 먼저 조건을 제시합니다. 아이들이 “~하면 ~해줄 거야?” 화법을 쓰는 까닭은 부모님이 먼저 “~하면 ~해줄게.”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비단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만 조건을 붙이는 게 아니라 부부 사이에도 조건을 붙입니다. 설거지를 하면 쓰레기는 당신이 버리라는 식의 대화는 일상에서든 주변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부턴가 조건을 제시하는 말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가치가 자꾸 내려가는 느낌 때문에 기분이 나빴거든요. 조건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조건에 익숙해진 일상생활이야 더 말할 것이 있을까요? 제가 오랫동안 외우고 다니는 스피노자의 말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복(至福)은 덕의 보수가 아니라 덕 자체이다. 우리들은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 스피노자, <에티카>

이 말을 들여다 볼 때마다 나는 ‘가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최고의 조건은 역시 ‘무조건’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실 때 조건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워낙 사회가 계산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지만, 가족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의 선비들은 만인의 존경을 받고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값어치’는 그냥 매겨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무조건’의 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 제나라에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조나라가 장평에서 진나라에게 패해 45만명이 목숨을 잃고 급기야 한단까지 공격을 당하는 위급한 상황을 만났는데, 노중련이 지혜를 써서 조나라를 위기에서 건져 주었습니다. 조나라의 왕족들은 노중련에게 땅(봉지)를 보내주기도 하고 천금을 내놓기도 했지만 노중련은 한사코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에서 선비가 귀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다른 사람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다툼을 풀어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장사꾼의 행위입니다. 저는 이런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 사마천, <사기열전>, ‘노중련·추앙 열전’

노중련이 땅과 황금을 받았더라면 순식간에 조나라를 위해 부역한 값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거래’가 되지만, 노중련이 보물을 사양했기 때문에 ‘선비의 고결한 지혜’로서 찬사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이집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려가는 시간이 늦어서 직원들이 퇴근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이집은 고민 끝에 시간이 늦을 때마다 소액의 벌금을 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벌금 제도를 시행하고 나서 아이들을 늦게 데려가는 부모님들의 수가 훨씬 더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집은 결국 벌금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을 늦게 데려가는 부모님들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늦은 시간에 아이를 맡아주는 부모님들의 미안한 마음을 돈으로 대신하려고 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간의 귀한 가치인 ‘감사’와 ‘미안함’(부끄러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한번 사라지고 난 가치는 다시 돌아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오줌을 싸는 일, 숟가락을 잡는 일, 잠을 자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행동입니다. 부모된 자로서 이런 귀한 행동에 ‘값어치’를 매겨서야 쓰겠습니까? 부모와 자식이 거래 관계가 되어버리면 앞서 소개한 어린이집처럼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조금씩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도인지도 모릅니다. 노자와 장자는 반복해서 이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양자(楊子)가 송나라에 가서 여인숙에 묵었다. 여인숙에는 첩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미인이요, 하나는 못생겼다. 그런데 주인은 못생긴 첩은 위해 주고 미인 첩은 천대했다. 양자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주인이 말했다. 
“미인 첩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므로 나는 그가 아름다운 것을 느끼지 못하오. 못생긴 첩은 스스로 못생긴 줄 알고 있으므로 나는 그가 못생긴 것을 느끼지 못하오.”
양자가 말했다. “제자들아! 기억해 두어라! 행실이 어질지라도 스스로 어진 행실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그러면 어디를 간들 사랑받지 않겠느냐?”
- <장자> 21-11

옛말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죠. 이 말을 응용하면 평소에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죄’를 ‘착한 일’로 바꾸면 “착한 일을 한 사람을 사랑하되, 착한 일은 사랑하지 말라.”가 되지 않을까요? 부정적인 상황에서는 문제 중심적인 관점으로 대응하고, 긍정적인 상황에서는 사람 중심적인 관점으로 대응하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민준이가 옷을 스스로 잘 입어서 TV를 틀어달라고 하면 “민준이가 옷을 잘 입어서 TV를 틀어주는 게 아니야. 옷을 잘 입으면 멋진 어린이야. 아빠는 멋진 어린이가 해달라는 것을 해주고 싶어.” 이렇게 인과관계를 바꿔 버리면 ‘옷 입는 일 = TV 보기’의 공식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옷 잘 입은 값으로 받는 게 아니라 옷 잘 입는 아이를 예뻐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선물을 주는 것이지요. 어릴 적에 상장을 받으면 ‘부상’이 따라 나왔습니다. 나는 공책이나 연필 같은 부상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듯, 시간이 흐를수록 ‘부상’이 더 커지니까 주객전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부상으로 자동차를 준다든지 현금을 준다든지 하는 현상이 많아지니까 사람들이 ‘염불보다 젯밥’에 더 관심을 갖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예전에는 상장에 새겨진 ‘뜻’에 즐거워했습니다. 물신화(物神化) 현상이 심해지다 보니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선물’이나 ‘조건’이 몸에 밴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을 조건의 방정식 속에 가두기보다는 뜻을 높여주고 아이들 자체를 치켜세워주는 가정문화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무엇을 끈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어의 말은 무너져 가는 현대의 가정에 울림을 줍니다. 

자유가 효를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오늘날 효는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 모양이지만 개나 말도 모두 봉양은 한다.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이 다르겠는가?" - <논어> 2-7

자하가 효를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부모를 대하는 안색이 어려운 것이다. 일이 있으면 자제들이 노고를 맡으며 술과 음식이 있으면 어른에게 올리는데 어찌 이것만으로 효라 하겠느냐?" - <논어> 2-8

앞서 상장보다 부상이 커진 일을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바로 물질의 생리입니다. 물질은 욕망에 비례해서 커지는데, 재밌는 것은 물질은 한계가 있는 반면 욕망은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어떤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 ‘조건’을 제시한다고 칩시다. 조건은 점점 더 커지고 세밀해질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약 아이가 부모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할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러한 게임의 법칙을 만든 것은 부모님이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조건이란 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조건 뒤에 따라 붙는 것은 '물질'입니다. 물질은 조건 못지 않게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가정일수록 물질이 아이들 옆에 붙어 있기 쉬운데, 아이 옆에 붙은 물질은 아이의 영혼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원흉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게 무서운 경고를 내리는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미성년자 음주운전 사건 하나가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16세 소년이 친구들과 마트에서 맥주를 훔친 뒤 음주운전을 하다가 낸 사고로 4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는 허용치의 3배가 넘었죠. 미국은 고소인의 가정환경 등 사고와 관련된 정보를 다각적으로 검토해 판결을 내리는데 아버지의 증언이 무척 의미심장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평소 아들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줬지만 ‘부자병(Affluenza- 풍요로울수록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질병으로 스트레스, 감정 통제 불능 등의 증상 동반)’ 증상이 심해 통제가 어려웠다”며 선처를 호소했고, 최소 징역 20년 형이 예상된 재판 결과는 보호관찰 10년형 선고로 변경되었습니다. 재판부가 부자병을 인정한 것이지요. 

가족은 거래관계를 뛰어넘는 특수관계자입니다. 지금까지 조건과 물질로 소통하던 방식을 뒤로 하고, 부모와 자식이 새로 ‘관계맺기’를 하는 일인데, 쉬울 수는 없겠지요. 부모와 자식은 ‘조건’을 교환하는 ‘거래 관계’는 아니지만, 특별한 ‘계약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무엇’으로 묶여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가(假)나라 사람이 도망친 이야기’를 들으면 부모와 자식을 묶는 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물질과 조건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세요. 

“임회(林回)라는 자는 나라가 망하자 천금의 구슬을 버리고 갓난아기를 업고 도망쳤는데, 혹자가 물었소. 
‘돈으로 따진다면 갓난아기는 값어치가 작고 짐으로 따진다면 갓난아기는 거추장스러운 짐인데 천금의 구슬을 버리고 갓난아기를 업고 도망치니 어인 까닭이오?’
임회가 답하길 ‘구슬은 이(利)로써 결합되는 것이지만 아이는 천륜(天倫)으로 묶여 있다’고 했소. 대저 이(利)로써 결합된 것은 궁핍, 재앙, 환난, 손해가 닥치면 서로 버리는 것이지만 천륜으로 묶인 것은 궁핍, 재앙, 환난, 손해가 닥치면 서로 거둬들이는 것이라오. 서로 거둬들이는 것과 서로 버리는 것은 거리가 먼 것이오. 또한 군자의 교류는 맑아 물 같고 소인의 교류는 달아 식혜 같소. 군자의 교류는 맑기에 친해지고 소인의 교류는 달기에 끊어지오. 돈이란 까닭 없이 모였다가 까닭 없이 흩어지는 것이오.“
- <장자>,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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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8] 여중생과 고대 어머니의 지혜


엄마들과 논어 읽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에게 갚지 못할 은혜를 받았는데, 이렇게 커서도 어머니들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엄마들을 만나면서부터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거든요. 어머니에게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사랑입니다. 처음에는 소심하게 책 놀이를 주로 하다가 점점 대범하게 인문학 이야기와 동양철학까지 세상에 꺼내 놓을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어머니들의 지지가 컸습니다. 대강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들을 볼 때도, 작은 소강당에서 몇몇 어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나를 바라보고 응원하는 눈빛을 받으며 힘을 얻었습니다. 나는 바로 이게 어머니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나는 <논어>를 스승 공자와 제자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소개했는데, '논어 읽는 엄마'는 공자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과 만나는 공간입니다. 작은 모임이지만 논어 읽기 모임에 참여한 어머니들은 무척 열정적이고 따뜻했습니다. 모임에 참여한 어머니들의 일성을 몇 개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번도 논어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요. 아이에게 고전을 읽혀야 하는데 제가 먼저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너무 생각없이 그냥 하루하루에 너무 매진해서만 사는 것 같고. 너무 무식한 것 같아서"

"제가 항상 제 시각으로만 남을 판단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논어에서 가르쳐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다 같이 공부하고 싶었어요."

"자식한테만 읽어라 읽어라 할 게 아니라 대화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왔어요."

엄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가르쳐주는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합니다. 도서관에서 한참 글을 쓰다가 배가 고파서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거기에는 여중생 두 명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여중생들과 동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중생들이 대화가 참 재밌었어요.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는데, 우리 엄마는 뒤끝이 없어. 나랑 대판 싸우고 나서 십 분도 안 지났는데 완전 밝은 얼굴로 밥 먹으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인간관계가 엄청 멍청해. 나도 그걸 닮았는데, 그건 바꾸고 싶지 않아."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여중생이 맞장구를 칩니다. 

"나도 엄마 닮아서 인간관계가 엄청 멍청한데, 초등학교 때 그것 때문에 피본 케이스야. 하지만 나도 그걸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어."

상당히 거칠게 말했는데 '인간관계가 멍청하다'는 여중생의 표현에는 어머니의 속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뜻을 굳이 풀어본다면  "피해를 주건 이익을 주던 넓고 깊게 사람을 포용하는 태도", "계산적이지 않은 모습"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 어머니의 그 딸입니다. 

역사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왔습니다. 로마의 건립 초기에는 여자들이 부족해서 '여자 훔쳐오기'가 국가정책이었습니다. 로물루스가 다스리던 로마는 이웃 부족인 사비니에서 많은 여성들을 강탈해갔습니다. 사비니 부족은 오랜 시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양군은 베스타 신의 성전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로마에 잡혀 갔던 사비니의 여인들은 눈물 맺힌 호소로 양쪽 진영을 감동시켰고 휴전협정을 맺게 됩니다. 어떤 장군이나 유세가도 할 수 없었던 여성의 위대한 승리는 여중생이 말했던 '멍청한 인간관계'와 묘하게 닮았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왜 우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렇게 심한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는 억울하게 폭력에 의해 붙잡혀 왔어요. 또한 형제나 부모, 친척들로부터도 그렇게 오랫동안 버림받아 왔지요. 그런데 한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그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 얽매어 있는 지금, 우리는 또다시 그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죽는 것을 보며 울부짖어야 하나요? 우리가 처녀로 있을 때에는 구출하러 오시지도 않더니, 지금에 와서야 아내와 어머니가 된 우리를 남편과 자식들로부터 떼어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이것은 그 옛날에 우리를 버리고 돌보시지 않은 것보다 더 심한 일이에요. 저들의 사랑과 당신들의 열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해야 할까요? 만일 다른 어떤 이유로 전쟁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보아서라도 사위와 손자가 된 사람들에게만은 손을 대지 마세요. 만약 우리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데려가세요. 하지만 우리와 함께 당신의 사위와 손자까지 도 데리고 가세요. 우리를 부모와 형제 품으로 돌려보내셔도 좋지만 우리 남편과 자식들을 빼앗아가진 마세요. 제발 애원하느니 이제 또다시 우리를 납치해 가지는 마세요."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로물루스' 편

휴전협정 역시 독특한데, 전쟁을 종식시킨 여성들의 명예가 담겨 있습니다. 휴전문의 내용은 남편과 같이 머물러 있고 싶은 여자는 그대로 살되, 단 실을 잣는 일 이외의 모든 집안일은 하지 말 것. 그리고 로마인과 사비니 인은 시내에 함께 살되, 시의 이름은 로물루스의 이름을 좇아 로마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남자들은 위와 같은 처지가 되면 복수의 칼날을 갈고, 목숨을 던지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죠. 사비니의 여성만큼은 아니지만 45만명의 목숨을 살리려고 했던 조괄의 어머니도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운명을 결정지은 조나라와 진나라의 장평(長平) 전투에서 조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장군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조괄의 병서'라는 속담이 전해지는데, 실전 경험 없이 책에만 의존하는 못난 사람을 의미하는 속담입니다. 조괄의 어머니는 자식이 나라의 대장군이 되었지만 임금에게 대장군 임명을 취소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45만의 조나라 아들들을 염려한 조괄 어머니의 눈물어린 설득은 사마천이 생생하게 기록에 남겼습니다. 

"예전에 제가 조괄의 아버지를 모셨을 때, 그 당시 제 아들의 아버지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여살리는 자가 수십 명이고, 벗이 된 사람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왕이나 종실(宗室)에서 상으로 내려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었고, 출전 명령을 받으면 그 날부터 집안 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아들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어 동쪽을 향해 앉아서 부하들의 인사를 받게 되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누구 하나 제 아들을 존경하여 우러러보는 자가 없었습니다. 왕께서 내려주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 집에 감추어두고, 날마다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둘러보았다가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어찌 그 아버지와 같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와 자식은 마음쓰는 것부터 다릅니다. 부디 왕께서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 사마천, <사기열전>, '염파·인상여 열전'

조괄 어머니의 진심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조나라 효성왕은 대장군 임명을 강행했습니다. 조괄의 어머니는 체념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제안을 합니다. 

"왕께서 굳이 그 아이를 보낸다면, 그 아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저를 그 아이의 죄에 연루시켜 벌을 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 위와 같은 책 

조괄이 대장군으로 임명되자 군령을 모두 밖고 군대의 벼슬아치들을 모두 교체시키자 조나라 군대는 술렁였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나라는 조나라 군대의 식량 운송로를 끊고 허리를 끊어버렸습니다. 결국 45만명이나 되는 조나라의 군사는 모두 전사하거나 굶어죽거나 생매장을 당하고 나이가 어린 병사 240명만 조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기세가 오른 진나라는 조나라 서울인 한단을 포위해 1년이나 조나라를 괴롭혔습니다. 조나라 왕은 조괄의 어머니에게 한 말이 있기 때문에 그녀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들은 보는 눈이 다릅니다. 이러한 점을 발전시키고 꽃피우게 할 수 있다면 가족에게도, 사회에게도 커다란 행복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들이 '나' 속에 담긴 여러 가지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어머니 스스로도 노력하고, 가족들도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어머니 안에는 '나', '아내', '어머니', '친구', '직장인' 등 여러 가지 자아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아내'나 '어머니'라는 자아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어머니들이 다양한 자아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면 어머니 스스로도 행복하고 가족도 행복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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