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9. 노자가 말하는 아빠의 생존전략
노자 <도덕경>에 아빠는 없지만 엄마와 아기 이야기는 숱하게 나옵니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아빠 이야기나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 살펴봤지만 노자는 당최 아빠 생각이 없나 봅니다. 노자의 '엄마 예찬론' 들어보실래요?
큰 나라는 하류라, 천하가 모이는 자리요 천하의 암컷이다. 암컷은 가만히 있음으로써 수컷을 이기고 가만히 있음으로써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큰 나라를 얻는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는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얻고 어떤 나라는 아래에 있어서 얻는다. 큰 나라는 남을 함께 기르려고 하는데 지나지 않고 작은 나라는 들어가서 남을 섬기려고 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두 나라가 저마다 바라는 바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큰 나라가 마땅히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 노자, <도덕경> 61장
노자와 공자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노자와 공자의 생몰연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공자는 C551년~BC479년, 노자는 BC604년~BC531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노자에게 도에 대해서 물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자의 사상과 노자의 사상을 비교해 보면 노자가 공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음과 양 중에서 공자는 양, 노자는 음을 상징하고 여성과 남성 중에서 노자는 여성, 공자는 남성을 상징하는데, 노자가 볼 때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원인입니다. 세상이 공자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만큼 혼란이 심해진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묵점 기세춘 선생 같은 학자들은 <도덕경>이 <논어> 이후에 완성된 것이고, 여러 명이 저술에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방각본 고전문학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완성된 것이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라는 시인이 개인이 아니라 직책이거나 여러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도덕경>은 일대 혼란기를 살았던 민중들의 울분과 통찰이 담긴 철학으로 읽힙니다. 당시 민중들이 보기에 권력자들이나 지식인,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너무 편협해 보였던 거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장자>를 저술한 '장주'라는 철학자는 <도덕경>의 취지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언어로 노자의 철학을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장자를 노자의 주석가라는 주장도 나오는데, 엄밀히 보면 노자의 철학과 장자의 철학은 차이점도 많습니다. 노자의 철학에 동의하는 장자의 <장자>라는 책에는 공자와 노자가 대화를 나누는 우화가 담겨 있는데,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장자의 '소설'로 읽어 주십시오.
노담이 "어디 묻겠는데, 인의가 인간의 본성일까요?" 라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군자란 어질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의롭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인의는 정말 인간의 본성입니다. 또 무엇을 할 게 있겠습니까?" 노담이 말했다. "묻겠는데, 무엇을 인의라 하는 거요?" 공자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즐기며 기뻐하고 널리 사랑하여 사심이 없는 것, 이것이 인의의 참모습입니다." 노담이 말했다. "아, 말세의 쓸모없는 소리로다. 저 널리 사랑한다는 따위는 너무도 먼 일이 아니겠소. 사심을 없앤다는 게 곧 사심이오. 당신이 만약 이 천하의 순박함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면 말이오. [저 자연을 보시오] 곧 천지에는 본래부터 일정한 법칙이 있고, 해와 달에는 애초부터 밝은 빛이 있으며, 별은 본래부터 하늘에 즐비하고, 새와 짐승은 애초부터 무리를 이루며, 나무들은 본래부터 대지에 서 있소. 당신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어도] 덕에 의거해서 행동하고 도를 따라서 걷고 있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오. [더 이상] 또 억지로 애써서 인의를 내걸고 북을 두드리며 도망자를 찾는 따위 짓을 어째서 할 필요가 있단 말이오? 아, 당신은 인간의 본성을 어지럽히고 있소."
- 장자, <장자> 13-8
'노담'은 노자의 다른 이름입니다. 공자는 고대의 가치를 회복해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개인적으로는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남성'입니다. "사십이나 오십이 되어도 성취한 바가 없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도 두려워할 게 못되는 사람이다."(논어9-22)라는 말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노자는 이와는 많이 다르죠. 노자가 <도덕경>에서 어떻게 엄마를 찬양하고 아빠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지 가정생활과 육아의 관점에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가사와 육아. 이 두 글자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엄마라면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사와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아빠들은 어느 정도 추측만 할 뿐이죠. 집안일은 무한반복됩니다.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나요? 요리도 해야 하고,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 입맛에 맞게 바꿔줘야 하고, 먹고 나면 설거지도 해야 합니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사람 수만큼 빨래가 쌓이는데 세탁기 돌리고 탁탁 털어 널고 마르면 걷어서 개킨 다음에 꺼내 입을 수 있도록 자리에 놓아야만 옷을 다시 꺼내 입을 수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 일반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는 쌓여만 갑니다. 틈틈이 쓸고 닦고 청소하지 않거나, 이불을 털어서 일광욕을 시켜주지 않으면 어김없이 아이들이 콜록콜록 기침하고 열이 납니다. 아이가 어리면 이런 주사 저런 주사를 맞으러 다녀야 하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크고 작은 '앓이'를 하면 병원에도 자주 갑니다. 반복되는 일을 한번이라도 넘기면 악취와 아비귀환이 벌어집니다. 자기 옷을 찾아서 헤매는 아이들, 양말을 못 찾아서 방황하는 아빠들. <돼지책>이라는 그림책을 보면 집안일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홀로 우뚝 서서 바뀔 줄을 모르고 두루 행하되 잠시도 쉬지를 않으니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도덕경 25장)는 구절은 마치 고단한 엄마의 심정을 알고 한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엄마가 있는 집에서는 마치 자동으로 모든 집안의 사물들과 옷가지와 음식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엄마의 노동이 다 들어간 거죠. 그래서 가정이 편안해집니다. 남편이든 아이들이든 모두 집안의 엄마에게 의존을 하고 있습니다.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고마워하기보다는 당연하게 여기죠. 이렇게 엄마는 집안의 주인이 됩니다. 일을 하면 주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되는 게 인생의 법칙이니까요.
강과 바다가 넉넉히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은 그것들 아래에 있기 때문이요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백성 위에 오르고자 할 때에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할 때에 반드시 몸을 뒤에 둔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백성 위에 오르지만 그들이 무거워하지 않고 백성 앞에 서지만 그들이 해를 입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온 세상이 그를 기꺼이 받들어 모시되 싫어하지 않거니와 다투지를 않으므로 세상이 그를 상대하여 다툴 자가 없다.
- 노자, <도덕경> 66장
아빠들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회사 생활 힘들다, 때려 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집안 일하랴 아이들 돌보랴 가뜩이나 힘든 엄마에게 아빠의 '회사 때려 치겠다'는 말은 무척 스트레스를 줍니다. 아빠가 회사 일 힘들다고 말할 때는, 회사 일을 하는 자신에 대한 은근한 과시가 담겨 있습니다. 푸념조로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의 과시가 있는 거죠.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합시다! 노자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옳다 하는 자는 인정받지 못하며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우두머리가 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도에서는 일컬어 찌꺼기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 하여 도는 언제나 이것들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를 지닌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 노자, <도덕경> 24장
지금도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는 남편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자가 볼 때 이런 모습은 허무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아빠의 권위가 얼마나 갈 것 같으신가요? 가정의 권력관계는 생명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를 중심으로 힘이 이동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가장 많이 돌보고 아이가 편안해하는 사람이 이른바 '실세'가 됩니다. 아이가 편안해하는 사람이 꼭 엄마일 필요는 없지만, 아빠가 그렇게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도덕경>에는 집안에서 큰소리치고, 유세 부리고, 권위를 내세우는 아버지에게 경고를 해놓은 구절이 무척 많습니다. 두 개만 소개합니다.
자연은 거의 말이 없다. 그러므로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내내 불지 않고 소나기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 누가 이러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이 이렇게 오래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 노자, <도덕경> 23장
모든 사물은 강장(强壯)해지면 노쇠하니 이를 일컬어 도에 어긋난다고 하거니와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난다.
- 노자, <도덕경> 30장
나는 <도덕경>을 읽으면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생존전략을 찾았습니다. 아빠가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포지셔닝, '신의 한 수'는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인 남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석 시인의 '오라 망아지 토끼'라는 시에는 압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린 백석이 망아지를 달라고 조르면 아버지는 길가에서 "매지('망아지'의 함경도 방언)야 오나라, 매지야 오나라"를 커다랗게 외치며 아이의 마음을 달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백석 시 곳곳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나는 백석의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다정다감하긴 했지만 어머니에게는 권위적이었습니다. 집에서 목소리를 높일 때가 많으셨죠.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기가 꺾이고 영향력이 어머니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편과 아버지가 젊고 힘이 있을 때 해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들, 가족들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 살, 다섯 살인 아이들인 20년쯤 지났을 때는 저보다 힘이 강성해질 것입니다. 그때 약해진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아이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할까? 그것은 지금의 나 하기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랍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눌려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철학적으로 확정해준 사람이 바로 노자입니다. 아빠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아빠에게 살 길을 마련해준 노자는 역시 요물입니다. 아빠들을 들었다 놨다 하거든요. 강한 것은 곧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말이거든요. 약하고 부드럽고 낮은 것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양의 족속들', 즉 강하고, 남성적이고, 지위가 있고, 경제력이 있고, 여러 가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생존할 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한 노자의 말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약하다가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지며 만물 초목이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다가 죽으면 바싹 말라 단단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이런 까닭에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나니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있다.
- 노자, <도덕경> 7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