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12. 장자에게 배운 아내 사랑


고소영과 장동건이 결혼할 때 생각나시나요? 장안이 떠들썩했죠. 팬들은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연인처럼 마음이 허무해지는 고통을 호소하고 위로를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연예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죠. 옛날 중국에 살았다던 한 사나이는 만나는 사람이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좋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를 본 여자들은 두 번째 부인이라도 좋으니 같이 살고 싶다고 부모들을 졸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그 남자가 그 나라에서 가장 못생긴 사나이였다는 겁니다. <장자>에 나오는 '애타타(哀駘它)'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에 한 추남이 있는데 이름이 애타타라 합니다. 사내들이 그와 함께하면 사모하여 떠날 줄 모르고, 여인들이 그를 보면 부모에게 떼를 쓰길 '남의 처가 되느니 차라리 그의 첩이 되겠다'고 하고, 수십 명의 여인들이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그가 무엇을 창도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다만 항상 화락하게 한다는 것뿐입니다. 군주나 대인의 자리도, 남을 죽음에서 구한 일도 없고, 녹이 많아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가망도 없으며 도리어 추하여 천하를 놀라게 할 뿐입니다. 화락할 뿐 어떤 주장도 없고 지혜도 드러나지 않는데도 남자고 여자고 간에 그 앞에 모여듭니다. 이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인이 그를 불러보았더니 과연 천하가 놀랄 만큼 추했으나 그와 함께 기거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과인은 그의 사람됨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도 못 되어 과인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마침 재상 자리가 비어 있어 그에게 국정을 맡기려 했습니다. 그는 번민하다가 후에 승낙은 했으나 마음으로는 사양하는 것 같았습니다. 과인은 부끄러웠으나 결국 나라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는 과인을 떠나 가버렸습니다. 과인은 슬픔에 잠겨 죽을 것 같습니다. 마치 나라에 더불어 즐거워할 사람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 <장자> 5-4

<장자>에는 장애인, 꼽추, 절름발이, 봉사, 미치광이 등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추남'도 단골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못 생기고, 추하고, 피하고 싶은 인물들을 통해서 선입견과 집착을 걷어내고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장자가 사용한 장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장자 시대에는 사람 목숨이 파리보다 더 천하게 취급받고, 어처구니 없는 명분으로 발꿈치를 잘려 절름발이가 된 사람이 유난히 많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극단적인 시대였기에 장자가 초인적인 힘으로 철학을 펼쳐냈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그런데 '애타타'라는 추남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나라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이 사모하게 만들었을까요? 아직은 비밀입니다. 애타타가 멋진 남자라면, 애타타를 탄생시킨 장자는 얼마나 멋진 남자일까요?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동양철학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 중에서 '장자'를 제외하고는 남자다운 사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설명했듯 '노자'는 개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에서 아내를 사랑한 남편 이야기를 통해서 동양철학이 부부의 문제, 특히 아내에 관한 문제를 무척 중시한다고 쓰고 싶지만 솔직히 부부에 대한 문제 중에서 모범으로 쓸 만한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앞서 소개했듯 공자와 공자의 아들은 모두 홀아비이고, 맹자는 아내 얘기는 하나도 안 했죠. 중국의 영웅 중에서 '오기'라는 장군은 아내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장군 승진을 위해서 제나라의 아내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오기는 팔에 심각한 상처가 난 병사의 고름을 직접 빨아서 치료를 해주었는데, 어느 날 병사의 아내가 오기를 찾아와 제발 자기 아이의 종기만은 입으로 빨리 말라고 호소를 합니다. 자기 남편이 오기 장군에게 감동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앞장섰다가 전사했는데, 아들까지 당신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는 거죠. 한비자의 아내 얘기도 유명한데, 어느 날 한비의 아내가 '제발 우리 남편에게 베 백 필만 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 옆에서 보던 한비가 백 필보다는 오백 필이나 천 필은 어떠냐고 묻자 아내는 '이보다 많으면 당신은 첩을 살 것'이니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는 거죠. 노자의 <도덕경>은 여성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드러내주었지만 여성과 남성의 화합에 대해서 공헌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나마 남성의 자기반성을 이끌어낸 것은 맹자였습니다. 남편의 반성문은 동양철학에서 무척 희귀하다는 점에서 보면 귀한 기록입니다. 

제나라에 아내와 첩을 한집에 거느리고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이 외출을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돌아왔다. 아내가 음식을 준 사람이 누군지 물으면, 그는 한결같이 부귀한 사람들의 이름을 댔다. 아내가 첩에게 말했다. "남편이 외출을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은 뒤에 돌아와 그 음식을 준 사람을 물으면, 다들 부귀한 사람이었는데, 일찍이 멀쩡한 사람이 찾아 온 적이 없으니, 내가 남편이 가는 곳을 엿보려고 하네."
일찍 일어나서, 비스듬히 남편이 가는 데를 따라가니,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남편과 더불어 서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동쪽 성곽 분묘(墳墓) 사이에 제사지내는 사람에게 가서, 그들의 먹고 남은 음식을 빌어먹고, 부족하면 또 둘러보고 다른 곳으로 갔다. 이것이 실컷 먹고 만족하는 방법이었다. 그의 아내가 돌아와서 그의 첩에게 말했다. "남편이란 우리가 우러러보며 평생을 같이할 사람이다. 지금, 이 같은 꼴이라니!" 하고는 그 첩과 더불어 남편을 원망하면서 서로 뜰 가운데서 목 놓아 우는데, 남편이 이런 줄도 모르고는 으스대며 밖에서 들어와서, 아내와 첩에게 교만을 부렸다. 군자의 입장을 통하여 이를 본다면, 사람이 부귀와 영달을 추구하는 방법들이 그 아내와 첩을 수치스럽지 않게 하고, 서로 목 놓아 울지 않게 하는 것은 아주 드물 것이다. 
- <맹자> 8-33

어쩌면 이 구절은 우리 사회가 왜 정직이 실종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곳이 되었는지를 고발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들과 이야기할 때와 아버지들과 이야기할 때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어머니들과 이야기할 때는 공감을 위주로 대화가 흘러갑니다. 내 입장을 밝히거나 토론이 붙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들과 대화를 하면 논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판별하자는 이야기가 아닌데도 이성 중심의 대화가 됩니다. 남성들이 가득한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감정이 쉽게 무시되거나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군대 시절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나는 예전에는 이성과 감정 중에서 이성의 편이었습니다. 서양철학을 보다 보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 고대 철학자들은 육체와 감정을 극복의 대상으로 정해놓고 이야기를 펼쳤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감정이 철학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르네상스 이후였습니다. 서양 역시 사상적으로 고리타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 역시 감정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은 점이 아쉽습니다. 철학의 화자가 대부분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장자'의 아내 생각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장자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 소재로서 아내를 데려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글에는 왠지 장자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장자의 부인이 죽어 혜자가 문상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사람이 더불어 살며 아들을 키우고 늙어 몸이 죽었다면 곡을 안 해도 될 것이오. 그렇지만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소. 아내가 처음 죽었을 때는 나라고 어찌 슬픈 마음이 없었겠소? 그러나 아내의 시원을 살펴보니 본래 생명이란 없었소. 생명뿐 아니라 형체도 없었고 형체만이 아니라 기(氣)도 없었소. 무엇인가 혼돈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생겼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고, 형체 속에서 생명이 생겼소. 그리고 오늘은 다시 변해서 죽음이 된 것이오. 이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이 운행한ㄴ 것과 같을 뿐이오. 그런데 누군가 천지라는 거대한 방에 누워 잠을 자려 하는데 내가 소리를 지르며 곁에서 운다는 것은 천명을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소. 그래서 곡을 그친 것이오."
- <장자> 18-4

<장자>에는 상가(喪家)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것 역시 '슬픔의 공간'으로 규정된 곳을 장자가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장치로 활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장자는 고정관념을 파고들거든요.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참 장자답게 아내를 보내줬구나' 하는 생각을 한 사람은 나 하나만은 아니겠지요. 남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선배'들이 조언을 합니다. '그러다가 평생 아내한테 눌려 살 걸' 남편은 바짝 긴장이 돼 동료와 지인들의 조언을 듣습니다. 그렇게 조언을 듣고 와서 집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전쟁'입니다. 여자들의 남편 욕과 남자들의 아내 욕은 조금 다릅니다. 여자들의 남편 욕은 욕을 하는 순간 공감이 되며 사라져버리는 반면, 남자들의 아내 욕은 사라지지 않고 생명력이 길다는 점입니다. 집에 와서 꼭 반영되며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차라리  남자들이 만나서 아내의 사랑을 얻는 방법, 아내의 점수를 따는 방법, 가족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많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빠들은 이것 역시 집에 와서 실천하고 반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아빠가 아무리 가족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고, 가족과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아빠의 자리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타타'가 만나는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버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천자(天子)를 모시는 시녀가 되면 손톱을 다듬지 않고 귀를 뚫지 않습니다. 처를 얻은 자는 외근을 중지하고 공역을 시키지 않습니다. 이처럼 육체가 온전하면 오히려 족히 이처럼 하거늘 하물며 덕이 온전한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지금 애타타는 말도 없이 신뢰를 받고 아무런 공도 없이 사랑을 받았으며 남이 나라를 주면서도 받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라 하니 그는 반드시 온전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그 덕을 드러내지 않는 자일 것입니다.
- <장자> 5-4

아빠들은 가족을 만들었다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것을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드러내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으면서 더욱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빠가 만든 업적은 더욱 더 위대해집니다. 남자들이 만나면 주식 얘기나 부동산, 재테크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나는 남자에게 최고의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투자는 아내와 아이들,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확실한 보험이 없죠. 아줌마들과 집에서 남편에 대한 수다를 떨다가 무척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남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하는데, 순간 번쩍 하는 섬광이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남자, 늙어서 따뜻한 밥은 좀 얻어먹겠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