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독자들의 마지막 반란
- 참언론독자단 마지막 캠페인 "자발적 구독운동"


'창간기자'보다 더 바쁜 '창간독자'

창간을 하루 앞둔 <시사IN> 기자들은 마감을 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이들 못지 않게 바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참언론독자단(옛 '시사모')이다.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도 벌려 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캠페인에 들어갈 <시사IN 독자판>은 마감을 끝내고 출력이 진행중이고, 함께 들어갈 휴대폰 액정 클리너와  A4 투명화일은 도안을 늦게 넘겨서 일요일까지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은 리플렛 한 장 달랑 주면 반응도 안 하고, 휴대폰 액정 클리너를 증정하면 잘 팔린다고 하니 '끼워팔기'도 이런 끼워팔기가 없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시사IN> 때문에 장사꾼이 다 됐나 보다.
다행히 시사모의 회원분 중에 휴대폰 클리너 사업을 하시는 분이 있어 원가로 제작해 주셨다. 감사드린다. 덕분에 금쪽같은 제작비가 엄청 살아났다. 이번에는 합병호라 좀 일이 많은가. 표도 제작해야 하고, 표지 이미지며 각종 사진이나 그림은 왜 이렇게 많은지 미술부 기자들은 5분에 한 번씩 모여서 회의를 한다. 그 옆에서 서성거리다가 회의가 잠시 멈추면 다가가서 일거리를 내민다. 이번 캠페인에 동원된 제작물들은 순전히 '시사인 미술부'의 공이다. 가만 있자, 일단 <시사IN 독자판> 1만부는 금요일에 오기로 했고 휴대폰 클리너는 토요일에 배달이 된다. 대충 '잔치 준비'가 다 된 것 같은데, 생각지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다. 1만부를 포장하고 분류할 박스는 어디서 충당할 것인가. 114에 전화를 걸어서 폐지회사에 전화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거기는 수거만 하고 팔지는 않는단다. 이걸 어쩐담. 생각해 낸 게 인터넷이다. 역시 인터넷에는 박스만 전문으로 파는 곳이 있었다. 이것으로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물품 배달처를 확인해야 하고, 작업 장소를 섭외해야 하고, 서포터스에게 나와주십쇼 하고 공지에 문자까지 다 보내야 한다. 오늘은 웬걸. <시사IN> 기자들과 함께 야근을 했다. 문정우 편집국장 왈, "아니, 자네도 오늘 야근인가?" <시사IN> 독자 하기 정말 힘들다. 에휴~


'시사IN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참언론독자단의 전신인 '시사모'는 2006년 10월 16일 시사저널 사태에 공분한 지식인, 일반 독자들의 열의가 모여 결성됐다. 그 동안 유의미한 캠페인을 몇 개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나도 고소하라' 운동과 '진품 시사저널 예약운동'이 가장 알려졌다. 알고 보니 '나도 고소하라' 운동은 내력이 있다. 1999년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를 빨갱이로 모는 이른바 '사상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이를 비판하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고발 조치하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비판 기자인 월간 <말> 지의 정지환 기자에게 400만원, 비판매체인 <인물과 사상>과 전북대 강준만 교수에게 700만원을 지급하라는 요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시작됐다. 당시 인물과 사상 자유게시판(통칭 '인자게시판')에는 자신의 주민등록번호까지 공개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나도 고소하라'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서명 대열에 합류한 대표적 지식인 중 한 명인 당시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인 홍세화 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일보 기자가 최장집 교수를 빨갱이로 몰기 위해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가 되어 ‘마조히즘적인 정신분열증상’을 보이며 사상 검증을 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나를 고소하라! 서명 홍세화” (시민의 신문, "금창태 씨! 나도 고소하시오")
'진품 시사저널 예약운동'은 기존의 소비자 운동이나 미디어 소비자 운동과는 구별되는 캠페인이었다. '불매운동'이나 '안티 조선일보 운동'은 대체로 네거티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해, '진품 예약운동'은 기자들이 일선으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리 구독을 약정하는 캠페인이다. 현재 추진중인 '자발적 구독운동' 역시 '진품 시사저널 예약운동'의 취지를 계승하고 있다.


<'진품 시사저널 예약운동'을 펼치던 시사모 운영위원들이 금창태 사장의 고발조처로 검찰에 출두해 찍은 사진. 웃으려고 하지만 저마다 표정이 쓸쓸하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시사모 운영위원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우연찮게도 오는 10월 16일은 '독자단'의 생일날이다. 창간으로부터는 한 달이다. 독자단은 남은 한 달 동안 모든 열의와 역량을 쏟아부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참언론독자단(
www.sisialove.com)'의 공지에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고인 물은 썩듯이 좋은 뜻도 오래 가면 여기저기 탈이 나는 법. 이제 '시사모'와 ‘독자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해왔던 독자 미디어 운동을 마무리할 때가 다가온 듯합니다. 이번에 제안하고자 하는 캠페인은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하는 우리의 마지막 잔치가 될 것입니다. (중략) 그리하여 그 날 10월 16일에 '일반 독자'로 돌아가려 합니다.  - "
마지막 프로젝트 '자발적 구독운동'을 제안합니다"

독자단이 마지막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 떠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독자단은 '선거대책위원회'가 아니다. 참여정부든 그 이전 정부든, 또 그 이전 정부든 정권을 위해 몸바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한 자리를 꿰찼다. 김대중 씨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엄청난 달러를 빚졌지만, 노무현 대통령 역시 엄청난 빚을 졌다. 단지 그것이 '달러'에서 '공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회전문 인사'는 코드정치의 허물이기도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공신록(功臣錄)'에 적혀 있는 빚을 청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우리 '독자단'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경계한다. 우리들은 '공신'이 아니다. 수사를 붙이자면, 차라리 '의병(義兵)'이다. 이제 특별한 상황이 끝났으니 다시 '생활인'으로 돌아가려는 것일 뿐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1개월이라는 일몰 시점을 둔 것이다.


'자발적 구독운동'에는 어떻게 참여하나?

우선 자본주의를 심각하게 교란한 행위에 대해서 반성한다. 아이를 강가에 남겨두고 가는 에미처럼 <시사IN>을 언론 시장의 생태계로 놓아주지 않고 붙들고 있는 모습이 답답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독자는 기자를 믿었고, 기자는 독자를 믿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기자들이 14개월 동안 싸워 주었다면 독자는 기자들에게 고마움이라도 표시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까지 등록된 정기구독자가 생각만큼 많지 않다. 지금 이대로라면 기자들이 다시 '광고'를 걱정하며 자신 있게 기사를 쓰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이 운동을 시작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물론 독자 캠페인을 했다고 해서 엎드린 구독률이 벌떡 일어나 질주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간'이라는 잔치상이 펼쳐졌다면 '바람잡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독자단'의 중론이다.
'자발적 구독운동'은 독자들이 독자들에게 새매체의 일독을 권장하는 캠페인이다. 때문에 이에 소요되는 발품과 제작 비용 일체를 독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한다는 원칙이 전제돼 있다. 구체적인 참여 방법은 다섯 가지를 제시했는데, "(1) 지역 캠페인 신청하기, (2) 배포도우미로 참여하기, (3) 지역 파견도우미로 참여하기, (4) 후원금으로 참여하기, (5) 의견이나 아이디어로 참여하기"이다. 이번 캠페인의 가장 주된 목적은 '지방 독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시사IN>이 서울만의 매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투쟁 과정이나 창간 과정에서 지방의 독자들은 어느 정도 소외를 받아 왔다. 이번 기회를 통해 서울의 독자들과 지방의 독자들이 만나 '잔치'를 벌이는 것이 최대의 목표다. '지역 파견도우미'는 그래서 필요하다.
발품을 팔 형편이 못 된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모 사단에서 복무중인 한 병사는 월급을 아껴 1만5천원을 만들어 보내 주었는데, 그것도 많다. 천원 이천원 마음이 가는 대로 참여할 수 있다. (후원계좌 : 농협 079-02-901233(조형근)


<군 복무중이러서 함께 싸우지는 못하고 군인으로서는 거금인 1만5천원을 대신 보냈다. 돈에 전투력이 실린 것일까. 성금과 투자금은 수십만 배로 늘어서 하나의 회사가 되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댓글 한 줄'이면 참여가 가능하다. 공신력 있는 배포처나 눈이 번쩍 빛나는 배포 아이디어를 보관하고 있다면 댓글에 굶주린 독다단 일꾼들에게 제보를 해달라. 아직 대한민국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달라. 돈이나 권력만으로는 세상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해 달라. <시사IN>과 함께 해왔던 1년을 멋지게 마무리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서 비겁하게 기사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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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7-09-14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감이에요. 배포 아이디어는 없지만... 함께 힘내요.^^

승주나무 2007-09-15 09:44   좋아요 0 | URL
냐오 님 감사합니다. 취지가 있는 만큼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하는 희망입니다
 

중학교 교과서를 자꾸 보면서 느끼는 점은,
우선 학창시절에 보던 교과서와는 외연이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내 나이 정도(97학번)의 세대가 교과서를 본다면 아마 '참고서'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보면 '문체'가 제법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요즘 교과서를 보면 예전의 참고서를 연상케 한다. 도표는 물론이고 사진과 그림에 세련된 문체까지 마치 시중에 파는 교양서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가령 중학교 1학년 도덕의 경우 "폭넓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감정을 적절히 조절할 때, 그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교육인적자원부, 61쪽)는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갈라 놓은 이성과 감정, 혹은 정신과 신체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 넘는다.

중학교 2학년 사회교과서를 보면 당시의 모습들이 생동감 있는 필체로 묘사돼 있다.

"1347년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던 것이다.
흑사병에 걸렸다고 생각되면 가족들조차도 그 사람을 포기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죽지도 않은 상태에서 구덩이에 파묻혔다. ㆍㆍㆍ 유럽은 갑자기 '텅 비어 버리게' 되었다."(중앙교육진흥연구소, 36쪽)


중학교 3학년 사회교과서 역시 '헌법'의 가치를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입헌주의는 단순히 헌법이 제정되었다고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헌법에 따라 나라가 다스려지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될 때 확립되는 것이다"(중앙교육진흥연구소, 14쪽)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교과서는 절대로 '빙산'을 보여주지 않고 '일각'만을 보여준다.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발견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문맥'이 있기 마련인데, 교과서는 이를 반영하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토머스 쿤의 비판을 모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과학 교과서들(그리고 너무나 많은 구식 과학사(科學史)들)은, 명백하게 동시에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교과서의 패러다임 문제들의 서술과 해결에 기여했다고 쉽사리 평가될 수 있는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 중 그런 부분만을 인용한다. 더러는 선택에 의해, 더러는 왜곡에 의해 이전시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과 방법의 가장 최근의 혁명에 의해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던 바로 그 일련의 고정된 규범들에 부합되도록, 고정된 문제들의 한 벌에 대해 연구를 수행해 왔던 것으로 암묵적으로 표현된다.
-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이쯤해서 한번 반문해본다. 교과서가 '정보의 종합'을 고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모든 정보를 수박 겉핥기로 알아야 한다면 '지적 번거충이'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정보의 종합'을 조금만 유연하게 받아들여도 '유익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고질적인 양비론'이다. 교과서는 관점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불문율이다. 불편부당한 서술방침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양비론이 불편부당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도덕, 사회, 국사)를 살펴보면 '양비론'적 서술방식과 함께, '정보의 총집합'을 고수하려는 욕망이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무의식적인 자기합리화와 적당주의를 전염시킬 우려가 있다> 


"절대왕정이나 나치 정권 등과 같이 정치 권력이 부당하게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경우에, 시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지나친 저항권 행사는 오히려 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 중학교 3학년 사회교과서(중앙교육진흥연구소), 15쪽

얼핏 보면 이 대목은 상충하는 양쪽의 진영을 적절히 만족한 듯 보이지만, 전혀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주장이다. 일단 극단적인 상황을 사례로 든 점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역부족이므로 유의미한 서술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저항을 한다면 저항을 하는 이유와 문맥이 있을 테지만, 위 서술은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가 없고 다만 '저항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므로 '무의미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 주장은 대립하는 양쪽의 특징을 적당히 지적하고 있을 뿐 양쪽의 입장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차라리 양쪽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양쪽에 배치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 상황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서술 방식일 것이다.

위 문장은 교과서 어디를 펼치든 만나게 된다. 이러한 서술이 잠재적 사회인인 학생들에게 주는 악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매사에 무의식적으로 '적당주의'를 불러올 수 있으며,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병폐를 노출시킬 우려가 있다. 양비론이라는 것은 사실 어떤 것을 해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설령 뇌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국가나 단체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식의 자기합리화를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결코 가벼운 걱정이 아닌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특히 '뇌물'에 약하며, 불필요한 관습을 '법률'과도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양비론'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이제 교과서도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성찰을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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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3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7-09-13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체셔님이 업계에 계셨군요.. 체크해 놓겠습니다 ㅋㅋ

Jade 2007-09-1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승주나무님 97학번 이셨어요? 전 왠지 97학번에 친근감을 느껴요...왜일까...ㅎㅎ

승주나무 2007-09-14 10:43   좋아요 0 | URL
ㅋㅋ 구칠들이 대체로 차카지요(퍼퍼퍽!!)

바람돌이 2007-09-1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과서라는 것은 어차피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철저하게 반영하는 건데 질적인 도약은 아마 영원히 힘들지 않을까요? 교과서가 권력에서 완전히 독립성을 획득하는 유토피아가 오지 않는한 말입니다. ^^;;

승주나무 2007-09-14 10:45   좋아요 0 | URL
제가 문제제기하는 것이 바로 '어차피'입니다. 대안교과서도 나오고 하는 실정이지만, 교과서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뿌리와 교과서가 양산하는 엄청난 문제들에 대해서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느냐는 거죠. 역시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일까요 ^^;
 

정몽구씨의 판결을 통해 이미 김승연씨도 집행유예가 내려지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최근의 판례가 아니라 '항소심의 법칙'이라는 오래된 사법부의 관례이다. 그러니까 1심에서 한번 혼내주고 2심에서 풀어주는 형태가 일반화된 것이다.

하지만 김승연은 정몽구와 다른 사안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
정몽구는 '재벌의 관습'에 따른 죄이므로 자본에 온건한 우리 정서에 부합된다 하겠지만,
김승연은 '양아치의 관습'을 따르고 있으므로 이를 사면해준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별 쑈'를 다 한다고 할지라도 사법부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국민 앞에서 엄숙히 증명해낸 셈이다.

사법권 남용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사법권 남용이 사법부의 근본적 원리가 아닌가.
은행의 제1원칙은 "돈 아쉬운 자에게 절대로 돈 빌려주지 마라"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은행은 이처럼 많은 사람의 요청에 반하는 존재이다.
사법부 역시 그러한 흐름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근본적 성찰'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쑥스럽게 생겼다.
그리고 '사법정의'라는 말도 '사법저의'로 수정되어야 한다.



사법권 남용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며

 

법질서의 최고 규범인 헌법은 그 전문에서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함을 지도이념으로 함을 분명히 하고 있고, 첫 번째 조문인 제1조 제2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옴"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헌법 규정대로 사법권의 연원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사법권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권력과 마찬가지로 사법권 역시 남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법재량 역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그 재량권의 남용이나 일탈은 법적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됩니다.

 

헌법 제103조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이상 법관은 법적 관점에서 '법대로' 재판을 하여야 하고 정치적 고려 등 초법적 고려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사법부의 행태를 반추하여 보면 과연 법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법대로' 재판하여 온 것인지, 사법권의 남용은 없었는지 근본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인혁당 사건 판결,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 등에서 보인 사법부의 부정적 행태는 바로 법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법대로' 재판하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법대로' 재판한다는 것은 사실 인정에 있어서 형식적으로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허위자백으로 의심되는 경우 무죄판결을 하여야 하고, 법률적용에 있어서도 형식적, 기계적으로 법 적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 사건에 적용할 '진정한' 법 규정, 법 원리를 찾아 실질적으로 법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 및 현금까지의 재벌 관련 재판에서 법의 형평성과 관련된 국민적 비판이 제기되어 온 것 역시 법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법대로' 재판하여 온 것인지 재검토할 단초를 제공합니다.

 

실질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제11조 정신에 어긋나는 이상 아무리 형식적 법 규정이나 기교적 설명을 제시한다 하여도 국민들은 구구한 변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해당 법관들에 대한 법적 책임추궁에 대하여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사법권 독립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것이고, 법관들의 일탈된 행태를 비호해 주는 방패막이로 작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법재량의 한계를 넘는 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고, 사안에 따라서는 법관 징계도 검토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인혁당 사건 판결,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 재벌 관련사건 등은 전체 사건의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의 사건들은 제대로 재판하였으니 그 일부만을 들어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판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법권의 독립, '법 앞의 평등'으로서 극히 일부의 사건을 통하여서라도 법관들의 본질적 사고가 드러나는 경우 나머지 사건들 처리의 적정성마저 의심받을 수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 됩니다.

 

말로만 '국민을 섬기는 법원',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을 외칠 뿐 그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는 사법 권력은 정직한 권력이 아닙니다.

 

헌법 전문과 헌법 제11조 등에 규정되어 있는 '법 앞의 평등'을 판결로 증명하지 못하는 사법권력 역시 공평한 권력이 아닙니다. 사법권 남용에 대하여 법관들과 주권자인 국민 모두의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고, 실효성 있는 대책의 수립에 착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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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사태를 고민하면서 많은 우리가 언론에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는구나 하는 불만이 일반적이었다. 기자들, 참여하는 독자들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시사저널 사태 관련 기사를 모두 훑어봤더니, 73개 매체(대학신문 포함)에서 822개의 기사를 쏟아냈다. 시사저널 운동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이 사람들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로 말하면 '강소국'인 것이다.

세상 어느 고에 파업을 하고 나서 회사를 차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그것은 '기자'라는 권력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오늘 '기자단' 홈페이지에서 글 하나를 읽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나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는 자극이 되었다. 그래서 전문을 올려본다.




시사인 기자분들이 부럽습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길에서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던, 천막을 치고 단식을 하며 힘들게 투쟁했던,
생계가 어려워 집에 있던 에어컨을 팔아야했던 시사인 기자분들....
그런 기자분들이 차,라,리 부럽습니다.


남편이 다니는 경기도 평택 한 장투사업장은 벌써 700일째, 교섭하지 않겠다는 회사에 맞서 투쟁을 하고 있고
조합원들은 파업 450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분회장, 부분회장, 사무부장등 조합에서만도 구속자가 셋이었고,
지회나 지부 또는 경기도본부 등 우리 투쟁과 관련해 구속된 동지들이 수없이 많았음에도

지난해 법원에서, 금속노조가 회사를 상대로 낸 단체교섭 응낙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고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하루에 30만원씩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이행강제금 지급 판결을 내렸음에도
(그동안 가처분 신청만 있었지 이행강제금에 대한 판결은 거의 없었기에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었답니다.)

또한 회사가 낸 가처분이의 신청이 고등법원에서까지 기각 당했음에도

언론도 사회도 작은 장투사업장엔 눈을 돌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시사저널 사태가 일어나고 기자들께서 파업하며 천막농성을 벌일 때,
전국에서 지지 방문을 하고 MBC등 공중파 방송에서 수없이 관련 보도를 내어줄 때
전국에 천막농성을 벌이는 장투 사업장이 얼마나 많았는지 혹시 알고 계시나요?


이젠텍만해도 회사 안에서 회사 밖으로 그리고 평택시청 앞에서 또 원청회사 앞에서,
이리 저리 옮기며 1년이 넘게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지만, 언론의 관심은 늘 딴 곳에만 있었지요.

부부가 조합원이라 몇 달씩 월급을 못 받으며 생활을 해도
대학입학을 앞둔 딸에게 대학을 포기하라는 말을 하면서 가슴을 치는 조합원이 있어도
팔아서 돈으로 바꿀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하나 없이 살고 있어도

아무리 방송국과 신문사에 제보를 하고 투고를 해도 그들의 관심은 KTX나 시사저널, 이랜드일 뿐....


남편이.......하도 답답하니 타워 크레인에 올라가겠다고 하는 걸 그래도 소용없을 거라고,
그런다고 알아주기나 하겠냐고 말리면서 속으로,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시사저널 사태가 일어나고 파업을 벌일 때, 거대 권력 <삼성>에 맞서 싸우는 언론인들이 다 있구나, 하는 마음에 반갑기도 했지만
또 다시 우리들 투쟁은 묻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피디수첩을 비롯해 공중파 방송에서 나오는 보도들을 보면서 파업도, 투쟁도, 농성도 역시 배운자들이, 가진자들이, 해야 이슈가 되는구나.
철도 공사, 이랜드 그룹, 삼성처럼 막강한 자본을 가진 자들과 싸워야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구나.....하는 먹먹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하더라도 시사인, 지지합니다.

그렇게 싸우는 시사인 기자분들을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신문과 진실-송건호>이라는 글을 가르칠 때 좀 더 많은 얘기들을 해 줄 수 있게 되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시사인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관심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받지 못하며 천막에서 몇 번의 겨울을 나고 있는,
소외된 장투 사업장이 있음을 잊지 않아주셨음 합니다.


이젠텍, 동희오토, 코레노, 승림분회, 대우자판, 르네상스 호텔, 하이닉스, 기룽전자, 콜트 악기, 콜텍, 테트라팩, 동방산업 등
너무 많아 미처 다 말하지 못 하는 수 많은 장투 사업장에도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9월 12일, <노조 설립 700일, 파업 450일 투쟁 문화제>를 기획하고
한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는 중인데 뜬금없이 9월 12일, 뉴코아 매장 점거 투쟁이 잡혔다는
민주노총 공문을 보고 속상한 마음에 하소연처럼 주절거렸습니다.
그것도 똑같은 시각, 늦은  6시에 말입니다.

비정규직 싸움의 중요성을 알기에 남편과 함께 서울까지 올라가 이랜드(뉴코아) 투쟁에 결합하고 있지만
힘들게 준비를 시작한 문화제가 이랜드에 묻혀 또 다시 관심밖의 행사로 치러지게 될 것 같아 속상한 마음에 잠 한 숨 못 잤답니다.
이런 호소, 시사인에서는 받아 주실 것 같아 주절거렸는데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그래도 문화제 끝난 다음날부터 이랜드 투쟁에 결합해야지요.

출처 :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www.sisa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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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리뷰보기)이라는 책을 보았을 때 거대한 이스라엘 장벽을 발견했다. 이 장벽이 얼마나 무식하고 이기적인 것인지는 그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요르단 강 서안의 북쪽 끝에서 장벽이 시작된다. 장벽은 동쪽으로는 요르단을 향해서 나아가고, 남쪽으로는 예루살렘을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움알팜이라는 도시를 지나자마자, 장벽은 '녹색 선'을 벗어난다. 서안 쪽 땅으로 들어가 세 개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감싸안기 위해서다. 그렇게 되면, 장벽 서쪽에 있는 열 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에 사는 5,200명은 완전히 갇힌 신세가 된다. 서쪽으로 '녹색 선'이 앞을 가로막고, 동쪽으로는 장벽에 막히게 되는 것이다. 사정은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알페메나쥬와 주핀이라는 정착촌을 위해서, 칼킬리아에 사는 4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북쪽과 서쪽과 남쪽에 올라선 콘크리트 장벽에 갇히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106쪽

장벽마다 문이 달려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문 앞에는 군인들이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빌린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이스라엘 법원에 소송을 걸었고 이스라엘 대법원은 이스라엘 정부의 임의적인 장벽 설치가 부당하다며 변경을 명령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으면서 팔레스타인의 땅을 빼앗고, 중동에서 '제국주의자' 역할을 하고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이번 판별을 보고 '법률'이라는 것에 대해서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법원과 법관의 위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 자본에 의해 장학생으로 키워지면서 자본의 시녀로 전락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 국가권력의 나팔수 노릇만 하던 것으로 알려지던 것이,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떡값'에 길들여진 사람들로 알려진 '법조인'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각국의 법감정은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법률적 정의는 만국이 서로 통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오늘 경향신문 국제면을 지나면서 든 생각. 기분 좋다^^

아래는 신문 기사


“팔레스타인 장벽 철거하라”…정작촌 ‘빌린’주민 승소
입력: 2007년 09월 05일 18:24:05
 원본주소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9051824051&code=970209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건설에 반대하는 ‘빌린’ 지역 주민들이 승소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4일 팔레스타인 정착촌 빌린 지역 주민들이 이스라엘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분리장벽 제거 요청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는 빌린 지역에 완공한 1.7㎞의 분리장벽을 다른 지역으로 변경하라고 명령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빌린 지역을 가로지르는 현재의 분리장벽은 (정부의 주장대로) 군사·안보를 이유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없다”면서 “합리적인 기간 안에 분리장벽을 제거하고 새로운 장소에 재건하라”고 판시했다. 이스라엘 국방부장관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법원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대법원이 분리장벽 자체의 위법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뉴욕타임스는 빌린 지역에서 주민들이 승소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전했다.

빌린은 분리장벽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과 일부 이스라엘인, 외국인들은 지난 2년6개월간 금요 시위를 벌여왔던 곳이다. 시위대들은 시위 때마다 이스라엘 군인들과의 충돌을 벌여 분리장벽 건설 반대 여론을 환기시키곤 했다.

빌린 지역에서 농업과 과수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 1700여명은 2005년 3월 분리장벽이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주민들은 분리장벽이 개인 소유의 땅 한가운데를 나눠놓아 논·밭, 과수원을 마음대로 오갈 수 없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분리장벽마다 문을 만들어놓았지만 이스라엘 군인이 개폐(開閉)를 결정해 이동에 심각한 불편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2002년 4월 서안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거주지 주민의 안보를 이유로 팔레스타인 거주지인 서안 지역을 장벽으로 둘러싸는 계획을 발표했다. 장벽 건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영토를 빼앗는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건설은 국제법을 어긴 것이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같은 결정을 무시했다.

〈김정선기자 kjs0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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