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생일날에 아빠가 되다

 '심장소리는 왜 이렇게 작은 거예요 ㅠㅠ 불안해요' 라고 하니까 '아기가 2mm밖에 안될 정도로 작은데 어떻게 심장소리가 크게 들려요~ 정상이에요'

아내가 흥분된 어조로 전화를 해왔습니다. 11월 28일은 만으로 '서른'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제 생일은 11월 29일이고, 제 아내는 저보다 이틀이 빠른데(11월 27일) 우리는 공평하게 11월 28일에 서로 생일을 챙겨주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11월 28일, 우리 부부의 생일을 축하해준 것은 '아기'였습니다.

결혼 3년 차인 우리 부부는 그 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던 아기가 드디어 우리의 품에 사뿐히 내린 것이죠. 쬐끄만하지만 이목구비가 다 보입니다. 인석이 그래도 저처럼 머리가 좀 크네요. 심장도 보이고 심장박동도 명쾌하게 들립니다. 심장박동 소리가 들린다는 말에 저는 세상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픈 과거가 있어서 그런지 아기집도 오롯하게 만들어지고 맥박소리도 들린다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난황(아기 왼쪽에 달려 있는 조그만 것)이라는 것은 저도 난생 처음 알았는데 10달 동안 아기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고 하더군요.

사람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조금 더 컸겠지만, 2mm인 아기의 씨앗 역시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우주가 찾아왔습니다. 2mm짜리 하늘이 열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다

그날 저는 한 시민단체의 긴급회의라는 명분으로 아내와 약속했던 조촐한 생일파티를 하지 못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저를 붙잡는 회원님들의 만류를 정중히 거절하고 자정이 조금 넘어서 케익 하나를 사들고 아내를 찾았는데, "빌어먹을 녀석아!"하면서 욕을 하면 시원하겠는데 아무 말없이 있는 겁니다. 남편놈이 생일도 알까말까 하고 지 새끼가 내려앉았는데 밖으로만 나돌아다녀서 미울 만도 한데 한없이 순둥이 기질의 아내는 말 한마디 안 하더란 말이죠. ㅠㅠ

 

제가 요즘 생각하는 것은 '부모'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자식사랑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자식사랑 때문에 아이의 앞길을 망치는 경우도 무수히 생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386 형님누나들에 대한 원망을 갖고 있는데, 모든 부모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들의 '자식사랑'이 겉으로만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근본적이고 진정한 의미의 자식사랑이 아니라 '내 자식 챙기기'의 모양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신의 자식이 사랑스럽다면 제 자식만 챙길 것이 아니라 '자식 세대의 미래'를 열어주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소식을 하나만 더 하자면 얼마 전 조양진 선생님을 만나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차피 우리 세대에 조선일보를 절멸시키지는 못하겠지만, 다음 세대에 기필코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터를 닦아놓겠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었지만 조양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당신 세대에서 끝내지 못하면 안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조선일보를 보게 하여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이 조선일보를 끝내 절멸시키지 못했던 우리 세대의 숙원이다. 당신은 그것을 반복하려고 하는가?"

다음 세대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이미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셈이죠. 저는 제 아이 앞에서 떳떳한 모습으로 살고 싶습니다. 자식 기저귀 값이나 분유값 벌려고 '부당함'에게 슬쩍 슬쩍 말을 트고 어물쩍 손목을 잡고 하는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를 배불리 먹인다면 아이는 겉으로는 뭐라 안 하겠지만,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경멸할 것입니다.

강만수 장관이 그린벨트를 완전히 해제하고 거기에 개발을 하겠다고 나서서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국회에 선 강만수 장관은 "후손들의 문제는 후손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지금 그것까지 챙길 상황인가?"라고 하면서 그린벨트 해제를 기정사실화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미래세대에게 참 부끄럽습니다.

저도 일개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제 자식만이 아니라 미래의 자식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남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은 되도록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하며, 민주주의나 여러 가지 가치들 역시 안전하게 계승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아이들에게 '말'을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즉 '언로'를 말하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은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언어폭력'이라고 할 정도로 혼탁해진 상황입니다. 저는 최소한 아이들이 '언어폭력'을 '상식'처럼 생각하는 사회의 공기를 마시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일보'를 폐간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우리의 부끄러운 유산입니다. 그것을 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집안일을 세심하게 돌보지 못해서 아내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 승주나무의 개인사를 말씀드리면 비인간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온 시사모(시사인 창간독자)들에게 시사인 창간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했습니다. (상복을 입고) 그들이 질겁을 했다더군요.
요즘에는 머릿속에 '언소주'만 가득 들어 있어서 언소주에서 함께 일하는 분들도 걱정을 하십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사회적인 것에 몰입하게 되었을까요. 중용의 구절처럼 "내가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일단 보았다면 외면할 수 없다"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너무 개인화되고 개별해법으로 가려는 분들도 걱정이지만, 저처럼 너무 사회성이 강성한 것도 우려될 만한 점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좀 소박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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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12-1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한지 벌써 3년이나....
이제 아버지가 되시네요.^^ 축하합니다 승주나무님.

승주나무 2008-12-10 23:22   좋아요 0 | URL
메피 님도 슬슬 소식이 들릴 때가 되지 않았나요? 감사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08-12-10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신비합니다.
같은 서른인데 저를 많이 앞질러 가시네요 축하드립니다 ^^

승주나무 2008-12-10 23:23   좋아요 0 | URL
FTA반대휘모리 님~ 서른에 비해서 과정이 좀 빠른 듯하긴 합니다. 그렇다고 앞질러 가는 것은 아니지요. FTA반대휘모리 님의 축하댓글을 받으니 즐겁습니다. 감사합니다.

드팀전 2008-12-10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비인간적인 것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면은 우려스러운데요 ^^
승주나무님은 절대 '혁명'하지 마세요.ㅋㅋ

아기 태명 잘 지으세요.

승주나무 2008-12-10 23:24   좋아요 0 | URL
드팀전 님~ 정말 혁명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ㅋㅋ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걱정입니다.
감사합니다^^

Jade 2008-12-1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승주나무님 완전 축하드려요! >.<

승주나무 2008-12-11 00:26   좋아요 0 | URL
제이드 님 완전 감사해요^^

무스탕 2008-12-1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승주나무의 열매가 맺었네요 ^^
아가도 엄마도 건강,건강하게!!

승주나무 2008-12-12 12:12   좋아요 0 | URL
무스탕 님^^
아가도 엄마도 건강할 수 있도록 기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13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아기가 태어나겠군요.자상한 아버지와 남편이 되실 겁니다.

승주나무 2008-12-23 13: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상한 아버지와 자상한 남편은 둘 다 무척 어려운 과제입니다^^;;

감은빛 2008-12-15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드디어 아빠가 되겠군요. 아이랑 함께 있다보면 힘들거나 속상할때도 많지만 그래도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육아와 관련하여 힘든일은 언제든지 상의하세요! ^^

승주나무 2008-12-23 13:16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선배 아빠 감은빛 님을 그대로 방치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열심히 스토커 하겠습니다 ㅎㅎ

강민아 2008-12-20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승주야 축하해.. 이제야 알았네.. 난 고모되는거냐 ㅋㅋ

승주나무 2008-12-23 13:16   좋아요 0 | URL
뒤늦게 알았으니 다행이다.. 아이가 고모를(실은 고모의 선물을) 너무 보고 싶어하는 것 같더라구 ㅋㅋ

멜기세덱 2008-12-24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뭐야! 뭐야!!!
나한텐 얘기도 안 해주구....너무해요....ㅠㅠ;;
근뎅....ㅋㅋㅋ
추카추카!!!!알라뷰소머치베이비!!!!

마늘빵 2008-12-24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이제 봤어요!!! 아니 이럴수가. 축하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