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소개하는 책은 많다. 그런데 책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책들은 이미 읽었던 책에 대한 내용은 흥미가 떨어지거나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일종의 스포일러 때문에 읽기가 꺼려질 때도 있다. 그런데 함정임의 이 책은 다른 책을 소개하는 글이기 이전에 이 글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고 깊이도 있다. 이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댈러웨이 부인>과 <디어 라이프>를 주문했다.

 

 

 

 

 

 

 

 

글이 시적이어서 쉬이 읽히지는 않지만 가끔 가슴을 쿵 울리는 글들을 읽게 된다. 작가는 사람에게서 멀리 거리를 두는 성격이라고 말하지만 이 정도의 관찰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인간에 대한 애정이 충분한 사람이리라...<울기 좋은 방>도 읽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커피향이 진동하는 듯 했다. 커피를 진하게 한잔 마시고 싶은 밤이다. 찌든 일상의 비루함이여... ㅠㅠ

 

 

 

 

 

 

 

정여울의 책들이다. <그림자 여행>은 <공부할 권리>와 살짝 겹친다. <내가 사랑한 유럽..>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살짝 위로가 되기에... 중고서점에서 샀다.

 

 

 

 

 

 

 

 

 

 

유럽의 예술문화사쯤 되려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읽기 시작했는데 중고등학교 때 세계사 지식이 되살아나면서 재밌게 읽고 있다.

 

 

 

 

 

 

 

 

 

 

 

 

읽는 내내 행복하다~

요리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꿈틀한다. ^^;;;

 

서울에는 언제 벚꽃이 피려나.. 아니 벌써 피었나.

몸이 안좋은지 한기가 들어서.. 춥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초에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 클래식 캘린더>를 샀더랬다. 무엇인고 하니.. 매일 한페이지씩 민음사전집의 1권부터 제일 첫 페이지가 나오는 식이다. 어떤 책의 첫페이지만 읽어도 끌리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첫 문장은 군고구마, 군고구마아, 따끈따근한 군고구마아. 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소설. 이 소설에는 인도 단체여행을 함께 가는 사람들이 몇명 나온다. 물론 제각각 인도를 여행하려는 이유는 다르다. 이소베는 아내의 환생을 찾아서, 미쓰코는 한 때의 남자 오쓰를 찾아서, 기구치는 기구치대로 정글에서 인육을 먹은 고뇌를 잊고자, 누마다는 유일한 위안이었던 동물 구관조를 찾아서.. 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자신의 인생에서 놓지 못하는 무언가를 붙잡고 번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무언가를 붙잡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아갈까,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몇년전 재밌게 읽었던 <테레즈 데케루>의 이야기가 자주 나와 반가웠다. 엔도 슈사쿠는 종교색이 짙은 작품이 많다는 데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종교에 대한 생각이라면 오쓰의 경우처럼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데 나도 동감이다. 그래서 하루하루 순간순간 그 만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주어진 하루를 값지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도라는 나라는 흥미롭지만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도 갠지스 강가는 이런 분위기일까 궁금해진다. 이 소설의 '깊은 강'은 인도인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몸도 마음도 정화가 일어나고 자신의 인생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도인의 힘이 이 강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인도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가 마음 속에 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 깜짝할 사이 1,2월이 지나가고 오늘은 날씨가 조금 풀린 것 같다.

봄이 오면 몸도 간질간질, 마음도 간질간질 해지겠지~

그럴 때면 겨울의 이 쨍쨍한 추위도 그리워질터.. 행여 여름이라도 오면.. 더 그리워질터..

 

치매에 걸린 어머니, 그리고 젊은 날엔 딸의 인생을 어떻게 보면 짓밟기도 했던 어머니를 용서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성장할지는 결국 개인의 몫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당시 나의 상황에 놀랄 만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이었다.

 

신경이 없는 신체 부위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준다. 눈에 무언가가 들어가면 즉기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

이 부분은 작가가 나병환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나병환자들에게 무서운 것은 병의 고통 그 자체가 아니었다. 감각이 사라져서 더 이상 고통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발에 상처가 나도 그 상처의 아픔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상처가 커지고 힘들어진다. 우리에게 고통이란 것이 있고, 그 고통이 감당할 만한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나를 돌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나를 되돌아보는 일이므로.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나 분노의 방향이 어느 곳으로 향해야하는지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층간소음의 항의는 윗집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물을 지은 시공사에게 해야 한다.

그간 나의 분노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오... 바로 이런 책이 필요했다.

서점에는 공부를 잘 하는 방법들을 알려주는 책들이 널렸다. 열등생을 이해하려는 책은 거의 없다.

이 책은 온전히 열등생에게 바쳐지는 책이다.

 

우리는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무언가'가 되길 강요당한다.  강요는 아니더라도 무언가가 되길 원하는 사회에 살기 때문에 신경쓰려 하지 않으려해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무언가가 된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학교의 슬픔일까..

다니엘 페낙의 책은 <몸의 일기>도 좋았고, 오래전에 읽은 동화책 <늑대의 눈>도 좋았다. 시적이고 한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가 없다.

 

 

사실 이런 책은 줄거리는 알고 있어도 원작을 찾아읽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면 또 재밌다. 이 시기에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소설들이 많이 나왔는데 비로소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재조명하게 되는 시기였다고 한다. 톰은 계속 왕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양심에 따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고, 에드워드는 톰이 되어봄으로써 훗날 올바른 군주가 되었다. 회초리 시동과 같이 재밌는 그 시대만의 읽을 거리도 있다. <톰 소여의 모험>도 읽어봐야겠다.

 

 

 

 

 

 

이런 책들이 뜨는 데는 모두들 미니멀~해지고픈 욕구가 있기 때문일테다. 미니멀 라이프로 살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이 소개된다.

- 집의 한개의 방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기

- 공산품의 라벨을 모두 제거하고 쓰기 (가령 세제 용기의 라벨 같은거를 다 뗀다.)

- 패션은 비슷한 패턴의 무난한 색으로 유니폼화 하기

- 수납의 60%정도를 비워두기

- 주방 싱크대 위에는 한개의 물건도 꺼내놓지 않기

 

그런데 미니멀 라이프를 위해 무인양품의 정리용기를 사는 것도 미니멀라이프에 위배되는 것이겠지.. 그런데 사고 싶오.. 그래도 참고 물건들을 더 사려는 욕구를 줄여야겠다. 책도 사지 않고 전자책으로 구입하라는 것은 실현불가능 ㅠㅠ 채식도 시작하면 점점 더 엄격하게 하고 싶어진다던데, 정리도 점점 더 엄격하게 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허지웅처럼은 안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에서 알게된 화가 두 사람, 이토 자쿠추, 구마다 지카보

 

과거의 아픔이나 미래의 불안감에도 붙들리지 않고 '지금, 여기'의 반짝임만으로 살아가는 동물들, 저는 그 아름다움을 '무심'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무심이란 결코 임기응변으로, 혹은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매순간을 완전히 불태우듯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심이라는 것은 '마음이 없다'고 쓰지만, 우리 인간은 필사적은 '마음'이라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무심이라는 말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왜 우리들이 살기 힘든지에 관한 힌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이 '무심'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자쿠추와 구마다가 구축한 회화 세계에는 미시적 세계(미크로코스모스)와 거시적 세계(마이크로코스모스)를 넘나드는 것 같은 감각이 있습니다. 혹은 아주 작은 세계와 우주로 통할 만큼 커다란 세계가 봉제선 없이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관점을 바꿔보면, 동물은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을 걸기 때문에 '영원과 전체'에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쿠추와 구마다도 그런 사람의 방식을 동경하여 무심의 세계를 그렸던 것은 아닐까요. p.160

 

영혼이 뒤흔들려 눈물이 나는 것도 확실히 감동입니다만 웃는 것도 감동입니다. 인간은 마음껏 웃을 때 '무심'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p.164

 

무심의 상태가 되기 위해 자주 웃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아홉살의 남자는 여자문제(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인지는 나와있지 않다.)로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백면서생인 이 남자는 지나가는 길에서 갱부가 되지 않겠냐고 제의하는 어떤 사내를 만나 광산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어디 갱부가 되는 일이 쉬운가. 다행히(?) 기관지염때문에 갱부도 되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는 얘기다.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소설에서도 그렇듯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학문의 세계에서 빛을 발하지도 못하는 어중이 떠중이 같은 잉여인간의 삶이 그려져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듯 작가의 말대로 삶의 기둥뿌리가 뽑힌 사람들도 그 정도는 상대적인 법이다. 주인공보다 붉은 담요, 심지어 나이도 어린 꼬맹이는 어디 삶의 기둥이란게 있는지 모르겠다. 광산에서 만난 수많은 갱부들의 삶 또한 그렇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며 주인공의 인생영역도 확장된다. 이 소설은 어딘가에 연재해서 그런 모양인지 정확히 세 페이지씩 번호가 매겨진다. 그것이 더 읽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병에 잠복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에도 잠복기가 있다. 이때에는 자신이 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에 지배당하면서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또한 그 사상이나 감정이 외계와의 관계로 의식의 표면에 드러날 기회가 없으면 평생 그 사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은 결코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는 이런 거라며 줄기차게 반대의 언행을 해 보인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그 언행은 모순되어 있다. 스스로 미심쩍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심쩍다는 것은 모르더라도 엄청난 고통을 겪기도 한다. p.62

사람들은 경험한 당시에 쓴 글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당시의 사정은 순간의 혈기에 사로잡혀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전하기 쉬운 법이다. p.68

도쿄에 있을 때는 눈이 팽팽 돌 만큼 사람이 움직이고 있어도, 움직이면서 다들 뿌리를 내리고 있고, 마침 뿌리가 뽑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세상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나 하나뿐일 정도라서 센주에서 옷뒷자락을 허리에 지르고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도 남의 두 배였지만 이곳 역참 마을에서 뜻밖에 붉은 담요를 얻었다. 붉은 담요를 얻고 나서 2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그 꼬맹이를 얻었다. 두 사람 다 나보다는 훨씬 뿌리가 뽑혀 있었다.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