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살의 남자는 여자문제(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인지는 나와있지 않다.)로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백면서생인 이 남자는 지나가는 길에서 갱부가 되지 않겠냐고 제의하는 어떤 사내를 만나 광산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어디 갱부가 되는 일이 쉬운가. 다행히(?) 기관지염때문에 갱부도 되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는 얘기다.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소설에서도 그렇듯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학문의 세계에서 빛을 발하지도 못하는 어중이 떠중이 같은 잉여인간의 삶이 그려져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듯 작가의 말대로 삶의 기둥뿌리가 뽑힌 사람들도 그 정도는 상대적인 법이다. 주인공보다 붉은 담요, 심지어 나이도 어린 꼬맹이는 어디 삶의 기둥이란게 있는지 모르겠다. 광산에서 만난 수많은 갱부들의 삶 또한 그렇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며 주인공의 인생영역도 확장된다. 이 소설은 어딘가에 연재해서 그런 모양인지 정확히 세 페이지씩 번호가 매겨진다. 그것이 더 읽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병에 잠복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에도 잠복기가 있다. 이때에는 자신이 그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에 지배당하면서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또한 그 사상이나 감정이 외계와의 관계로 의식의 표면에 드러날 기회가 없으면 평생 그 사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은 결코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는 이런 거라며 줄기차게 반대의 언행을 해 보인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그 언행은 모순되어 있다. 스스로 미심쩍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심쩍다는 것은 모르더라도 엄청난 고통을 겪기도 한다. p.62

사람들은 경험한 당시에 쓴 글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당시의 사정은 순간의 혈기에 사로잡혀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전하기 쉬운 법이다. p.68

도쿄에 있을 때는 눈이 팽팽 돌 만큼 사람이 움직이고 있어도, 움직이면서 다들 뿌리를 내리고 있고, 마침 뿌리가 뽑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세상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나 하나뿐일 정도라서 센주에서 옷뒷자락을 허리에 지르고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도 남의 두 배였지만 이곳 역참 마을에서 뜻밖에 붉은 담요를 얻었다. 붉은 담요를 얻고 나서 2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그 꼬맹이를 얻었다. 두 사람 다 나보다는 훨씬 뿌리가 뽑혀 있었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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