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구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구판절판


어떤 선배를 보면 저 분이야말로 서양에서 공부를 할 만한 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내하는 저력이 있고 지겨운 것을 무시할 만한 신경줄이 있고 작은 것도 세심하게 가리고 또 큰 것은 큰 것대로 잘 세우며 한번 읽은 것도 스무 번 서른 번 다시 읽고, 거짓말 못하고, 뻐기지도 않고, 그리고 철저히,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 -21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 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어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척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는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이명원 지음 / 새움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이 정말 소금밭이다. 팍팍하고 짜고 텁텁하다. 무엇하나 상크름한 것이 없다.
이런날 그저 하는 일이라곤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세권의 책을 빌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평일 내내 읽는다. 출근길에도 읽고 점심시간에도 읽고 집에 가서 잠자기 전에 읽는다.
무슨 목적이라도 얻으려는 양 열심히 읽고 열심히 읽고 쓰고 또 다시 책을 찾아 헤매인다.
먹이를 찾아 헤매이는 한마리의 하이에나 처럼 말이다.

이런날 이 책을 만난 것은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위안이었다. 삶은 원래 그런것이라고. 숱한 소설들속에서 인생의 축소판을 보고 웃고 울고 떠들고 씹어댄다. 제목만 읽어도 배부른 내 앞에 산더미 처럼 쌓인 소설들이 마치 인생의 숙제처럼 느껴진다. 다시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불쑥 든다. 나는 왜 일부러 소설을 피하려고 했을까. 그것이 마치 인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에 개입되는 것이 피곤해서 그랬을까. 문든 그런 생각이 든다. 박노자, 김규항, 진중권, 강준만, 김진식과 같은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그들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세상과 만날수 있으리라. 10년후의 나이에도 나는 소금밭 같은 마음으로 도서관에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의 서평은 스포일러가 되기 싶다. 문학성보다 흥미위주의 소설이라면 줄거리를 적거나 영화와 같은 어떤 반전이라도 숨어있는 소설이라면 더욱 그러한데, 그래서 서평을 첫부분만 읽다가 뒷부분은 일부러 읽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뒷부분에 전혀 얘기치 못한 반전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처음부터 뭔가를 기대하면서 줄거리가 어떤 방향으로 몰아갈지를 상상했다. 마지막엔 정말 사람들의 말처럼 얘기치 않은 결말이었는데, 약간 오바해서 한 페이지 한페이지를 읽는데 숨이 막힐 뻔했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영화를 볼때와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혹여나 요즘 사는게 지루하거나 뭔가 재미난게 없나 하는 것을 찾으시는 분들은 이 소설을 읽어볼 것을 권해드립니다.


이야기는 대략 다섯명의 젊은 남녀들이 한집에서 살면서 벌어지는 일상사이다. 일본의 젊은 작가들의 냄새가 나는듯 가벼운 필치 감각적인 문장으로 비교적 술술 잘 읽혀진다. 구성은 좀 특이한데 다섯 명의 이름이 각각의 차례가 된다. 다섯명의 사람들이 각각의 관점에서 서술해나가는 것이다. 즉, 화자인 나는 모두 다섯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읽어나갈수록 어떤 하루의 어떤 사건이 이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서술되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또 다르게 서술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경우는 뒤의 반전에만 너무 집중해서 이렇게 읽는 맛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이런 차이점들을 유의깊게 본다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과연 저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인가. 또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 '세계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 바로 이곳, 우리들의 주변이다. 이 소설은 그런 사람들의 개개인의 세계들에 관한 소설이다.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나의 자아, 그리고 그 자아의 어떤 일부를 타인에게 공개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세계와 세계들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요시다 슈이치는 정말 주목할만한 작가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