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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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음산한 이야기를 이렇게 희망적인 결말로 완벽하게 완결 지을 수 있는 작가라니 놀랍다. 좌절된 사랑을 봉합할 수 있는 언어의 향연이 예술이다. 어떤 한계나 경계 너머로 이미 넘어가버린 작가 같다. 프랑스 작가들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해서 또 한 번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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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12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문장 좋아하는데다 블랑카 님이 별 다섯 주신 소설이니 냉큼 담아가요. 식물들의 사생활 궁금합니다. 프랑스 작가들이 좋아한 소설이라 더더욱 당기네요. 표지도 좋아라^^

blanca 2021-10-13 07:5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반갑습니다. 저는 사실 이승우 작품은 별로 읽은 게 없어요. 단편집 한 권 정도와 산문집 두 권 읽었는데 외국인들이 극찬하는 작품이라 해서 <식물들의 사생활> 읽게 됐는데 이건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더라고요. 일단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기도 하지만 뭔가 신화적인 깊이가 있는 참으로 매력적인 작품이랍니다.
 
케이크와 맥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4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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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한평생 자기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죽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그와 당신이 아는 그는 백팔십도 다를 수도 있다. 관대하고 정의로운 그가 때로는 무례하고 치졸한 인간의 면면을 다른 사람에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 정도로 다채롭고 복합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다. 그 사람 어때? 라고 묻는 일은 호기롭고 이미 거짓과 가식을 예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 줄 수 없다. 오직 나에게 유난히 부각된 한 면만을,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몇몇의 장면만을 조각조각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케이크와 맥주>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가 칭송하는 노작가 에드워드 드리필드의 전기를 쓰게 된 앨로이는 동료 작가인 나 어셴든에게 드리필드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그가 유명한 작가가 되기 전 첫번째 아내 로지와 블랙스터블에 살던 시절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숙부, 숙모와 사는 십대 소년이었고 우아한 것과는 거리가 먼 그 부부와 어울려 자전거를 배우고 카드놀이를 하며 그들과 어울린 시간들이 있었다. 그 우정은 기이하고 은밀한 나의 성장통의 일부였다. 그 부부는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블랙스터블을 도망치다시피 하듯 떠나고 나는 의대생이 되어 다시 그들과 재회한다. 그 재회는 드리필드의 어린 아내 로지와의 어셴든의 애정 행각으로 이어진다. 유명한 작가의 그럴듯한 부인이 되기엔 로지는 너무나 자유분방했다. 로지는 남편을 두고 뭇남자들과 어울리는 그녀를 질투하는 어셴든에게


기회가 있을 때 인생을 즐겨야지. 어차피 100년 후엔 우리 모두 죽을 텐데 뭐가 그리 심각해? 할 수 있을 때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pp.224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생을 즐긴다. 자신을 원하는 남자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들을 기꺼이 준다. 누구는 그녀를 천박하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은빛이 나는 여자라고도 한다. 로지는 드리필드에게서도 도망친다. 그녀는 위대한 작가의 아내로 남는 대신 유부남과 다시 미국으로 도망가는 추문을 남긴다.  어셴든은 늙고 살찐 로지와 재회하게 되지만 그녀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그녀가 남들이 얘기하는 저속하고 천박한 삶이 아니라 딸을 잃은 상처와 편견을 딛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제대로 살아낸 사람임을 깨닫는다. 


서머싯 몸이 <케이크와 맥주>를 통해 드리필드의 신화를 해체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 드리필드가 연상하는 작가가 토마스 하디라고 추측했다. 불멸의 신화가 되어버린 작가가 사실 가장 좋아했던 일은 소박한 펍에서 노동자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었다는 것, 자유분방한 어린 아내가 뭇남자들과 바람을 펴도 눈감아줬던 무능력한 남편이 아니라 어떤 상실을 치유하는 데 저마다의 방식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존중했다는 것은 그 작가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의 이해였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케이크와 맥주>는 폄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환희로서의 가치,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들에 대한 그 찰나적 경탄 또한 인생의 한 측면임을 간과하지 말라는 이야기처럼 나에게는 들렸다. 이것은 도덕적인 교훈이나 훈계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이제 곧 유명해지겠지만 또 헤어질 한 중년의 부부에게서 자전거를 배워 함께 날듯이 바람을 가르며 잊기 힘든 환희를 느꼈던 소년의 시간이 남는다. 어셴든에게 남은 드리필드의 이야기는 그러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가십이 될 수 없는 찬란한 추억이다. 그러한 이야기는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서머싯 몸이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처럼 들린다. 어셴든은 서머싯 몸 자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케이크와 맥주>를 읽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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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22 19: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설마 드리필드가 토마스 하디 !

하디가 굉장한 성실한 작가로 알고 있었지만 아내로 인해 맘 고생은 많이 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하디의 생애를 모옴이 이렇게 작품으로 남겼던 이유는 ??


blanca 2021-09-22 19:46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서머싯 모옴 작품은 좋아하는데 인간 자체로는 근처에 있었으면 참으로 싫었겠다 싶어요. ^^;;; 하디의 아이가 어렸을 때 죽은 일을 작품화해서 난리가 난 것도 다 있었던 일이라고 해서 놀랐어요. 이 작품 관련한 자세한 비화를 알고 싶어요. 작품만 놓고 볼 땐 저는 정말 너무 좋았어요. 흥미와 깊이를 다 갖춘 이야기더라고요. 그런데 서머싯 모옴뿐만 아니라 유독 토마스 하디 관련 에피소드가 많은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09-23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읽고 있습니다.

다만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책
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스러
운 샘의 책이 나오는 바람에 그만...

모옴의 돌려까기가 진정 -

blanca 2021-09-24 10:01   좋아요 1 | URL
아, 반가워요. 재미있죠. 모옴이 좀 그래요^^;;
 

아마 교보문고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나는 거기에 서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물론 중역본이었고(당시는 그랬다), 축약본이었다. 무척 지루했고 음울했지만 나는 "읽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허영으로 서서 온전치 않은 <죄와 벌>을 말 그대로 활자만 읽었다. 이후로 나는 내가 <죄와 벌>을 읽었다고 착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학생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창녀와 유형을 가는 이야기로 그렇게 기억하면서...





다시 <죄와 벌>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팟캐스트를 듣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죄와 벌>을 평생에 걸쳐 여러 번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이렇게 활자가 폄하되는 시대에 1800년대의 러시아어로 쓰인 분량도 적지 않은 책이 여전히 읽힌다는 건 분명 그걸 읽음으로써 얻는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죄와 벌>의 완역본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다시 읽은,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읽은 <죄와 벌>은 놀라웠다. 놀라운 현재적 가치를 지닌 그야말로 위대한 작품이었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고답적이지 않았고 몰입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년 라스콜니코프가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는 점. 가난한 법대생이 아니라 정말 처절할 정도로 극한 빈곤에 시달려 대학 생활도 지속할 수 없었던 비참한 상황이었다는 점.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바로 뛰어들어 도와주고야 말았던 내적 선함을 간직했던 청년이었다는 점. 끝까지 자백과 은폐 사이에서 갈등했다는 점. 그러한 점들이 새롭게 읽혔다. 그리고 친구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 곁을 끝까지 지키고 그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책임지는 그의 우정이 감동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점은 그가 창조하는 캐릭터가 가지는 설득력이다. 많은 작가들이 죽어 있는 전형적인 인물을 자신의 각본대로 움직이기 위해 활용한다. 잠깐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스토리 자체에 몰입하거나 재미를 느꼈다는 착각을 할 수는 있지만 진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을 창조해내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이 하나의 성취로 가는 경계가 나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모두 살아서 지면을 뚫고 나온다. 특히 라스콜니코프의 여동생 두네치카에게 흑심을 품고 덤볐다 자살을 택하게 되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죽음 전 행적은 인상적이다. 여자를 탐하고 아내를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는 그가 죽기 전 택한 일은 놀랍게도 자선이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가지 없어진 소냐의 동생들이 살아나갈 방도를 세심하게 마련해 준다. 유들유들하게 라스콜니코프를 압박해 오는 판사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또한 의외의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언뜻 라스콜니코프의 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에게 삶 그 자체의 가치를 깨닫도록 주도면밀하게 이 청년에게 접근해서 감형을 유도해 낸다. 이 둘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내면을 지니고 궁극의 영향을 주인공에게 끼치게 된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고백할 수 없지만 결국 지금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껴안고 어머니 앞에 선 아들의 장면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저릿했다. 



"아, 어쩜 이렇게 더러워졌니."

"어제 비를 맞았어요, 어머니......"


이 짧은 대화만으로 모든 것을 모자는 소통한 것처럼 보인다. 둘이 미처 주고받지 못한 말들 사이로 엄청난 고통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어머니는 전도유망했지만 가난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들에게 이루지 못할 희망을 끝내 환각처럼 간직한다. 살인자로 유형을 떠난 아들. 


결국 자백하고 소냐와 함께 유형을 떠난 라스콜니코프의 엔딩. 마침표는 사랑의 발아다. 나는 이런 결말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음울하고 절망적인 비관적인 결말을 예정하고 글을 쓰는 사람인 줄 오해했다. 이런 아름다운 아쉬운 결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삶으로 사랑에 대한 기대로 끝낼 수 있는 작가가 이 지구상에 이 작가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끝까지 참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지도 않으면서 읽는 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도.


하지만 여기에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점차 옮겨가고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며 점차 다시 태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선과 악의 경계, 죄와 벌의 간극, 생과 죽음의 거리, 이 모든 걸 기꺼이 해체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지형도를 펼쳐낼 수 있는 그러한 책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은 읽는 일이 가지는 가치를 재발견하게 한다. 나는 오늘 비로소 제대로 <죄와 벌>을 처음으로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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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15 1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두 올해안 죄와 벌은 꼭 다시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도끼쌤 탄생 200주년이라 해서 나름 추모하려구요!ㅎ 30대에 읽은 어설픈 감정만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을 이해할수 있는 좋은 키워드를 많이 던져 주셨네요! 감사드리구요, 즐건 독서하시구요!ㅎ

blanca 2021-09-16 10:26   좋아요 0 | URL
막시무스님, 왜 사람들이 도끼, 도끼 하는지 벌써 태어난 지 200년이 된 작가의 책을 여전히 이야기하고 읽는지 저는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이 사람은 뭔가 경계를 넘어서 훨훨 날아간 사람인 것 같아요. 책의 문장들이 살아 있어요.

다락방 2021-09-15 19: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죄와 벌 다시 읽겠습니다. 저는 열린책들 읽었었는데 아 열린책들로 다시 읽을까요(가지고 있습니다) 블랑카 님처럼 문동으로 읽을까요. 아 너무 빨리 읽고 싶어요!!

막시무스 2021-09-15 19:51   좋아요 2 | URL
책을 읽겠다는 강한 의지는 구매로서 완성된다는 신념을 가진 1인으로서 문동판 구매를 적극 권장드립니다!ㅎ

다락방 2021-09-15 20:05   좋아요 2 | URL
아아.. 왜 이러시는 겁니까……. 흑흑 ㅜㅜ 그게 낫겠죠? 🙄

blanca 2021-09-16 10:2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우리의 재독은 소비를 합리화한다. 저는 요새 이렇게 새로 나온 버전으로 다시 고전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답니다. 새 종이의 감촉을 느껴 보시죠. 가독성이 정말 좋더라고요.

새파랑 2021-09-15 2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니까 죄와벌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이 책 너무 좋더라구요. 좋은 책은 다시 읽을수록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blanca 2021-09-16 10:28   좋아요 1 | URL
고전이 왜 고전인지 알겠더라고요. 진짜 마지막 장 읽는데 더워 죽겠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작가는 그냥 태어나는 것 같아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접신들린 작가 같아요. 인물들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냥 도스토옙스키한테 쏟아져 들어온 느낌....

라로 2021-09-15 2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으니 다시 제대로 읽고 싶어져요!!! 저도 열린책으로 읽었는데 문동으로 다시 읽어볼까요? 그런데 전자책이 없네,, 철푸덕

blanca 2021-09-16 10:30   좋아요 0 | URL
이미 읽으셨군요! 저는 한 권짜리(말도 안 되는 축약본이죠) 완전 오독한 상태에서 제대로 처음 읽으니 정말 너무 너무 좋더라고요. 너무 짧아서 화가 날 정도였어요. 고전은 언제나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상이...아, 그런데 왜 전자책이 없을까요? 조금 기다리시면 나오지 않을까요? 보니까 세문은 거의 전자책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세트] 죄와 벌 1~2 - 전2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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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중의 걸작. 마지막 대목 읽고 전율. 도스토옙스키가 생존해서 로쟈와 소냐가 유형 생활을 겪고 마침내 어떻게 됐는지 후속편을 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재미있고 문장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악과 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혀줌.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고전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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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9-15 17: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이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고전읽기였다는 말씀에 너무 공감합니다! 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ㅎ

blanca 2021-09-15 19:18   좋아요 2 | URL
막시무스님도 아시는군요!오랜만에 느낀 감정이었어요.

새파랑 2021-09-15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내심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는 말 멋지네요 ^^

blanca 2021-09-15 19:18   좋아요 1 | URL
저는 정말 많은 인내심을 요구할 줄 알았거든요 ㅋㅋ

다락방 2021-09-15 17: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물다섯에 읽었는데 블랑카님 평을 보니 지금 새로 읽고 새로운 감상을 갖고 싶어지네요. 이렇게 사야할 그리고 읽어야할 책의 목록은 늘어가나요..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잊혀지지가 않아요. 라스꼴리니코프..

막시무스 2021-09-15 17:55   좋아요 2 | URL
개인적으로 뫼르소와 라스콜리니코프는 잘 잊혀지지 않는 이름인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1-09-15 18:29   좋아요 3 | URL
뫼르소!! 그러네요!! 😱

blanca 2021-09-15 19:19   좋아요 1 | URL
아놔, 러시아 이름 ㅋㅋ 그런데 너무 신기한게 러시아 사람들은 전혀 어렵다고 생각 안 한대요. 당연한 거지만 ㅋㅋㅋ 오, 너무 좋은 나이에 읽으셨어요. 라스콜니코프 나이가 딱 스물셋이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이십 대와 사십 대가 친구가 될 일은 없다. 친구가 되는 선결 조건은 전제는 일단 연령대가 같아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선, 세상에 대해 가지는 불만, 기쁨을 느끼는 지대가 겹쳐야 비로소 대화는 시작된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한다고 나는 여긴다.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가 아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에게 하는 조언이나 의견은 잔소리가 된다. 발끈한다. 요즘 애들은 저러니까 안 돼, 저 아줌마는 꼰대스러워. 모든 이해와 곡해는 세대차로 환원된다.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경계한다.


아주 예쁜 이탈리아 친구는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렸는데 나를 자신의 친구라고 불렀다. 아이가 동갑이라 친해진 우리는 서로의 나이를 끝까지 모른 채 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나이 차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애초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면 우리가 나눴던 그 수많은 교감의 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우정을 그리워한다. 그러한 우정은 나이가 절대적인 경계라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런 교감은 간접적으로 읽기를 통해서 가능할까.
















젊은 작가 서이제의 문장은 특이하다. 확실한 단언형이 아니라 의심과 머뭇거림, 전복과 도치의 그것들로 해체된다. 그런데 어렵지 않다. 난해하지 않다. 그 흐름은 무언가 어떤 리듬감이 있어 이탈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심지어 지금 느끼는 것들이 혼재되어 공감을 자아낸다. 나는 서이제 작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이제 작가는 내가 이십 대에 느꼈지만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추스르지 못한 감정들을 언어로 소환한다. 지금도 여전히 내게 있는 것들을 환기한다.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었을 때, 앱으로 지도를 보면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나는 이런 말도 할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또는 반쯤 왔다고 힘내라고. 또는 한참 멀었다고. 지도를 보면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현 위치와 내가 가야 할 길, 그러나 삶에는 지도 같은 게 없어서,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살아야 했다. 

-서이제 <(그) 곳에서>


우리가 소환하는 청춘에 대한 미화된 이상화된 그리움과 지금 청춘이 그들의 젊음에 대하여 느끼는 현실적 결핍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도 와닿았다. 경제적 성장기에 향유한 우리들의 청춘과 잔치가 끝난 뒤의 그 허탈한 공간에서 방황하며 자신이 살 곳을 찾아 헤매어야 하는 오늘날의 청춘과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더 이야기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젊음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고 지금 한창 힘든 젊음에게 얘기하는 것은 결국 의사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돈이 되지 않는 무용한 것들을 꿈꾸는 이야기. 그래서 야단맞다 넘어지는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들에 마음이 가라앉을 찰나에 서이제 작가의 문장들은 부력을 부린다. 진지한데 한없이 무겁지만은 않은 이야기들로 읽는 이들도 덩달아 떠오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만드는 작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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