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비로운 일이 있다. 이를테면 충동적으로 산 호박잎. 이건 그냥 시판 쌈장과는 안 어울린다. 강된장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데 그건 심히 귀찮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다음 날 만나기로 한 엄마에게 쌈장을 부탁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런데 식당 앞에서 부시럭 부시럭 검은 봉지를 내미는 엄마가
"자, 쌈장이다. 쌈 싸먹어라. 상추까지 사려 했는데 상추는 아줌마가 안 나와 못 샀다."
이러는 것이었다. 그럴 때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쌈장을 말한 적이 없다. 엄마가 종종 쌈장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때 맞추어 쌈장이 왔다. 게다가 나에겐 호박잎이 있다. 상추 아줌마가까지 때맞춰 안 나와준 것이다. 이럴 수가.
게다가. 나는 하루키의 <우연 여행자>를 읽고 있었다. <우연 여행자>도 그런 신비로운 우연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인 하루키가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에게 요청하고 싶었던 앵콜곡을 마치 알아채기라도 한듯 바로 듣게 되는 우연, 우연히 카페에서 같은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만나게 된 여자, 그 여자의 투병으로 오랜 기간 소원했던 누나와 재회하게 된 우연 등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야기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핍진성도 떨어져 보이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역시 하루키이기 때문일까?
기본적으로 하루키의 이야기에는 신비로운 요소, 정합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서사의 진행들이 빈번하다. 갑자기 누군가가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거나 죽은 자를 보게 되는 등의 판타지는 그런데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거기엔 인간의 내면, 심연에 가닿은 하루키 특유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개입하는 우연성, 그 돌발적인 변수들에 대한 천착은 언어와 인식의 틀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그 지점을 이야기하는 데 하루키는 노련하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논리적인 근거를 댈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다.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을 하던 아들을 상어에게 잃은 엄마가 그 아들의 모습을 봤다고 주장하는 또래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시선에 맞춘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가 가지는 감동은 그 느닷없음이 끼어든 삶이 그 후로도 여전히 진행되는 모습을 그린 것에 기인한 바가 크다. 가장 큰 신비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상실, 절망,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는 것. 그 자체의 신비를 대적할 크기의 것은 없을 것 같다. 그게 가장 오컬트적인 삶의 비의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