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못했다. 오에 겐자부로는 마흔여덟부터 쉰 살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오로지 단테의 <신곡>만을 읽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먼저 <지옥 편>과 <연옥 편>을 읽기를 권한다. 단테가 서사시적 영웅 율리시스를 끊임없는 '순환'을 거부하고 기독교적인 종말관으로 뛰어들어가는 이야기로 그를 마침내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일부이지만 차근 차근 자신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신곡>을 풀어 설명하는 노작가의 간명한 문체가 <신곡>의 가장 효과적인 소개이자 이끌림을 유발한다. 꼭 기독교적인 교리가 아니더라도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내러티브는 역설적으로 삶의 이해와 무게를 더한다. '쓰는 인간'인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으로서의 성실성이 돋보인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읽고 이해하고 느끼는 그의 모습이 삶과도 겹친다.

 

 

 

 

 

 

 

 

 

 

 

 

 

 

 

 

오에 겐자부로가 가장 좋아한다는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 제26곡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프리모 레비가 죽을 배급받으러 가는 시간을 이용해 알자스 출신의 학생에게 이탈리어를 가르치려 이 텍스트를 활용했던 어느 유월의 눈부신 날을 떠올리게 한다. <신곡>의 지옥편에서 오디세우스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배고픔' 그 자체로 한 덩어리였던 사람들 속 그 가혹한 운명을 지옥으로 추방당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며 프리모 레비는 실감하고 망각하고 승화시킨다.

 

 

 

 

 

 

 

 

 

 

 

 

 

 

 

나는 운명의 호의에 대해 어마어마하고, 뿌리 깊고, 어리석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일이 나와는 관련이 없는, 문학적인 허구로 보였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중

 

모든 이야기들은 삶을 딛고 있다. 인간의 머리에서 가슴에서 떠올릴 수 있는 허구는 허구로서 그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으며 단련시키고 연습하며 때로는 너무나 가혹한 일들을 감당해야 되나 보다. 읽는 자로서 망각했던 사실들을 삶은 경험으로 가르치려 든다.

 

이제 정말 단테의 <신곡>을 읽어야 할 때가 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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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8-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은 사춘기 시절 사 놓고 안 읽은 적이 있어요.
너무 어려워서 차마 못 읽겠더군요. 지금쯤이면 어려워도 읽게 되려나요?
한창 반값도서 할 때 <단테 신곡 강의>란 책을 사 놓은 적이 있는데
이건 게으르고 다른 책에 밀려 아직도 못 읽고 있는데
그거라도 읽어 봐야겠어요.ㅋ

blanca 2015-08-13 21:48   좋아요 0 | URL
저는 시도조차 안해봤어요. 그런데 이렇게 군데 군데 인용된 대목들은 어찌나 절창들인지 꼭 읽어보고 싶지만 역시 쉽지 않을 듯해요.

cyrus 2015-08-1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민음사의 <신곡>을 읽다가 짜증나서 포기했어요. 주석이 본문 맨 뒤에 있어서 본문 읽으랴, 주석 확인하랴, 종이를 이리저리 번갈아 넘기는 것이 귀찮아요. 그래서 도서관에 열린책들의 <신곡>을 빌려서 읽었어요. 주석이 본문 아래에 있어서 읽기가 편했어요. 지옥 편만 읽다가 그만뒀는데 만약에 <신곡>을 다시 읽는다면 열린책들 판본을 사야겠어요. 민음사 판본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어요. ^^

blanca 2015-08-13 21:51   좋아요 0 | URL
오늘 안 그래도 주문하려다 말았는데 이게 주석이 뒤에 있으면 굉장히 번거롭더라고요. 열린책은 저는 활자가 너무 촘촘해서 또 피곤하더라고요. 이러나 저러나 저는 아직 신곡이 때가 아닌 걸까요? 역시 사이러스님은 읽으셨군요!! 젊음과 방대한 독서량이 다시 한번 부럽네요^^;;

moonnight 2015-08-15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을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시는 페이퍼예요^^ 오래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니 이 기회에 다시 도전해봐야겠네요^^

blanca 2015-08-15 09:25   좋아요 0 | URL
달밤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대단해요. 저도 언젠가는 읽을 거라 다짐만 해봅니다. 많은 사람들한테 회자되고 인용되는 고전은 그 만한 무게와 가치가 있더라고요.

희선 2015-08-22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는 어떤 책이든 오래 보는 듯합니다 제가 이 책을 본 건 아니고 다른 분이 쓴 걸 보니 그렇더군요 하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을 때까지 보는 거겠네요 쓰는 것뿐 아니라 읽는 것도 마음을 다하다니, 어려운 일인데... 저도 《신곡》 사두기만 하고 안 봤네요 언젠가 볼 날이 올지... 오에 겐자부로만큼은 못 보더라도 한번이라도 보면 좋을 것 같네요


희선

blanca 2015-08-22 08:43   좋아요 0 | URL
아, 희선님에게는 <신곡> 있군요. 곁에 두고 언젠가를 기약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듯해요. 오에 겐자부로가 작가로서도 훌륭하겠지만(저는 그의 책을 한 권만 읽어서요) 읽는 독자로서의 태도가 아주 성실하더라고요.
 

모리스 샌닥의 그림책 속 괴물들은 아이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아니, 어느 정도 친근하고 자기들과 같이 살자고 너스레를 떨기까지 한다. 아이가 떠난 괴물들의 세계는 아이가 침몰하는 곳이 아니라 잠시 거쳐가는 곳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이가 돌아오면 그 아이를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따뜻한 밥이 있는 엄마의 품이 전제되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성장하기 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그 수많은 두려움, 모호한 부정적 감정들은 괴물, 귀신, 전령의 판타지를 통해 건강하게 해소된다. 괴물들의 나라에 간 것은 갑자기 경험한 어른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주변인의 생로병사의 충격, 사랑과 관심을 앗아간 동생에 대한 미움 등이 아직 딱딱하게 굳지 않은 아이의 시선이 응집되어 만든 상징일 수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들의 결이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나 다 실체가 규명되고 설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모호하게 뭉쳐지고 흐릿하게 투사되어도 그러한 것이 살아가는 데에 불가결하고 성장통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너그러움은 아이가 잘 커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잘 쓰여진 성장소설은 아름답고 천진하기만 한 어린 시절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다. 때로 눈물겨운 일들도 고통스러운, 두려운 에피소드들도 모자이크처럼 잘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말 그대로 '성장'은 정지가 아니기에 아름다운 정경의 스냅 사진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마냥 웃고 떠들고 부모님과 어른들이 든든하게 지켜서서 아이에게 닥쳐올 모든 난관과 위기를 사전에 막아주고 해결해 준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친구들에게 부정당한 경험, 아기 동생이 별이 된 일, 엄마의 투병이 없었더라면 유년 시절이 완전무결했을까?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러한 뼈아픈 순간들이 모여 세상을 살며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그 수많은 곤란하고 난감한 일들에 대처하고 의미를 통합할 수 있지 않았나,도 싶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사이로 모든 것을 함께 하던 친구들, 밤새도록 싸우고도 부둥켜 안고 인형 놀이를 할 수 있었던 동생, 사랑을 주고 배려를 주었던 어른들에 대한 달콤하고 아련한 추억들도 농밀하게 배어 있다. 뒤돌아서면 결국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었던 나날들, 감사할 따름이다.

 

 

 

 

 

 

 

 

 

 

 

 

 

 

 

열두 살. 소년의 마법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변화무쌍한 일들은 우리가 한때 상상했던 괴물, 유령, 천사, 심지어 멸종된 공룡까지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이것은 판타지일까? 성장 소설 안에서의 환상적인 요소들은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역설이다. 꿈만 꾸면 하늘을 날아오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던 시절들은 분명 나만의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정말 하늘 전체를 수월하게 잘 놀고 어떤 날은 꿈에서도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추락하고 만다.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되는 시점이 분명 있다. 그 시점까지의, 그 시점을 이미 넘어서버리고 그 나날들을 그리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호수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야기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다. 마을 사람 거의 전부를 용의자선에서 진지하게 의심하는 소년의 철없는 귀여움은 일부다. 아이는 친구들과 사방을 뛰어다니고 환상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죽어가는 친구에게 그 친구가 갈 아름다운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눈물 속에 펼쳐 놓으며 이별한다. 외부에서 닥쳐오는 부정적인 사건, 사고 들은 아이의 이야기 세계 속, 환상 속에서 나름대로 건강하게 완충지대를 찾아 안착한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친구가 급작스런 사고로 떠나고, 형제처럼 친밀했던 개도 죽고, 아버지가 실직해서 가난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소년 코리가 건강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거기에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흔 살 생일이 다가오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코리가 복기하는 제퍼에서의 열두 살 소년의 이야기는 너무나 낯익다. 꼭 다시 한번 살고 싶은 열두 살. 잠시 힘듦이 유예되어 있었던 눈부시던 나날들. 짧은 머리에 눈이 인형처럼 큰 여자애가 전학와 나의 단짝이 되어주던 나날들.

 

이제 나의 힘듦은 완충 지대가 없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 버리는 나날들이다. 어른이 되어버리고 나면 잃어버리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밀려온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도 없지만 때로 통제해야 하는 책임감은 야멸차게도 걸어온다. 아직 배워나가야 할 것들도 묻고 싶은 것들도 많은데 나는 이제 '어른'이라는 탈을 썼기에 성숙한 척 해야 한다. 그래서 성장소설을 읽는 것은 그것이 뻗어나갈 여로와 중간지대를 알기에 가슴이 아릿해진다. 영원한 해피엔딩은 없는 게 삶이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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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8-11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이라고 해도,
눈을 감고 바라보면
얼굴이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만날 테니,
그림책을 그리는 어른이나
그림책을 보는 아이나
모두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사이좋게 노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리라 느껴요

blanca 2015-08-11 10:28   좋아요 0 | URL
네, 모리스 샌닥의 괴물을 은근히 귀여워요.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괴물들 태반이 사실 아이에게 두려움이나 위협을 주는 존재라기보다는 친근한 형 같은 이미지예요. 무서운 척 하지만 기실은 안전하다,는 어른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의 또다른 얘기인 것도 같아요.

희선 2015-08-2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먹으면 어릴 때가 좋았어 하지만, 어린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듯합니다 어린이 나름대로 힘든 일이 있으니까요 나이를 먹고 겪는 일보다 좀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한다면 별로기도 하네요 아무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은 없겠죠 아주 조금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린이만 그런 건 아니기도 하네요


희선

blanca 2015-08-22 08:42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어요. 희선님 말씀이 맞아요.
 

할머니를 보며 나는 할머니는 할머니로 태어난 줄 알았다. 보드라운 주름의 결들, 굽은 허리에서 한때는 홍조를 띠었을 어린 소녀, 젊은 새댁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여든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집에서 몸소 치룬 손님들은 돌아가며 "이제는 돌아가실 때도 됐는데..."라는 말로 어린 나를 울렸다. 그게 어떤 의미든 할머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느낌에 가슴이 저릿했다. 시간이 흐르고 죽음이 다가오며 할머니는 치매를 앓으셨다. 이제 걸걸하게 자신을 주장하던 할머니는 까마득한 옛날 돈을 빌려간 사람에게 돈을 받으러 가신다고 아파트 복도를 배회하셨다. 때로는 당신에게 보물 같았던 외아들을 못 알아보셨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할머니다운 할머니스러운 존재는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가버린 듯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며 배웅하지 못하고 때로는 지겨워하고 진저리내며 할머니와 석별하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마도 이러했던 나의 과오에 끄달릴 것이다.

 

 

 

 

 

 

 

 

 

 

 

 

 

 

 

 

 

 

 

아직 영화관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없다.  대신 더듬더듬 책을 읽었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교수, 다복한 가정, 무심한 듯하지만 평생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동반자이자 같은 직종에서 협업을 했던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앨리스에게는 알츠하이머가 온다. 그녀가 이루었던 모든 학문적 성과, 가르쳤던 학생들, 사회적 관계망 들은 자신마저 점차 망각하게 되는 이 잔인한 병마 앞에서 쓸려나간다. 우리는 치매 환자를 돌보거나 치료하는 입장에서만 그들을 이야기했었지만 여기에서는 앨리스 본인이 치매에 잠식되어 나가는 시선을 볼 수 있다. 아기를 기다렸던 첫째 딸과 연기를 했던 둘째 딸은 어느 순간 낯선 아기 엄마와 연기자로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녀가 사랑했던 '읽기'와 '쓰기'도 맥락을 잃는다. 사랑했던 가족의 알츠하이머 투병은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이 자신들의 삶의 진로를 때로 틀고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희생을 요구한다. 이를 둘러싼 다양한 반응, 다툼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부러웠던 것은 비교적 여기에 비해 앨리스를 둘러 싼 환경은 치매 환자와 그들을 돌보는 가족들을 위한 사회적 지지망이 두터워 그들이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앨리스가 느끼는 소외감, 격리의 느낌의 깊이에 대한 묘사는 그렇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치매 환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지에 대한 반증 같아 씁쓸했다.

 

 

 

 

 

 

 

 

 

 

 

 

 

 

'존재','나'라는 느낌은 때로 '죽음'과 '늙음' 앞에서 무색하다. 노인의 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때로 경청되지 않는다. '삶'은 흔히 '젊음'과 혼동된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서른 살의 회계사를 빌려 스스로를 기술한다. 그러나 이미 서른의 그는 충분히 늙어버렸다. 그를 스쳐가는 풍경, 사물, 사람은 그를 관통하여 그의 일부가 된다. 사무실의 배달원의 떠낢도 그에게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는 떠나가며 그의 조각을 남긴다. 그는 이미 죽을 것을 명징하게 인식한다. 모든 것이 떠날 것이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심지어 그 자신도 무로 화할 것을 항상 의식하며 스스로를 관통하며 지나가는 풍경을 하나 하나 언어로 주워 담는다. 마치 페르난두 페소아의 일기집 같은 이 책은 어떤 체계나 서사 없이도 스스럼 없이 읽힌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이 그의 입을 빌려 나올 때 이 꿉꿉한 더위는 탄산수가 넘어간 후 느끼는 청량감에 물러난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구체화하는 길에 그의 고백이 지나간다.

 

영국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 간호사 출신으로 수많은 노인들을 지척에서 돌보았던 여자가 칠십 대에 스위스로 가 안락사를 택했다. 그녀는 중병을 앓았던 것도 존재의 스러짐을 가족이 아프게 목격해야 하는 치매를 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늙었다. 그녀가 목격한 수많은 '늙음'은 암울하고 슬펐다. 이제 그녀는 존재하기를 멈추기를 택했다. 죽음에 먹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안락사가 그것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을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쨋든 그녀는 스스로 '무'로 걸어들어갔다.

 

어느 날 사물에 대한 인식이 끝나면, 심연의 문이 열릴 것이고, 우리가 가진 과거의 모든 것들-별과 영혼의 파편에 불과한 것들-은 집 밖으로 털려날 것이다.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이 다시 시작하도록 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중 

 

나는 아직도 삶에 애착이 많은가 보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명제와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합시키면 눈물이 난다. 할머니는 떠나시며 당신의 조각을 나에게 부려 놓았나 보다. 아니 나 이전에 떠난 그 익명의 혹은 이명의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삶과 존재가 조각 조각 다 스며 있나 보다. 그러니 기억하고 돌이켜 보고 그리고 또 거기로 걸어들어가나 보다.

 

'존재' 자체가 하나의 '환상'임을 나도 그처럼 제대로 인식하고 싶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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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5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5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8-06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안의 책, 살까 말까 망설였는데 여기서 보게 되네요. ^^
이 책 어떤가요? 추천할 만한가요?

blanca 2015-08-06 18:26   좋아요 0 | URL
페크님, 저는 추천하고 싶어요. 이게 좀 단숨에 읽히는 책은 아닌데 설명하기 힘든 마력이 있네요. 문장이 찰지다고나 할까요?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을 명료하게 문자화하는 능력이 대단한 사람인 듯해요.
 

두 번 다시 안 오는 시간, 비교적 관대함이 주어지는 나날들, 너무 이상주의적이어도 입찬 소리만 해도 조금은 미쳐도 용인되는 시절.

 

영감은 번득이고 천재가 태어나는 시간. 시인으로 가는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는 유일무이한 찰나들. 김연수가 종일 시를 쓰고 또 써도 시간이 남아돌았던 바로 그 시간. 하지만 두 번 경험하기엔 조금 저어하게 되는 성장통.

 

 

 

 

<길 위에서>의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우스, 앨런 긴즈버그, 루시엔 카는 1950년대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고유명사는 이제 마치 보통명사처럼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청춘의 치기, 무모함, 반항, 자유로움을 안고 회자된다. 시에서의 운율, 압운, 소설의 일반적인 형식은 이 작가들 앞에서 탈피해야 하는 껍질이자 도약해야 하는 디딤대가 되고 민낯과 속살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독자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다 거기에서 지금까지 미처 꺼내어 놓지 못한 실재의 조각들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쓰다듬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들이 공유한 시간들은 성정체성에 논란을 지피기도 했다. 여러가지 소문, 의견이 있었지만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동성애적 성향을 지녔던 것은 어느 정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인 듯하다. 신비한 눈빛의 배우로 십대 후반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연상시키는 데인 드한이 그들의 모임 중 뮤즈가 되다시피 한 루시엔 카를 연기한다. 똘똘이 스머프가 떠오르는 해리 포터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유명한 시인 아버지와 정신병자 어머니의 가정 안에서 혼란을 느끼며 루시엔 카에 점차 매혹당해가는 미묘한 연기의 몸짓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루시엔 카는 앨런 긴즈버그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의 시심이 발화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 이 왜소하고 주눅들어 보이는 소년은 사랑과 우정, 이끌림과 염증의 미묘한 경계에서 루시엔과 관계를 맺으며 대시인으로 가는 여정에 선다.

 

<킬 유어 달링>의 핵심 사건은 실제 루시엔 카의 살인 사건이다. 오늘날로 보면 스토커를 죽인 셈이 된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은 종반부에 가서야 일어나는 만큼 영화의 전면부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음악에 이끌려 루시엔 카의 방으로 들어간 신입생 앨런에게 예이츠의 vision을 들려주는 그의 모습은 영화라는 영상물이 어떻게 그 한계 안으로 언어의 실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지에 대한 훌륭한 예증이 되어 준다. 예이츠의 시, 앨런의 시, 심지어 랭보의 시까지 소년들의 입에서 자유자재로 읊조려지며 사건의 배경이 되고 영상의 자막이 되어준다. 예이츠는 비트 세대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부활했다. 삶과 죽음의 그 반복되는 수레바퀴에서 탈피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가 사랑에서 집착으로 변질된 동성 애인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낢은 그들이 예이츠의 시를 오독하기 쉬운 청춘이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잭 케루악은 욕망과 마음이 이끄는 길의 여정에서도 생을 진지하게 반추했다.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순환 속에 자리할 지도 모른다는 감각은 역설적으로 이들 사이에서 예이츠의 시로 벼려진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찰나 안에 가두어진 영원은 그렇게 이 영화 안에서 성공적으로 발화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노년의 예이츠의 시를 읽는다고 했다. 그의 시에는 어떤 '초월적인 것'이 있다는 노작가의 이야기가 와닿는다. 시가 죽어가고 폄하되는 나날들, 결국 사람과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위대한 과업은 시인의 손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영화 같아 마지막 엔딩 크레딧 앞에서 숙연해졌다.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아이들, 시인의 시로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했던 과거의 흔적들이 그 어떤 그 사건의 진지한 분석, 설명, 변명보다 중심을 건드렸다는 느낌은 착각일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생에서 업을 끊고 진저리 나는 순환의 매듭을 풀어버리려 했던 시도는 인간이 생에서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결국 늙어가는 것이고 청춘과 석별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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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2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루악 역의 배우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아마데우 역할을 맡았었는데요. 연기는 잘 하는데 영화는 별로였어요. 킬 유어 달링스는 그 시대와 연령대의 아찔한 분위기를 잘 담아낸 것 같아요. 드한과 래드클리프 합도 잘 맞고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꼬띠아르는 벨 에포크로 가고싶다고 하잖아요. 저에게 기회가 있다면 비트닛 시절로 가고파요ㅎㅎ

blanca 2015-07-29 13:37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저도 최근에 미드나잇 인 파리도 봤어요. 완전 공감 백배입니다. 막 과거로 여행 가고 싶다는 ㅋㅋ

stella.K 2015-07-29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가 있었군요. 근데 왜 전 몰랐을까요?ㅠ
데인 드한이 디카프리오를 닮았나요?
디카프리오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왔을 때만해도 정말 꽃미남이 었는데...ㅠ
이 영화 한번 보고 싶네요.
블랑카님 영화 리뷰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전에 한 번 봤나? 기억이 안 나네...긁적 긁적~ㅎ

blanca 2015-07-29 14:17   좋아요 0 | URL
오늘은 실시간 댓글이네요. 스텔라님, 더 나아요, 디카프리오 한창 전성기 시절보다요. 연기력, 발성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꼭 보세요. 강력 추천합니다.

2015-08-05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5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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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1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가 있었군요!!!
냉큼 메모합니다. 어디서 봐야되죠?
무척이나 당기네요. 페이퍼 당선 축하드려요^^

blanca 2015-08-11 10:29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 저는 네이버 영화에서 다운 받아 핸드폰으로 봤어요. 자기 전에 두 번에 나누어 봤는데 정말 너무 좋더라고요. 화면 정지해서 인용된 시를 몇 번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신인감독에 저예산 영화였다는데 정말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도 높고 음악도 연기도 어디 하나 아쉬운 부분이 없었어요. 알라디너들이 참 좋아할 영화인 것 같아요.
 

딜은 그야말로 괴짜 아이였습니다. 단추로 셔츠에 부착한 파란색 리넨 반바지를 입었고, 머리카락은 눈같이 하얘서 마치 오리털을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듯했습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키는 내가 더 컸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푸른 눈이 연해졌다 짙어졌다 했습니다.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중 

 

 

 

 

 

 

 

 

 

 

 

 

 

 

 

 

 

 

앨라배마 주, 남매, 친척 집을 떠도는 이웃 아이 딜, 멀구슬 나무. 하퍼 리와 트루먼 커포티의 유년은 겹친다.<앵무새 죽이기>에서의  활달하고 당돌한 소녀 스카웃과 푸른 눈의 공상가 딜에는 실제 이웃해 살았고 청년기까지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심지어 트루먼 커포티의 작품 취재에도 동행했을 만큼 가까웠던 둘의 관계가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조금은 찌질하게 그려지는 이웃집 소년 딜의 모습에서 실제 트루먼 커포티는 자신을 발견하고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하퍼 리가 묘사해 낸 아름다운 유년의 순간들은 트루먼 커포티의 <풀잎하프>에서도 변주된다.

 

 

 

 

 

 

 

 

 

 

 

 

 

 

 

그가 묘사했듯 "어떠한 영광도 누리지 않았지만 아름답던 시절", 나무 위에 지어진 아이들의 오두막에는 실제 하퍼 리도 초대되었었다.  공교롭게도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에서 변호사 아버지에게서 배운 공감 능력이 발휘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트루먼 커포티의 나무 위 오두막집에서도 나란히 수용된다. 아이들의 유년을 지배한 것은 '사랑'과 '교감'이었다. 스카웃의 오빠가 억울하게 강간죄로 기소된 흑인이 배심원들에게서 유죄를 받자 울음을 터뜨린 것은 남매의 아버지가 진정한 공감은 그 사람의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했던 이야기가 오롯이 실현된 셈이었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때로 그러한 가르침을 체득하는 듯하면서 어느새 그것을 상쇄시킬 만큼의 경계와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며 유년을 떠나 보낸다. 우리에게 간식을 나누어 주었던 이웃 아주머니들도 함께 온갖 놀이와 공상과 투쟁을 나누었던 친구들도 평생을 절실하게 영원히 매달려 있을 것 같았던 그 수많은 아름다운 가치와 이상들도 시간의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가라앉으며 삶을 그려 나간다. 잃어버린 것들과 잊혀진 것들의 흔적이 무의미하다면 가장 절절하게 살았던 것 같았던 시간들은 너무나 허무하게 딜리트 키 앞에서 스러진다. 과연 그런 걸까.

 

일단 변하면 제자리로 도로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 세상은 우리를 알았다. 우리는 절대로 다시 따뜻해지지 않을 것이다.- 트루먼 커포티 <풀잎 하프> 중  

 

 

 

 

 

그러자 문득 이 늙어가는 몸뚱이 속에 아직도 그 깡마르고 상처 딱지 투성이였던 소년이 숨어 있는 것이 거의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때의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 스티븐 킹 <스탠 바이 미>

 

 

 

 

 

 

 

 

 

 

 

 

 

 

 

그러니까 말이다. 분명 "그 조그맣고 깡마르고 상처 딱지 투성이였던 아이"가 아직도 분명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어 무언가를 건드리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종종 출몰하고는 한단 얘기다. 스티븐 킹도 하퍼 리도 트루먼 커포티도 그러한 내면의 어린 아이들을 망각하지 않았기에 <앵무새 죽이기>도 <풀잎 하프>도 <스탠 바이 미>도 우리를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직 크지 않은 아이, 결점도 미성숙도 열등감도 절대 극복할 수 없이 날것으로 다 경험하고 아파해야 했던 그 유년은 그 해 여름 밤, 가을 낮, 겨울 아침에 분명 타박 타박 걷고 있던 곱슬 머리 여자애와 함께 어딘가에 고스란히 살아 있을 것같다. 커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눈물 또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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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5 0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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