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샌닥의 그림책 속 괴물들은 아이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아니, 어느 정도 친근하고 자기들과 같이 살자고 너스레를 떨기까지 한다. 아이가 떠난 괴물들의 세계는 아이가 침몰하는 곳이 아니라 잠시 거쳐가는 곳이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이가 돌아오면 그 아이를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따뜻한 밥이 있는 엄마의 품이 전제되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성장하기 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그 수많은 두려움, 모호한 부정적 감정들은 괴물, 귀신, 전령의 판타지를 통해 건강하게 해소된다. 괴물들의 나라에 간 것은 갑자기 경험한 어른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주변인의 생로병사의 충격, 사랑과 관심을 앗아간 동생에 대한 미움 등이 아직 딱딱하게 굳지 않은 아이의 시선이 응집되어 만든 상징일 수도 있다. 부정적인 감정들의 결이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나 다 실체가 규명되고 설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모호하게 뭉쳐지고 흐릿하게 투사되어도 그러한 것이 살아가는 데에 불가결하고 성장통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너그러움은 아이가 잘 커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잘 쓰여진 성장소설은 아름답고 천진하기만 한 어린 시절에 대한 판타지가 아니다. 때로 눈물겨운 일들도 고통스러운, 두려운 에피소드들도 모자이크처럼 잘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 말 그대로 '성장'은 정지가 아니기에 아름다운 정경의 스냅 사진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마냥 웃고 떠들고 부모님과 어른들이 든든하게 지켜서서 아이에게 닥쳐올 모든 난관과 위기를 사전에 막아주고 해결해 준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친구들에게 부정당한 경험, 아기 동생이 별이 된 일, 엄마의 투병이 없었더라면 유년 시절이 완전무결했을까?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러한 뼈아픈 순간들이 모여 세상을 살며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그 수많은 곤란하고 난감한 일들에 대처하고 의미를 통합할 수 있지 않았나,도 싶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사이로 모든 것을 함께 하던 친구들, 밤새도록 싸우고도 부둥켜 안고 인형 놀이를 할 수 있었던 동생, 사랑을 주고 배려를 주었던 어른들에 대한 달콤하고 아련한 추억들도 농밀하게 배어 있다. 뒤돌아서면 결국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었던 나날들, 감사할 따름이다.
열두 살. 소년의 마법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변화무쌍한 일들은 우리가 한때 상상했던 괴물, 유령, 천사, 심지어 멸종된 공룡까지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이것은 판타지일까? 성장 소설 안에서의 환상적인 요소들은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역설이다. 꿈만 꾸면 하늘을 날아오르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던 시절들은 분명 나만의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정말 하늘 전체를 수월하게 잘 놀고 어떤 날은 꿈에서도 꿈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추락하고 만다.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되는 시점이 분명 있다. 그 시점까지의, 그 시점을 이미 넘어서버리고 그 나날들을 그리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호수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야기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결코 전부는 아니다. 마을 사람 거의 전부를 용의자선에서 진지하게 의심하는 소년의 철없는 귀여움은 일부다. 아이는 친구들과 사방을 뛰어다니고 환상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죽어가는 친구에게 그 친구가 갈 아름다운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눈물 속에 펼쳐 놓으며 이별한다. 외부에서 닥쳐오는 부정적인 사건, 사고 들은 아이의 이야기 세계 속, 환상 속에서 나름대로 건강하게 완충지대를 찾아 안착한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친구가 급작스런 사고로 떠나고, 형제처럼 친밀했던 개도 죽고, 아버지가 실직해서 가난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소년 코리가 건강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거기에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흔 살 생일이 다가오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코리가 복기하는 제퍼에서의 열두 살 소년의 이야기는 너무나 낯익다. 꼭 다시 한번 살고 싶은 열두 살. 잠시 힘듦이 유예되어 있었던 눈부시던 나날들. 짧은 머리에 눈이 인형처럼 큰 여자애가 전학와 나의 단짝이 되어주던 나날들.
이제 나의 힘듦은 완충 지대가 없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 버리는 나날들이다. 어른이 되어버리고 나면 잃어버리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밀려온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도 없지만 때로 통제해야 하는 책임감은 야멸차게도 걸어온다. 아직 배워나가야 할 것들도 묻고 싶은 것들도 많은데 나는 이제 '어른'이라는 탈을 썼기에 성숙한 척 해야 한다. 그래서 성장소설을 읽는 것은 그것이 뻗어나갈 여로와 중간지대를 알기에 가슴이 아릿해진다. 영원한 해피엔딩은 없는 게 삶이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