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못했다. 오에 겐자부로는 마흔여덟부터 쉰 살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오로지 단테의 <신곡>만을 읽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먼저 <지옥 편>과 <연옥 편>을 읽기를 권한다. 단테가 서사시적 영웅 율리시스를 끊임없는 '순환'을 거부하고 기독교적인 종말관으로 뛰어들어가는 이야기로 그를 마침내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일부이지만 차근 차근 자신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신곡>을 풀어 설명하는 노작가의 간명한 문체가 <신곡>의 가장 효과적인 소개이자 이끌림을 유발한다. 꼭 기독교적인 교리가 아니더라도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내러티브는 역설적으로 삶의 이해와 무게를 더한다. '쓰는 인간'인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으로서의 성실성이 돋보인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읽고 이해하고 느끼는 그의 모습이 삶과도 겹친다.

 

 

 

 

 

 

 

 

 

 

 

 

 

 

 

 

오에 겐자부로가 가장 좋아한다는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 제26곡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프리모 레비가 죽을 배급받으러 가는 시간을 이용해 알자스 출신의 학생에게 이탈리어를 가르치려 이 텍스트를 활용했던 어느 유월의 눈부신 날을 떠올리게 한다. <신곡>의 지옥편에서 오디세우스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배고픔' 그 자체로 한 덩어리였던 사람들 속 그 가혹한 운명을 지옥으로 추방당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며 프리모 레비는 실감하고 망각하고 승화시킨다.

 

 

 

 

 

 

 

 

 

 

 

 

 

 

 

나는 운명의 호의에 대해 어마어마하고, 뿌리 깊고, 어리석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일이 나와는 관련이 없는, 문학적인 허구로 보였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중

 

모든 이야기들은 삶을 딛고 있다. 인간의 머리에서 가슴에서 떠올릴 수 있는 허구는 허구로서 그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으며 단련시키고 연습하며 때로는 너무나 가혹한 일들을 감당해야 되나 보다. 읽는 자로서 망각했던 사실들을 삶은 경험으로 가르치려 든다.

 

이제 정말 단테의 <신곡>을 읽어야 할 때가 왔나 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5-08-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은 사춘기 시절 사 놓고 안 읽은 적이 있어요.
너무 어려워서 차마 못 읽겠더군요. 지금쯤이면 어려워도 읽게 되려나요?
한창 반값도서 할 때 <단테 신곡 강의>란 책을 사 놓은 적이 있는데
이건 게으르고 다른 책에 밀려 아직도 못 읽고 있는데
그거라도 읽어 봐야겠어요.ㅋ

blanca 2015-08-13 21:48   좋아요 0 | URL
저는 시도조차 안해봤어요. 그런데 이렇게 군데 군데 인용된 대목들은 어찌나 절창들인지 꼭 읽어보고 싶지만 역시 쉽지 않을 듯해요.

cyrus 2015-08-1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민음사의 <신곡>을 읽다가 짜증나서 포기했어요. 주석이 본문 맨 뒤에 있어서 본문 읽으랴, 주석 확인하랴, 종이를 이리저리 번갈아 넘기는 것이 귀찮아요. 그래서 도서관에 열린책들의 <신곡>을 빌려서 읽었어요. 주석이 본문 아래에 있어서 읽기가 편했어요. 지옥 편만 읽다가 그만뒀는데 만약에 <신곡>을 다시 읽는다면 열린책들 판본을 사야겠어요. 민음사 판본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어요. ^^

blanca 2015-08-13 21:51   좋아요 0 | URL
오늘 안 그래도 주문하려다 말았는데 이게 주석이 뒤에 있으면 굉장히 번거롭더라고요. 열린책은 저는 활자가 너무 촘촘해서 또 피곤하더라고요. 이러나 저러나 저는 아직 신곡이 때가 아닌 걸까요? 역시 사이러스님은 읽으셨군요!! 젊음과 방대한 독서량이 다시 한번 부럽네요^^;;

moonnight 2015-08-15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곡을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시는 페이퍼예요^^ 오래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하니 이 기회에 다시 도전해봐야겠네요^^

blanca 2015-08-15 09:25   좋아요 0 | URL
달밤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대단해요. 저도 언젠가는 읽을 거라 다짐만 해봅니다. 많은 사람들한테 회자되고 인용되는 고전은 그 만한 무게와 가치가 있더라고요.

희선 2015-08-22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는 어떤 책이든 오래 보는 듯합니다 제가 이 책을 본 건 아니고 다른 분이 쓴 걸 보니 그렇더군요 하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을 때까지 보는 거겠네요 쓰는 것뿐 아니라 읽는 것도 마음을 다하다니, 어려운 일인데... 저도 《신곡》 사두기만 하고 안 봤네요 언젠가 볼 날이 올지... 오에 겐자부로만큼은 못 보더라도 한번이라도 보면 좋을 것 같네요


희선

blanca 2015-08-22 08:43   좋아요 0 | URL
아, 희선님에게는 <신곡> 있군요. 곁에 두고 언젠가를 기약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듯해요. 오에 겐자부로가 작가로서도 훌륭하겠지만(저는 그의 책을 한 권만 읽어서요) 읽는 독자로서의 태도가 아주 성실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