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보며 나는 할머니는 할머니로 태어난 줄 알았다. 보드라운 주름의 결들, 굽은 허리에서 한때는 홍조를 띠었을 어린 소녀, 젊은 새댁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여든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집에서 몸소 치룬 손님들은 돌아가며 "이제는 돌아가실 때도 됐는데..."라는 말로 어린 나를 울렸다. 그게 어떤 의미든 할머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느낌에 가슴이 저릿했다. 시간이 흐르고 죽음이 다가오며 할머니는 치매를 앓으셨다. 이제 걸걸하게 자신을 주장하던 할머니는 까마득한 옛날 돈을 빌려간 사람에게 돈을 받으러 가신다고 아파트 복도를 배회하셨다. 때로는 당신에게 보물 같았던 외아들을 못 알아보셨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할머니의 할머니다운 할머니스러운 존재는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가버린 듯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며 배웅하지 못하고 때로는 지겨워하고 진저리내며 할머니와 석별하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마도 이러했던 나의 과오에 끄달릴 것이다.
아직 영화관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없다. 대신 더듬더듬 책을 읽었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교수, 다복한 가정, 무심한 듯하지만 평생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동반자이자 같은 직종에서 협업을 했던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앨리스에게는 알츠하이머가 온다. 그녀가 이루었던 모든 학문적 성과, 가르쳤던 학생들, 사회적 관계망 들은 자신마저 점차 망각하게 되는 이 잔인한 병마 앞에서 쓸려나간다. 우리는 치매 환자를 돌보거나 치료하는 입장에서만 그들을 이야기했었지만 여기에서는 앨리스 본인이 치매에 잠식되어 나가는 시선을 볼 수 있다. 아기를 기다렸던 첫째 딸과 연기를 했던 둘째 딸은 어느 순간 낯선 아기 엄마와 연기자로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녀가 사랑했던 '읽기'와 '쓰기'도 맥락을 잃는다. 사랑했던 가족의 알츠하이머 투병은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이 자신들의 삶의 진로를 때로 틀고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희생을 요구한다. 이를 둘러싼 다양한 반응, 다툼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부러웠던 것은 비교적 여기에 비해 앨리스를 둘러 싼 환경은 치매 환자와 그들을 돌보는 가족들을 위한 사회적 지지망이 두터워 그들이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앨리스가 느끼는 소외감, 격리의 느낌의 깊이에 대한 묘사는 그렇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치매 환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지에 대한 반증 같아 씁쓸했다.
'존재','나'라는 느낌은 때로 '죽음'과 '늙음' 앞에서 무색하다. 노인의 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때로 경청되지 않는다. '삶'은 흔히 '젊음'과 혼동된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서른 살의 회계사를 빌려 스스로를 기술한다. 그러나 이미 서른의 그는 충분히 늙어버렸다. 그를 스쳐가는 풍경, 사물, 사람은 그를 관통하여 그의 일부가 된다. 사무실의 배달원의 떠낢도 그에게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는 떠나가며 그의 조각을 남긴다. 그는 이미 죽을 것을 명징하게 인식한다. 모든 것이 떠날 것이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심지어 그 자신도 무로 화할 것을 항상 의식하며 스스로를 관통하며 지나가는 풍경을 하나 하나 언어로 주워 담는다. 마치 페르난두 페소아의 일기집 같은 이 책은 어떤 체계나 서사 없이도 스스럼 없이 읽힌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이 그의 입을 빌려 나올 때 이 꿉꿉한 더위는 탄산수가 넘어간 후 느끼는 청량감에 물러난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구체화하는 길에 그의 고백이 지나간다.
영국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 간호사 출신으로 수많은 노인들을 지척에서 돌보았던 여자가 칠십 대에 스위스로 가 안락사를 택했다. 그녀는 중병을 앓았던 것도 존재의 스러짐을 가족이 아프게 목격해야 하는 치매를 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늙었다. 그녀가 목격한 수많은 '늙음'은 암울하고 슬펐다. 이제 그녀는 존재하기를 멈추기를 택했다. 죽음에 먹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안락사가 그것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을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쨋든 그녀는 스스로 '무'로 걸어들어갔다.
어느 날 사물에 대한 인식이 끝나면, 심연의 문이 열릴 것이고, 우리가 가진 과거의 모든 것들-별과 영혼의 파편에 불과한 것들-은 집 밖으로 털려날 것이다.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이 다시 시작하도록 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중
나는 아직도 삶에 애착이 많은가 보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명제와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합시키면 눈물이 난다. 할머니는 떠나시며 당신의 조각을 나에게 부려 놓았나 보다. 아니 나 이전에 떠난 그 익명의 혹은 이명의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삶과 존재가 조각 조각 다 스며 있나 보다. 그러니 기억하고 돌이켜 보고 그리고 또 거기로 걸어들어가나 보다.
'존재' 자체가 하나의 '환상'임을 나도 그처럼 제대로 인식하고 싶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