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은 그야말로 괴짜 아이였습니다. 단추로 셔츠에 부착한 파란색 리넨 반바지를 입었고, 머리카락은 눈같이 하얘서 마치 오리털을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듯했습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키는 내가 더 컸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푸른 눈이 연해졌다 짙어졌다 했습니다.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중
앨라배마 주, 남매, 친척 집을 떠도는 이웃 아이 딜, 멀구슬 나무. 하퍼 리와 트루먼 커포티의 유년은 겹친다.<앵무새 죽이기>에서의 활달하고 당돌한 소녀 스카웃과 푸른 눈의 공상가 딜에는 실제 이웃해 살았고 청년기까지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심지어 트루먼 커포티의 작품 취재에도 동행했을 만큼 가까웠던 둘의 관계가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조금은 찌질하게 그려지는 이웃집 소년 딜의 모습에서 실제 트루먼 커포티는 자신을 발견하고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하퍼 리가 묘사해 낸 아름다운 유년의 순간들은 트루먼 커포티의 <풀잎하프>에서도 변주된다.
그가 묘사했듯 "어떠한 영광도 누리지 않았지만 아름답던 시절", 나무 위에 지어진 아이들의 오두막에는 실제 하퍼 리도 초대되었었다. 공교롭게도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에서 변호사 아버지에게서 배운 공감 능력이 발휘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트루먼 커포티의 나무 위 오두막집에서도 나란히 수용된다. 아이들의 유년을 지배한 것은 '사랑'과 '교감'이었다. 스카웃의 오빠가 억울하게 강간죄로 기소된 흑인이 배심원들에게서 유죄를 받자 울음을 터뜨린 것은 남매의 아버지가 진정한 공감은 그 사람의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했던 이야기가 오롯이 실현된 셈이었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때로 그러한 가르침을 체득하는 듯하면서 어느새 그것을 상쇄시킬 만큼의 경계와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며 유년을 떠나 보낸다. 우리에게 간식을 나누어 주었던 이웃 아주머니들도 함께 온갖 놀이와 공상과 투쟁을 나누었던 친구들도 평생을 절실하게 영원히 매달려 있을 것 같았던 그 수많은 아름다운 가치와 이상들도 시간의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가라앉으며 삶을 그려 나간다. 잃어버린 것들과 잊혀진 것들의 흔적이 무의미하다면 가장 절절하게 살았던 것 같았던 시간들은 너무나 허무하게 딜리트 키 앞에서 스러진다. 과연 그런 걸까.
일단 변하면 제자리로 도로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 세상은 우리를 알았다. 우리는 절대로 다시 따뜻해지지 않을 것이다.- 트루먼 커포티 <풀잎 하프> 중
그러자 문득 이 늙어가는 몸뚱이 속에 아직도 그 깡마르고 상처 딱지 투성이였던 소년이 숨어 있는 것이 거의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때의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 스티븐 킹 <스탠 바이 미>
그러니까 말이다. 분명 "그 조그맣고 깡마르고 상처 딱지 투성이였던 아이"가 아직도 분명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어 무언가를 건드리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종종 출몰하고는 한단 얘기다. 스티븐 킹도 하퍼 리도 트루먼 커포티도 그러한 내면의 어린 아이들을 망각하지 않았기에 <앵무새 죽이기>도 <풀잎 하프>도 <스탠 바이 미>도 우리를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직 크지 않은 아이, 결점도 미성숙도 열등감도 절대 극복할 수 없이 날것으로 다 경험하고 아파해야 했던 그 유년은 그 해 여름 밤, 가을 낮, 겨울 아침에 분명 타박 타박 걷고 있던 곱슬 머리 여자애와 함께 어딘가에 고스란히 살아 있을 것같다. 커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눈물 또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