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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어떤 세계는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아니,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실제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나가는 사람의 고통, 회한, 보람, 슬픔은 영영 그 깊이와 무게를 실감할 수 없다.
여기 마산의 한 청년 용접 노동자가 있다. 또래가 교실에서 수능 공부를 할 때 실습실에서 기판을 납땜하는 연기 때문에 두통을 앓고 이미 졸업 이후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아이는 대학교 교정이 아닌 공장에서 방진복을 입은 첫사랑을 만난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를 다시 대학으로 돌려보낸 이도 누나 같은 이 친구다.
우리가 상정하는 대다수의 스물 언저리의 청년이 보내는 대학 교정에서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자의 공허한 언어가 아닌 당사자의 목소리로 듣는 일은 놀랍고 순간순간 미안해지는 일이다. 정말 이 정도였어? 산재를 당하고도 산재 신고도 하지 못하고 폭염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쐬는 에어콘 바람도 사치였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무지가 때로는 죄악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한다.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의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려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러나 어둡고 처절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짬마다 나타나는 인생의 멘토 같은 아저씨들,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건강한 사랑, 기대하지 않았던 타인들의 따뜻한 배려. 천현우 저자가 그려내는 이 신산한 삶의 풍경이 역설적으로 가지는 온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하는 의미들은 곳곳에 뿌려져 있고 저자의 입담은 그 의미를 한층 더 심오하고 빛나게 만든다.
한 달 정도 지나 마침내 완공한 징검다리를 보게 되었다. 떡갈나무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우리의 창조물에 올라섰다. 행여 볼트 하나 빠졌을까, 용접에 균열이라도 있을까 세심하게 살폈다. 아직 물이 차오르지 않은 널찍한 호숫가를 가로지르는 동안, 보람으로 가득찬 심장에서부터 사방으로 짜릿한 느낌이 퍼져나갔다.
-천현우 <쇳밥일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의 안전망 사각 지대에서 떨었던 청년이 만든 다리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우리는 단지 그 다리를 건너면 그뿐이었다. 익명의 노동자들이 그 다리를 만들며 용접을 해서 철 사이를 메꾸며 어떤 것을 두려워했고 어떤 것을 꿈꿨는지 그들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꿈조차 사회가 강요한 계층 사다리 안에서 꿀 수밖에 없었던 그 현실에 대한 이야기. 단지 화내고 푸념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커피를 마시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소설을 쓰고 운동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며 하루하루 더 나아갔던 이야기.
저자는 이 청춘의 노동 일지가 사적인 경험 토로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답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사소한 것도 아니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내 임금이 내가 열심히 오래 일할수록 차곡차곡 오르고 어제의 불운이 결정된 미래를 몰고 오지 않는다는 믿음만 있다면 한번 해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죽이지 않는 사회. 저자의 마흔 살에는 그런 내일이 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