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의 소설은 다 읽기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다. 문체는 간결하고 알기쉽고 인물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곁에서 살아 숨쉬는 것같다.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 <달과 6펜스>, 마치 서머싯 몸 자신이 보고 듣고 개입한 것처럼 한 청년의 구도의 여정을 지척에서 그린 <면도날>, 그리고 자서전은 아니지만 그 안의 정서는 모두 자신의 것이라 고백한 자전적인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아홉 살 절름발이 소년이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잃고 사제인 큰 아버지에게 맡겨져 엄격한 기숙학교에서, 독일, 런던, 파리, 다시 런던에서 사제, 화가, 회계사, 의사의 진로를 두고 방황하며 서른 가까이까지 친구, 은사, 멘토, 연인을 만나 사랑하고 우러르고 실망하고 헤어지고 웃고 울며 성장해 가는 궤적은 작가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지난 날과 닮아 있기도 하다. 주인공 필립이 이 여정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영생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상을 좇으면서 현실에 발목잡히기도 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물질적 향락에 기대기도 하는 모순과 불합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의 인간 군상이다. 특히 필립이 비열하고 얕은 여자 밀드레드에게 끊임없이 농락당하면서도 다시금 그녀를 받아주고 그녀에게 이용당해 주는 모습은 그 세계의 바깥에서 지켜보는 나의 눈에 마뜩찮아 보이고 한없이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그 상황과 그 나약함,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음에서 나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필립은 점차 자신의 삶에서 조금씩 물러나 그림을 감상하듯 삶의 정경을 이해하고 알아차리려 한다. 과연 이 굴레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분명히 머리와 관념과 이성이 있는데 인간의 선택은 또다시 상황에 내몰려 어리석음으로 치닫는 이유는 뭘까. 아니, 이렇게 태어나 고생하고 죽는 삶이라는 게 과연 가지는 의미와 의의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술주정뱅이 시인 크론쇼가 선물한 페르시아 양탄자의 그 정교한 무늬들이 과연 의미하는 삶에 대한 대답은 무엇일까. 서머싯 몸은 섣불리 이 대답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는 답없음, 아니 답이 불가능한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법에 대한 길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필립은 자신을 이용하고 농락하는 밀드레드가 또다시 거리의 여자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의 병을 치료해 주고 그녀를 받아준다. 한때의 어리석은 사랑도 그녀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상황 속에서 그녀가 무기력하게 신산한 삶의 노예가 되었음을 연민으로 이해하고 용서한다. 분만 왕진을 하며 만나게 된 하류층 사람들의 출산을 도우며 그들의 사랑, 고난, 죽음을 목격하며 그는 그야말로 하나 하나 밀려오는 삶의 경험과 체험을 절절하게 겪고 받아들이고 느낀다. 이제 그는 섣불리 삶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고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해 간다.

 

홉농장에서 한때 자신이 일하던 병원의 환자였던 유쾌한 허풍쟁이 애설니의 딸 샐리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많은 말이 필요없는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다. 서머싯 몸이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대답은 바로 이런 것. 필립은 실패한 저열한사랑들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건강하고 어린 풀의 싱싱한 내음이 나는 아리따운 아가씨와 생울타리 밑에서 입을 맞춘다.

 

이야기의 중간에 나오는 어느 동방의 왕이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어 현자에게 오백 권의 책을 요약해 오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다 마침내 한 문장으로 받은 내용은 이러하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이 단순 명료한 이야기가 가장 완전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비극이기도 하고 희극이기도 하고 하나의 형형한 실재이기도 하다. 잘 모르겠다. 필립이 그렇게나 꿈꾸었던 스페인 여행의 꿈을 접고 샐리의 남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 정말 가장 간명한 삶에 대한 태도의 전범인 지는. 서머싯 몸은 나의 나이 언저리에서 필립을 만들었고 훌쩍 더 나이들어 인간과 삶에 더 큰 의미와 의의를 부여하는 현장에서 <면도날>의 래리를 창조해 냈다. 그저 삶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라는 허무한 결론에서 어쩌면 인간이 지각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더 큰 차원에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는 죽음으로 더 한 발짝 전진했을 때의 작가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의 몸짓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작품도 작가와 더불어 변전하고 늙고 성숙한다. 그 흔적을 찾아 보는 것도 또다른 읽기의 즐거움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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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5-02-0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2014년의 발견이었어요. 인생의 베일도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면도날을 읽으며 감동이 철철...더 많은 글을 남겨주지 않은 것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에요 ㅠㅠ

blanca 2015-02-09 19:2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면도날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어젯밤에 서머싯 몸 소설 검색해 보니 번역 안 된 게 많더라고요.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쉬운 대로 <과자와 맥주> 빨리 읽어보고 싶어요.

moonnight 2015-02-0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 달과6펜스를 접했을 때 마음을 홀딱 뺏겼었지요. 감히 내 인생의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부끄럽게도ㅠㅠ 서머싯 몸의 작품을 읽은 게 별로 없네요. blanca님 덕분에 올해 새로운 독서계획을 세워봅니다. ^^

blanca 2015-02-09 21:01   좋아요 0 | URL
달밤님, 저도 달과 6펜스를 제일 좋아했어요. 그런데 혹시 면도날 안 읽어보셨다면 꼭 읽어보세요. 흑, 정말 너무 좋더라고요. 강력 추천드려요.

moonnight 2015-02-09 21:30   좋아요 0 | URL
네 면도날 꼭 읽어볼거에요. 불끈ㅠㅠ; 심지어 소장`은` 하고 있다는ㅠㅠ;;;;;

라로 2015-02-10 03:52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ㅎㅎㅎ 달밤님!!!!!ㅋㅎㅎㅎㅎㅎ넘 재밌으셔~~~~ㅎㅎㅎㅎ
저도 면도날은 꼭 읽어볼게요!! 저 달과 6펜스 최근에 읽었는데 넘 좋았어요. 면도날 기대됩니다!!!저도 올 해는 몸의 작품을 다 찾아 읽으려구요~~~ㅋ

붉은돼지 2015-02-09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도날은 아직 이지만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에서는 분명 읽었는데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ㅜㅜ
제가 읽은 건 다 어디로 가셨는지...

blanca 2015-02-09 21: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ㅋㅋ 이제는 제 자신을 못 믿을 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

cyrus 2015-02-09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의 작품을 거의 읽으셨으면 <어센덴>이라는 소설을 권합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스파이 소설로 알고 있어요. 단편집인데 블랑카님의 취향에 어울릴지 모르겠어요. ^^

blanca 2015-02-09 23:10   좋아요 0 | URL
의외로 서머싯 몸이 단편을 많이 썼던데 저는 한 편도 제대로 못 읽어 봤어요. 기회가 되면 찾아 볼게요^^

[그장소] 2015-02-10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도날 대기중..ㅎㅎ

blanca 2015-02-10 13:14   좋아요 0 | URL
와, 첫만남이 부럽습니다.

Alicia 2015-02-1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문장, 사람의 내면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통찰력,.. 저는 서른이 다 되어서 달과 6펜스를 읽었는데 읽어도 읽어도 좋더라구요. ^-^

blanca 2015-02-11 11:26   좋아요 0 | URL
알리샤님, 인터넷에 찾아보니 몸이 여성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한 작가라는 평도 있더라고요. 저도 <달과 6펜스>를 최근에 다시 읽었어요. 어렸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었어요.

마녀고양이 2015-02-12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서머셋 몸에 대한 글을 보니 너무 반가와요.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제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책들을 사놓고.... 그저 쟁여놓았다눈... 아하하.
그래도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를 좋아하는 친구 입에서 들을 수 있을 때는 행복하네요.

blanca 2015-02-13 15:12   좋아요 1 | URL
좋아하는 작가가 겹치는 일만큼 이 알라딘 서재에서 반가운 일이 또 있을가요? ^^ 번역안된 작품에 많은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

페크pek0501 2015-02-16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모두 제가 읽은 책이라니...
아, 모두 제가 쓴 글에 인용한 적이 있는 책이라니...
서머싯 몸의 작품은 다 읽기로 했거든요.

몸의 광팬으로서 님의 페이퍼가 무척 반가웠다는 것을
늦게나마 밝힙니다. ^^ 반가운 글이에요. ^^

blanca 2015-02-16 15:00   좋아요 0 | URL
페크님, 저 요새 몸앓이 중이에요. 정말 <인간의 굴레> 다 읽고 무언가로 한 대 엊어맞은 느낌. 막 눈물 나려 하고... 그래서 막 다 찾아 봤는데 우리나라에 번역 안 된 작품이 왜이리 많을까요? 짧은 자서전도 있고. 아마존에서 몇 번이나 주문하려다 역시 나는 무리다, 하며 포기했는데. 지금도 어떻게 할까 고민중이랍니다. 너무 읽고 싶은데 원서를 제대로 소화하긴 힘들 것 같고 해서요.

앤의다락방 2015-02-17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의 책은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아... 또 읽고싶은 책이 늘었네요 ㅋㅋ 북플하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들 책을 많이 소개받(는 느낌이랄까요..)게 되니 북플하는 재미 또한 쏠쏠합니다^ ^

blanca 2015-02-17 16:30   좋아요 0 | URL
앤의다락방님! 축하드립니다. 아직 읽으시지 않으셨다면 앞으로 읽으면서 가지게 될 기쁨이나 설레임이
얼마나 클까요. <면도날>부터 시작하셔도 괜찮고 <달과 6펜스>도 재미있어요. 무엇보다 몸의 소설들은
아주 재미있어요. 어서 서머싯 몸의 세계로 들어오세요.^^

transient-guest 2015-02-21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문학책은 무슨무슨 문학전집 세트 또는 단권으로 나오던 시절에 `달과 6펜스`를 사서 읽었어요. 중학교 때였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그 뒤로도 다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네요. 그저 `달과 6펜스`라는 제목에서, 그리고 그런 책을 읽는 저 자신이 뿌듯했던 것이 생각나요.ㅎㅎ 조만간에 다시 꺼내 읽어봐야겠네요.

blanca 2015-02-21 14:55   좋아요 0 | URL
저는 아마 고등학교 때 여동생과 함께 읽었을 거예요. 정말 너무 큰 감동을 받아서 `스트릭랜드`라는 주인공의 성도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최근에 다시 읽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안 와서 의아했어요. 서머싯 몸을 좋아하지만 <달과 6펜스>가 그의 베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