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서울대,철학의 빈곤-진중권
대졸 대통령’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자신을 ‘엘리트주의자’라 불렀을 때, ‘피식’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학벌 사회에서 ‘엘리트’의 유일한 기준이란 결국 출신대학인 바, 학벌에 근거해 자신을 ‘엘리트’라고 착각하는 그 사람들은 정작 전대변인이 나온 대학을 유감스럽게도 자기들의 반열에 끼워주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신분제로 전락한 엘리트주의그러는 ‘SKY’는 그럼 ‘엘리트’ 대학인가? 이 세 대학의 신입생 수가 1만5천명, 인구가 우리의 다섯 배에 달하는 미국 10개 명문 대학의 입학생 수와 맞먹는다. 인구 수와 대학 수를 감안하여 환산하면, 우리나라 ‘엘리트’의 양적 규모는 열다섯 배나 부풀려 있고, 질적 함량은 1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도 ‘엘리트’ 의식만은 드높아 하늘(SKY)을 찌른다.
그 자부심이 얼마나 제대로 된 것일까? 진정한 엘리트는 자신의 재능을 사회를 위해 써야 하며, 제 재능을 남을 깔보는 데에 쓰는 게 천박하다는 걸 알 정도의 의식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싸가지’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엘리트주의’는 현대 시민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는 조선 말기의 신분제나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가깝다.
정운찬 총장의 취임 이후 서울대가 나서서 정부와 대립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일류 밝히는 서울대의 세계대학 서열이 ‘더 타임스’에 따르면 118위, 상하이 교통대학의 발표에 따르면 200위. 이때만 해도 서울대에서는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으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서 실시한 국내대학 평가에서 서울대는 10위권 안팎에 머무는 저조한 성적을 냈다.
그러자 조선일보에서 서울대를 대신하여 발끈했다. ‘졸업자의 평균 초봉, 학생들의 입학성적 등 질적인 지표’가 빠졌다는 것이다. 그게 왜 ‘질적 지표’인지 모르겠다. 졸업생들의 높은 초봉은 사실 서울대라는 허울 좋은 ‘간판’ 값이고, 신입생들의 높은 입시성적은 결국 서울대의 업적이 아니라 고등학교와 입시학원의 공이 아닌가?
대학평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입학 전(前)의 성적과 졸업 후(後)의 초봉에서 찾으면, 가장 중요한 중간이 뭉텅 잘려나간다. 입학성적 좋은 학생들을 유치하여 학교 간판의 광을 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작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데에는 대학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대교협의 대학평가는 이른바 명문대들이 가진 그 허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인재 ‘선발’보다 ‘양성’이 중요대학들은 저마다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려 하나, 어차피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이리 뽑으나 저리 뽑으나 배분과 분포만 달라질 뿐, 어차피 ‘우수한 학생’의 사회적 총량에는 아무 변함도 없다.
그런데도 거기에 목숨 거는 게 이 사회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얼마나 효과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인재를 ‘뽑는’게 아니라 인재를 ‘만드는’ 것일 터. 우리 대학들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철학의 총체적 부재로 보인다.
한나라당 전대변인이 나온 대학은 이제까지의 통념에 따르면 ‘엘리트’에 속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대교협 평가 신문방송학 부문에서 그가 나온 대학은 하늘(SKY)을 뚫고 1위를 차지했다.
명문대 여부는 치사하게 학생들의 입학 전 성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입학 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실력으로 가려야 한다. 전대변인은 몰라도 그의 후배들은 이제 ‘훌륭한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진중권/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