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가난한 일상의 스산한 풍경들

 

첫 번째 단편인 <야행 夜行>을 보다가 팡 터졌다.

"뭘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고요. 이런 저런 일로 내가 하도 우울해서요, 위로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 싶었을 뿐이었는데요. 저 동생 하는 말이요, 자기한테 계속 그런 얘기를 하려면 다시는 전화를 하지 말라는 거였고요......"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라는데 그 위로를 매일 해줘야 했던 상대는 당연히 지겹고 괴로웠을거다.

모진 맘을 먹고 따지러 가는 일가족의 출발부터, 그 가족을 맞은 다른 가족의 떨뜨름함과 그런 어른들의 갈등에는 별 관심이 없고 불편하기만 한 아이들의 어색함까지, 정말 어딘가에서 본듯한 일상의 한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삶이란건 생각보다 구질구질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그 구질구질함이 연속되면 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이고, 그 하소연을 매일 들어줘야 하는 사람은 고역인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삶의 한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단편은 너무 슬픈데 또 너무 리얼하고 절묘해서 순간적으로 팡 터져 웃고 말았다. 내게 황정은 작가가 항상 옳은건 이런 절묘함이다. 그 밤 방에 모인 모두의 마음이, 누구도 나쁘지 않은, 그러나 누구도 절대적으로 착하고 아름답지도 않은 그런 일상의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마음을 아리게 한다.

삶에 위로가 필요하다는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의 말이 한편으로 다 쓸데없는 말이 되는건 이런 순간이다.

이들은 그 위로를 구할 여유조차도 없기에 안그래도 팍팍한 삶에 나부터 위로 받아야 하는데 누구를 위로한단 말인가?

진짜 가난은 이렇게 팍팍하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는 길, 난 뜬금없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막막함과 팍팍함이 그저 정지된 한 장면인듯 펼쳐지는게 비슷하다고 느꼈던걸까?

 

이런 일상의 반복과 구차함과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다른 단편인 <양산 펴기>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하루 아르바이트로 바자회에서 양산을 팔면서 펼쳐지는 풍경은 이 도시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특별한 사건도 사고도 없지만 나의 팍팍한 삶을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해주는 온갖 장면들.

딱히 인물들의 감정을 구구절절하게 말하지 않아도 정치인을 대동한 기자가 바자회에 자원봉사 나왔냐고 하는 질문에 "그냥 알바예요"라는 대답에 하루동안 이들이 느꼈을 그 온갖 신산한 감정들이 묻어나온다.

 

2. 잊혀진다는 것은......

 

<대니 드 비토>와 <낙하하다>가 얘기하는건 잊혀짐이다.

이 두 단편은 다른 이야기이면서 같은 고통을 얘기하고 살짝 교차하기도 한다.

<대니 드 비토>가 잊혀짐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봄으러써 작아지고 작아지는 자신을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보고있는 지옥이라면, <낙하하다>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끊임없이 낙하하는인물이 등장한다. 낙하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기억을 하나씩 둘씩 버리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한개의 문장에만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너무 외로워서 차라리 무엇인가와의 충돌조차도 바라게 되는 지옥이다.

 

정말로 사람이 죽는 순간은 잊혀지는 순간이라는 말이 순간 떠올랐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잊지 말자는 말을 하고 살아간다.

내가 결심한 잊지 말아야지만으로도 탑 몇개는 거뜬히 쌓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잊지 않았나?

<대니 드 비토>의 유도씨가 마지막 남긴 이름이 유라인지 미라인지 알 수 없다고, 설사 유라였다고 하더라도 유도씨의 삶에서 유라가 잊혀진 것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잊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게다.

그저 이름을 기억한다는 정도가 끝없는 낙하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게 아닐거다.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을 위해 무언가 보살핌을 베풀고 잊지 않고 있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일거라도 이 소설들은 역설적으로 얘기하는게 아닐까?

사소하게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제사일수도 있고, 다르게는 아직도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고통스러울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고 진실규명을 위해 무언가 손을 보태는 것도 기억의 힘일 수 있겠다.

잊혀짐을 보여줌으로써 기억의 힘을 말하고자 하는 게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뼈도둑>의 사내는 눈속에 파묻히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지 않을까?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래서 죽은 연인의 뼈하나 조차도 허락받지 못했던 그 마음을 누군가는 기억해주고 인정해줬으면 하던 마지막 저항이 아니었을까?

기억은 이토록 필사적인 무엇이다.

 

3. 그럼에도 삶은 배려와 기억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옹기전>에서 항아리 하나를 주운 소년은 항아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를 나침반 삼아 항아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것을 데려간다. 그 곳이 비록 모든 흔적이 사라진 곳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그래도 남은 항아리들이 있다. 함께 터질 수 있는 독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마음은 단편 <디디의 우산>에서 "어쨌든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라고 디디의 읊조림에 모두 담겨있다.

그 우산은 비를 피하는 우산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기억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다. 짧게 끊어치는 문장들이 더 그런 우울함을 배가시킨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고 난 마음이 우울하지만은 않은 것은, 그 짧게 끊어치는 문장들 사이 사이 들어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려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21-01-29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우상보다는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우산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

바람돌이 2021-01-30 00:36   좋아요 0 | URL
비맞지 않게 배려하는 우산같은 사람 쉽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내 욕심을 없애면 내 옆의 몇명의 사람을 배려하는거 그렇게 어렵지 않을까요? 저도 늘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그중에서도 가장 치욕스허운 것은 희망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기만적으로 파고들어 교황하게 위장하고 있다가 이내 모습을 드러낸 희망, 일주일만 있으면 그것은 밖으로 나와 천국의 문에서 지저귀고 쌕쌕거리고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심지어 지금도 그것은 바지런을 떨며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사이먼이 그녀의 집 진입로로 들어서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문 앞에서양손을 모으고 서서, 빌고 놀리고 사과하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메멘토 모리.
- P304

정말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아이스크림 접시처럼 두껍고 평범하게 제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달아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실망, 상실, 파경만이 아니며 그와 정반대되는 것. 즉 사랑의 축복과 충격, 그 눈부신 변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안전하다 해도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결국엔 뭔가를, 자신만의 균형추이건 진실성의 작고 메마른 알맹이이건,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 P308

그녀는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는 소년들은 아무리 무능해 보여도 결국은 남자가 될 것이며, 자신들이 갖춘 것보다 훨씬 큰 재능과 권위가 필요할 것 같은 일들을 하도록 허가받을 거라는 사실을.
- P3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헨쇼 박사는가난을 그저 불우함이나 결핍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가난은 그런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흉한 막대기 모양 전등을 사용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도 때도 없이 돈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새로 산 물건을 놓고 악담을 하며 그것을 공짜로 얻은 건지 아닌지 입씨름하는 것을 의미했다. 플로가 정면 창문에 사서 단 비닐 커튼이나가짜 레이스 따위를 두고 자부심과 질투가 난무하는 것을 의미했다.
- P131

패트릭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선함과 순박함을알아보는 일이라면, 클리퍼드를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로즈는클리퍼드가 선한 사람이라고 믿을 필요가 없었고, 그가 순박하지 않다.
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중성이나 비정함을 보이더라도 그게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면 그녀는 크게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속임수를, 반짝거리는 비밀을, 소중히 기념하는 정염을, 활활 타오르는 불륜을 원했다. 그저 빗속에서 오 분을 함께했을 뿐인데.
- P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쓰지는 않고 읽기만 해서 쌓인 책들

올해부터는 정말 읽는 족족 리뷰를 쓰든 페이퍼를 쓰든 독서기록을 남기리라 다짐했건만

예상치 않은 엄마의 병간호는 읽은 책만 쌓이게 만들었다.

뭐 이럴 때는 살짝 페이퍼로 퉁치고 넘어가도 될거야!!

사람이 어떻게 결심한대로 계획한대로 살수 있겠어라고 마음편히 눙치고있다.

그래도 <파씨의 입문>은 리뷰를 꼭 써야지 하면서 살짝 빼놓고 남은 책들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한 때 알라딘마을에서 선풍적인 화제와 인기를 뿌렸던 책인데 이제야 읽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5만개가 넘는 유전자 중에 단 한개가 삐끗해도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무너질 수 있는지, 또 그 변화의 방향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기괴해 보일 수 있는지 상상도 못해봤던 사례들을 보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몸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한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삐끗한 삶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그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여전히 유지하고자 하며, 유지할 수 있음을 또한 같이 얘기함으써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는데 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영화가 더 유명한데 난 영화를 안봐서 그저 평범한 우편배달부와 네루다의 우정정도로 예상하고 봤다.

사실 책이 얇아서 병원에 들고가기 딱 좋았던 것도 있고.....

대단히 웃기고, 겁나게 섹시하고, 그리고 너무 암담하고 슬픈 결말까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책이라고 표현하면 될까?

감정의 파고가 너무 극단과 극단을 오가는 바람에 홀린듯 읽었다.

이슬라 네그라라는 시골구석으로 이사온 위대한 시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된 마리오(왜냐하면 이 마을에는 아무도 글을 못읽기 때문에 편지가 오는 사람이라고는 네루다 한 명 뿐이다.)

이 위대한 시인에게 어떻게든 인정받아 보려는 그래서 시인이 되고싶은 마리오의 모습이 어찌나 실감나던지...

또한 네루다를 뚜쟁이로 만들어 아름다운 소녀와의 결혼 과정에서 표현되는 시골마을의 사람들의 모습은 어찌나 생생하던지 내가 바로 이 마을 이슬라 네그라에 가 있는듯하다.

아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가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스의 엄마인데 마리오같은 허황되고 게으르고 미래가 암담해보이는 사내와 딸의 결혼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그녀의 욕들은 그대로 시가 된다.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 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범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P67

욕이 시가 되는 경지라니, 어쩌면 네루다를 뛰어넘는 시인은 그녀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며 웃는다.

하지만 알다시피 칠레의 현대사는 이 소설을 이렇게 유쾌한 시골의 일상으로 가만두지 않는다.

일상의 평화가 거대한 폭력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순간을 읽는 것은 참담하다.

아옌데가 대통령궁에서 피노체트에 의해 살해당한 순간 이 시골마을에도 참담한 침묵과 죽음의 순간이 닥친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라고 절규했다는 네루다, 그리고 결국 어느날 찾아온 자동차에 탄 이후 사라져버린 마리오, 그리고 남은 사람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싶지 않은, 이게 아니라고 이 마을의 그 평화로움과 사람들의 웃음을 찾아달라고 뒷이야기가 더 없냐고 작가에게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5권 유윤중 <푸치니 - 토스카나의 새벽을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제왕>

음... 음악을 글로 배우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다.

그 어리석은 방법을 내가 하고 있구나....

일단 오페라에 큰 관심이 없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유튜브로 나오는 음악들을 틀어놓고 들어가면서 읽었으나 역시 별 감흥이 없다.

많이 들어본 몇 개의 곡만 음.....

푸치니라는 인물 자체도 딱히 이야기가 될만한 면을 못가진 것 같고....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에서 음악가들을 빼야 할까? 고민중.

 

 

 

 

 

 

 

 

 

 

 

 

 

 

 

박노자 <미아로 산다는 것>

한 때 박노자씨의 책들은 무조건 구매해서 읽었었다.

그의 독특한 이력 덕분에 한국사회를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신선했고, 그 시점에서 날카롭게 드러내는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가 좋았다.

다른 눈을 통해 나를 더 잘 인식하게 되는것, 이것이 박노자씨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오랫만에 읽은 이 책에서는 그런 날카로움을 보기는 어려웠다.

저자가 한국사회를 떠나 있는 상황이라서인지 일반론적인 문제제기 외에 특별히 예리한 비평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수정, 이다혜, 최세희, 조영주의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범죄 심리학자인 이수정씨가 이 방송을 시작하면서 했다는 말

"범죄 영화 장르를 엔터데인먼트로 소비하는 프로그램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그러나 범죄 영화에 숱하게 등장하지만 대부분 피해자로 소비되다 마는 여성이나 아이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프로그램이라면 의향이 있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이 말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올렸고,

중간에  나오는 "우리는 결국 연대하기 위해 이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이 책과 방송의 가장 중요한 결론이다.

생각과 다르게 영화는 정말 소재일 뿐이고,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범죄의 피해자들 - 많은 경우 여성 또는 아이들인-에 대한 보호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심한가를 얘기하고, 현실과 대책을 얘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주장 중에 하나인 의제강간연령(성관계 동의 가능연령, 이 연령 이하의 아동과의 성관계는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범죄이다)은 지난 해 n번방 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 13세 미만에서 16세 미만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나름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실제 사건과 현장의 모습에서는 아직까지도 충격적인 모습들이 많이 남아있어 우리 사회가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해결책들이 모두 마음에 맞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같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옥타비아 버틀러 <블러드 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의 책으로 세번째.

<킨>은 너무 좋았고, <쇼리>는 이게 뭔가 싶게 실망하고

이후 더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다 알라디너분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에 읽은 책인데, 조금 더 이 작가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표제작인 <블러드 차일드>에서는 지구에 생긴 다른 생명체 트가토이들에 의해서 남자 아이들이 번식용 수컷으로 선택되고, 끔찍한 고통을 통과하며 새로운 트가토이들을 출산한다는 설정. 기존의 남녀 관계를 비틀어보는 것과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관계도 비틀어봄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이다 또는 정상이다라고 하는 개념을 뒤집어 보게 하는 것이 신선하다.

이런 비틀어보기 또는 다른 각도에서 보기가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단편들마다 그 재능이 넘쳐난다.

표제작과 함께 인상적인 작품은 <특사>인데 지구에 침입한 우주인들, 그들을 증오하는 지구인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공존을 도모하는 통역을 담당한 인간들의 긴장감 넘치는 갈등의 장면이 인상적이다.

언뜻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의 모티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테드창이 이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언뜻했다.

 

 

 

 

 

 

 

 

 

 

 

 

 

 

박건호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세상에는 참 이상하고 훌륭한 사람이 많다.

이분도 그렇다. 대학 1학년 때 답사를 가서 우연히 빗살무늬토기 파편을 주운 것을 계기로 역사자료 수집을 시작했단다.

빗살무늬 토기 파편 하나 주웠다고 누구나 역사자료 수집을 하는건 아닐텐데 참 신기하다고나 할까?

30여년간 자료를 수집했다고 하니 아마 그 자료들이 한 더미를 이루었을 것이고, 그것들을 이리저리 얽으면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이 모은 자료이니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것들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별거 아니게 넘길 작은 자료들에서 역사 속 개인들을 부활시키고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솜씨가 유려하다.

구한말 실종자 조용익을 찾는 훈련 한장에서 당대의 의병운동을 얘기하고, 한 청년이 고향 집에 보낸 엽서에서 새로운 문물인 자동차가 등장하는 과정과 자동차 운전기사가 되기 위한 당시 젊은이들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씨의 사인 한장에서 그가 느꼈을 참담한 심정을 유추하는 것 등 역사의 작은 조각에서 찾아낸 개인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역사라는게 개개의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짐에도 어느새 만들어진 역사에는 개인들이 사라지고 인간의 삶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거대 서사와 이론만 남게 된다.

그 틈을 파고들어 역사속 사람의 냄새를 되살려 내는 이런 책들은 늘 언제나 반갑다.

 

 

 

 

 

 

 

 

 

 

 

 

 

 

대프니 듀 모리에 <나의 사촌 레이첼>

로맨스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에 별다른 애정이 없어 알라디너들이 대프니를 그렇게 외칠 때에도 쿨하게 지났건만....

이 책은 마지막 몇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는 솔직히 말해서 지루했다.

솔직히 세상 물정 모르고 지 잘난줄만 아는 젊은 귀족 필립이 생전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열병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꼴을 보는게 뭐 딱히 예쁘지도 않았고, 미스테리한 여주인공 레이첼은 그 인물이 필립의 시선속에서만 묘사되기에 인물의 구체성 자체가 실감이 안나고.....

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정말 마지막 3장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겐 경고가 필요하다. <절대 마지막을 미리 읽지 마시오>

이러면 뭔가 엄청난 반전이 있을 것 같은데 바로 그 반전이 없다는게 이 책의 최고의 반전이랄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책의 서장을 다시 읽고 내용들을 다시 찬찬히 되짚게 된다.

그리고 책 전체에 펼쳐진 필립의 시선이 아니라 레베카의 시선으로 그녀와 여러 사건들을 전부 재구성해보게 된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필립의 생각들은 얼마나 어이없고, 자의식 과잉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아니 필립의 생각이 아니라 18세기쯤 되어 보이는 당시의 남자들의 시선이라는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부당한가라는 반추를 저절로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이라고 특별히 달라지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쓰는 것 보다 읽는게 훨씬 좋다.

왜냐하면 읽는게 훨씬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왜 좋은지 왜 별로인지를 쓰다보면 나의 생각이 자란다는 느낌을 좀 더 많이 받게 된다.

그래서 쓰기 싫다가도 컴퓨터 자판 앞에 앉게 된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다 알지 못하고, 여전히 더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내 생활의 지침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래도 혼자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내가 쓴것을 공감해주고 읽어주고, 반론도 제기해주고 하는 이런 공간이 있어서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계속 이렇게 잡문이나 간단한 감상문이라도 계속 쓰고 있다.

그래서 알라디너 여러분들에게 늘 감사하다.

이 공간이 아니라면 난 단 한줄의 글도 쓰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에......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an22598 2021-01-27 05:1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마을이 없었으면 단 한줄도 쓰지 않았을 사람 여기 있습니다 ㅎ. 같은 책을 읽어도 다르게 읽는 것이 제일 재밌는 포인트이긴 한데, 남의 생각만 보는건 반칙인것 같아서 저도 써봐야겟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다른 재밌는 점들도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잘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1-01-28 23:01   좋아요 1 | URL
전 실제로 서재를 떠나있던 기간 동안은 정말 단 한줄도 안썼어요. ㅎㅎ 역시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책은 같이 읽는게 더 좋은것 같아요. 내가 몰랐던 책, 작가를 알게 되는 것도 진짜 기쁜 일이구요.

다락방 2021-01-27 07: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을 책으로도 읽었지만 그전에 방송으로 몇 번 듣기도 했었거든요. 한 청취자가 사연을 보냈더라고요. 직장내 강간을 당했는데 강간후 피해자가 사무실을 멀쩡하게 걸어나왔으므로 가해자가 무혐의 처리되었다고요. 너무 솏상하고 억울했는데 이 방송을 듣다가 이수정 교수님이 연대하기 위해 방송을 했다 말씀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방송을 듣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이수정 교수님도 사연 듣고 울먹이시더라고요. 이 글 읽으니 갑자기 그 때 생각이 나네요.이수정 교수님이 의제강간 연령에 대해 꾸준히 주장해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하고요.

<나의 사촌 레이첼> 읽으면서 저도 처음에는 왜 하필 필립의 시선일까에 대해 자꾸 생각했었거든요.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야 아, 이러려고 그랬구나 이러려고.. 싶으면서 천재적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저는 중간도 지루하지가 않았어요. 필립이란 젊은 청년이 뭐랄까 이기적이고 철없는 모습 그대로가 보이는게 재미있더라고요. 어휴, 어린놈..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재미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책은 결론이 압도적이죠!

또 많이 읽고 또 많이 써주세요, 바람돌이님. 올리버 색스 책은 저도 한 권 사뒀는데 뭔지도 모르겠고 읽지도 않았네요. ㅠㅠ

바람돌이 2021-01-28 23:05   좋아요 0 | URL
전 방송은 안들었는데 책 읽다가 같은 대목에서 울컥하더라구요. 이런 분들이 계셔 주시는 것이 감사하죠. 이수정박사님 같은 분들을 알게 될때마다 아 그래도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구나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나의 사촌 레이첼은 마지막을 읽기 전에는 아 이 작가의 책은 그냥 요거 하나로 끝내야겠구나 생각했는데.... 이제 레베카 읽어보려구요. 그러고보니 뮤지컬 레베카의 원작이 이 책이던데 우리집 둘째가 굉장히 좋아하는 뮤지컬이예요. 불쌍한 둘째는 지금 고3이라 좋아하는 책도 못읽는다죠. 불쌍한 놈.... ㅎㅎ

다락방 2021-01-29 09:00   좋아요 1 | URL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와 [나의 사촌 레이첼]중에 뭐가 더 좋은가에 대해서 독자들마다 의견이 갈리는데(당연하죠!!) 저는 나의 사촌 레이첼의 손을 들어주었거든요. 레이첼 읽기 전에는 레베카가 압권이었죠. 이것도 제가 극찬하는 리뷰를 언젠가 썼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런데 어떤 분들은 레베카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물론 당연하죠! 바람돌이님은 과연 레베카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레이첼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두구두구둥-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이 씐나라~~

바람돌이 2021-01-30 00:34   좋아요 0 | URL
레베카 읽고 나서 결론을 꼭 알려드리겠습니다. ^^

수이 2021-01-27 08: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범죄영화 프로파일 사놓기만 하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계속 미루고 있는데 조만간 펼쳐봐야겠어요. 저도 쓰기보다는 읽기가 더 좋아요. 알라딘 아니었다면 그냥 읽고 또 읽고 그러기만 할 텐데 흔적 남겨놓아야지 하고 어기영차 할 때도 종종. 어머님 건강 얼른 회복되시기 기도할게요. 힘내세요 바람돌이님. 아빠 간호할 때 넘 힘들었는데 케어의 중요성을 절절하게 깨닫기도 했어요. 아자!

바람돌이 2021-01-28 23:07   좋아요 0 | URL
범죄영화 프로파일은 한 챕터씩 천천히 읽어도 부담없겠더라구요. 딱히 어려운 내용이 없고 방송을 책으로 만들었으니 전체 내용도 술술 들어오는 편이라서요. 알라딘 서재가 없어도 책은 열심히 읽겠지만, 쓰는 건 역시 서재와 서재 지인분들 덕분이죠. ㅎㅎ 그리고 저희 어머니 건강도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mini74 2021-01-27 09: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저는 꼭 국민학교 시절 독서공책 쓰는 느낌으로 ㅎㅎ 북플친구님들 좋아요! 눌러주시면 꼭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하고 도장 찍어서 돌려주시는 기분 ㅎㅎ 그래서 주저리 주저리 글을 쓰나봐요. 바람돌이님! 참 잘하셨어요 *^^* 어머님께서도 얼릉 나으셔서 따신 햇빛 아래 즐거운 하루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울 어머님은 따신 햇빛 드는 쪽으로 옮겨 앉으시며 책도 읽으시고( 큰 활자본책들 좋아요 ~) 드라마도 보세요. 햇빛 따라 다니시는 것 보면 나이드신 울 어머니 꼭 작고 여린 할미꽃 같답니다 ㅎㅎ

바람돌이 2021-01-28 23:19   좋아요 1 | URL
아 예전엔 독서공책도 썼어죠. ㅎㅎ 쓰고나면 제 글씨체 때문에 속삭했었던 기억이 모락모락나네요. ㅎㅎ
몇명이라도 제 글에 공감해주고 얘기 건네주는 분이 계셔서 여기서 계속 글을 쓰는 것같아요. 이것도 일종의 마약이에요.
햇빛 따라 다니는 mini74님 어머님 모습이 떠오르네요. 참 고우실듯.... 저희 어머님도 지금은 기력을 제법 회복하셔서 햇빛따라 다니고 계세요. 참 다행인게 어머니가 오래된 옛집을 버리고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한게 2년쯤 되는데 훨씬 편하고 햇빛 잘 드는 집인거예요. 그 때 이사하길 잘했지 하고 내내 생각한답니다. ^^

scott 2021-01-27 1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마지막 문단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책이 눈에 들어지 않은날에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나의 나의 사촌 레이첼‘영화 강력 추천합니다 (이작가에 단편집도 훌륭해요)어머님 건강 빨리 쾌유하시길 바라며 바람돌이님도 건강 잘챙기시기 바랍니다.

바람돌이 2021-01-28 23:21   좋아요 0 | URL
전 왜 집에서 보는 영화는 안보고싶은지.... 텔레비전도 큰데 말이죠. ㅎㅎ 그래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보고싶네요. 이 영화 예전에 굉장히 유명했었는데.... scott님도 늘 건강하세요. 님의음악 얘기도 전 잘 모르지만 자주 읽고 싶어요. ^^

페크pek0501 2021-01-27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 팍팍 하고 응원 팍팍 합니다. 응원!!! 응원!!!
박노자 님의 글에 반해서 저도 사 둔 책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생각해 놓고 찾아 읽으려 합니다. 쌓인 책 중에서 찾느라고 얼마나 걸릴지... ㅋ
제가 모르는 책 세 권이 있어서 꼼꼼히 읽고 갑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페이퍼가 좋다니까요...^^

바람돌이 2021-01-28 23: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런 종류의 페이퍼는 역시 새로운 책을 찾는 재미죠. 저도 여러 지인분들의 글에서 새로운 책을 찾을 때마다 맘이 설렌답니다.

라로 2021-01-28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람돌이님하고 이 페이퍼로 보면 5권이나 겹쳐요!!! 대박!!! 제가 이렇게 많이 읽었나요??^^;;; 대프니 드 모리에 여사의 다른 책도 읽어보세요. 넘 좋아요. 그리고 말하면 입아프지만, 올리버 색스의 다른 책도 추천해요!!!
암튼, 이 글 읽고 반성해요. 저는 제 생각이 자라는 글을 쓰지 않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썼던 것을 반성합니다.
제 생각이 자라날 수 있는 글을 앞으로 쓰도록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람돌이 2021-01-28 23:27   좋아요 0 | URL
라로님과 저는 독서 취향이 비슷한걸로.... ㅎㅎ 대프니 드 모리에 책은 이 다음으로는 레베카 읽어보려구요. 올리버 색스의 책도 예전에 사놓은게 화성의 인류학자 있는데 당장은 아니고, 조금 여유를 두고 읽고싶어요. 좀 벅차더라구요. ㅎㅎ 근데 저도 생각나는 대로 씁니다. 심지어 퇴고도 안해요. 뭔 자신감인지... ㅎㅎ 글을 쓰는게 아니라 그냥 싸질러놓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책을 읽고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에 묘하게 책임감을 느끼게 돼요. 그래서 말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구요. 라로님 글은 언제든 저는 좋아합니다. ^^
 

그녀가 역겨워한 것은사랑이었다. 예속과 자기비하와 자기기만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던것이다. 그녀는 바로 그 위험을 보았고 허점을 읽었다. 앞뒤를 가리지않는 희망, 열의, 바람.
- P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