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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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한 일상의 스산한 풍경들

 

첫 번째 단편인 <야행 夜行>을 보다가 팡 터졌다.

"뭘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고요. 이런 저런 일로 내가 하도 우울해서요, 위로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 싶었을 뿐이었는데요. 저 동생 하는 말이요, 자기한테 계속 그런 얘기를 하려면 다시는 전화를 하지 말라는 거였고요......"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라는데 그 위로를 매일 해줘야 했던 상대는 당연히 지겹고 괴로웠을거다.

모진 맘을 먹고 따지러 가는 일가족의 출발부터, 그 가족을 맞은 다른 가족의 떨뜨름함과 그런 어른들의 갈등에는 별 관심이 없고 불편하기만 한 아이들의 어색함까지, 정말 어딘가에서 본듯한 일상의 한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삶이란건 생각보다 구질구질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그 구질구질함이 연속되면 누구라도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이고, 그 하소연을 매일 들어줘야 하는 사람은 고역인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삶의 한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단편은 너무 슬픈데 또 너무 리얼하고 절묘해서 순간적으로 팡 터져 웃고 말았다. 내게 황정은 작가가 항상 옳은건 이런 절묘함이다. 그 밤 방에 모인 모두의 마음이, 누구도 나쁘지 않은, 그러나 누구도 절대적으로 착하고 아름답지도 않은 그런 일상의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마음을 아리게 한다.

삶에 위로가 필요하다는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의 말이 한편으로 다 쓸데없는 말이 되는건 이런 순간이다.

이들은 그 위로를 구할 여유조차도 없기에 안그래도 팍팍한 삶에 나부터 위로 받아야 하는데 누구를 위로한단 말인가?

진짜 가난은 이렇게 팍팍하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는 길, 난 뜬금없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막막함과 팍팍함이 그저 정지된 한 장면인듯 펼쳐지는게 비슷하다고 느꼈던걸까?

 

이런 일상의 반복과 구차함과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다른 단편인 <양산 펴기>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하루 아르바이트로 바자회에서 양산을 팔면서 펼쳐지는 풍경은 이 도시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특별한 사건도 사고도 없지만 나의 팍팍한 삶을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해주는 온갖 장면들.

딱히 인물들의 감정을 구구절절하게 말하지 않아도 정치인을 대동한 기자가 바자회에 자원봉사 나왔냐고 하는 질문에 "그냥 알바예요"라는 대답에 하루동안 이들이 느꼈을 그 온갖 신산한 감정들이 묻어나온다.

 

2. 잊혀진다는 것은......

 

<대니 드 비토>와 <낙하하다>가 얘기하는건 잊혀짐이다.

이 두 단편은 다른 이야기이면서 같은 고통을 얘기하고 살짝 교차하기도 한다.

<대니 드 비토>가 잊혀짐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봄으러써 작아지고 작아지는 자신을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보고있는 지옥이라면, <낙하하다>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끊임없이 낙하하는인물이 등장한다. 낙하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기억을 하나씩 둘씩 버리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한개의 문장에만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너무 외로워서 차라리 무엇인가와의 충돌조차도 바라게 되는 지옥이다.

 

정말로 사람이 죽는 순간은 잊혀지는 순간이라는 말이 순간 떠올랐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잊지 말자는 말을 하고 살아간다.

내가 결심한 잊지 말아야지만으로도 탑 몇개는 거뜬히 쌓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잊지 않았나?

<대니 드 비토>의 유도씨가 마지막 남긴 이름이 유라인지 미라인지 알 수 없다고, 설사 유라였다고 하더라도 유도씨의 삶에서 유라가 잊혀진 것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잊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게다.

그저 이름을 기억한다는 정도가 끝없는 낙하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게 아닐거다.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을 위해 무언가 보살핌을 베풀고 잊지 않고 있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일거라도 이 소설들은 역설적으로 얘기하는게 아닐까?

사소하게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제사일수도 있고, 다르게는 아직도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고통스러울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고 진실규명을 위해 무언가 손을 보태는 것도 기억의 힘일 수 있겠다.

잊혀짐을 보여줌으로써 기억의 힘을 말하고자 하는 게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뼈도둑>의 사내는 눈속에 파묻히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지 않을까?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래서 죽은 연인의 뼈하나 조차도 허락받지 못했던 그 마음을 누군가는 기억해주고 인정해줬으면 하던 마지막 저항이 아니었을까?

기억은 이토록 필사적인 무엇이다.

 

3. 그럼에도 삶은 배려와 기억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옹기전>에서 항아리 하나를 주운 소년은 항아리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를 나침반 삼아 항아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것을 데려간다. 그 곳이 비록 모든 흔적이 사라진 곳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그래도 남은 항아리들이 있다. 함께 터질 수 있는 독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마음은 단편 <디디의 우산>에서 "어쨌든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라고 디디의 읊조림에 모두 담겨있다.

그 우산은 비를 피하는 우산일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기억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다. 짧게 끊어치는 문장들이 더 그런 우울함을 배가시킨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고 난 마음이 우울하지만은 않은 것은, 그 짧게 끊어치는 문장들 사이 사이 들어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려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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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29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우상보다는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우산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

바람돌이 2021-01-30 00:36   좋아요 0 | URL
비맞지 않게 배려하는 우산같은 사람 쉽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내 욕심을 없애면 내 옆의 몇명의 사람을 배려하는거 그렇게 어렵지 않을까요? 저도 늘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