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ㅎㅎ 따우님,


[감시와 처벌] 번역본이 잘 이해가 안되던가요? 번역을 평가해달라고 하시는 걸 보니 ...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나남)도 제가 강의에서 두 차례 사용한 적이 있는데, 전반적으로는 무난한 번역입니다. 그런데 3부와 특히 4부에서는 상당히 오역이 있더군요.

아시다시피 [감시와 처벌]은 17세기에서 18세기 말-19세기 초(푸코가 제일 좋아하는, 또는 제일 자주 다루는 역사적 시기죠)에 이르는 형벌체계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책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내용이 당대의 역사적 문헌들(푸코 역사 서술, 특히 [감시와 처벌]의 역사서술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대가들이나 유명한 저자들의 문헌들보다는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관공서의 문헌들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문헌들을 참고문헌들로 활용한다는 점이죠. 이는 푸코의 고고학, 또는 오히려 계보학이 드러내려는 인식의 층위가 공식화된 담론이나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그 아래에 위치해 있는 영역, 다시 말해 과학적인 담론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소하고 비과학적이고 매우 이질적인 이야기들, 문헌들이기 때문이죠. 푸코는 이러한 영역의 담론이야말로 과학의 담론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조건들이지만, 동식적이거나 과학적인 담론에서는 배제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만큼 지식의 형성에서 권력이 작용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데 훨씬 적합하다고 보는 거죠)에 기초한, 역사적 변동과정을 기술하고 재구성하는 것들이죠. 이런 내용들이야 번거롭긴 해도―왜냐하면 백과사전이나 기타 참고자료들을 자주 참고해야 하니까―번역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시와 처벌]의 1,2부, 또 3,4부에서도 역사적 상황에 대한 서술 부분들은 번역이 좋은 편입니다.

그런데 3, 4부의 경우에는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역사적 상황이나 변동과정을 한참 서술하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 매우 일반적인 철학적 결론을 도출하는 부분들 말이죠. 이런 내용들이 3,4부에 많이 나오는 이유는, 3,4부가 다루는 시기가 18세기 말, 19세기 초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구요?

이 시기는 아시다시피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가 유럽 전역을 휩쓸던 시기이고, 대대적인 법적, 정치적, 행정적 개혁들이 일어났던 시기지요. 당연히 형벌제도나 형행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구요. 푸코 이전에 이러한 변화를 가리키던 일반적인 명칭이 있는데, 그건 인간화라는 것이죠. 형벌의 인간화, 행형제도의 인간화(또는 [광기의 역사]의 경우는 광인들의 인간화) 등등. 그리고 보통 이러한 인간화의 기초에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토대였던 [인권선언]이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까지 대부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평민, 예속자들이 [인권선언]을 통해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은 것처럼, 죄수나 광인 같은 사회의 배제된 주변인들 역시 [인권선언]을 통해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권리, 곧 인권을 보장받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감시와 처벌]이 정면으로 도전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화의 가설이죠. 형벌제도나 형행제도가 프랑스 혁명을 전후해서 급격한 단절을 보인 것도 아닐뿐더러, 그러한 변화의 양상이 구체제의 야만성에서 인권에 기초한 인간화로의 이행의 양상도 아니라는 것이죠.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인간화의 가설은 사실은 부르주아의 법적 이데올로기(푸코가 이 말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내 기억으로는^^)에 기초하고 있고 또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데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법적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첫째,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자유로운 의지와 이성적 능력을 갖춘 존재이고, 둘째, 그들은 자유롭고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국가를 구성하며, 다양한 대의 제도들을 통해 국가의 운영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셋째, 모든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는, 국민들의 의사를 얼마간 대표하는 의회에서 공식적인 법률이 제정되고 이 법률에 기초하여 행정부서에서 각종의 제도적 절차들을 마련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푸코는 이러한 인간화의 가설, 그리고 법적 이데올로기는 첫째,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왜곡할뿐더러, 둘째, 예속자들, 특히 수인들이나 광인들, 불량배들 같은 주변적인 존재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속의 실제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듦으로써,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 보고 있지요. 푸코가 보기에 법제도는 사회적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진정한 원인은 미시적인 지식/권력관계들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권력관계의 미시적인 상호작용이 어떻게 형벌체계와 형행제도를 변화시켜왔는지를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을 통해 보여주려는 게 바로 [감시와 처벌]의 작업의 의미이지요.

이 작업을 통해 푸코가 밝혀낸 핵심적인 결과는 형벌제도와 형행제도의 변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힘은 근대적인 규율권력이라는 것입니다. 규율권력의 특징은 억압하고 부정하고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목표에 잘 따르고 권력의 명령을 잘 이행할 수 있는 개체들, 곧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요. 다시 말하면 규율권력은 이 권력이 작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개체의 역량puissance―이 개념은 들뢰즈가 니체와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에서 매우 강조하는 개념이지요. 따라서 [감시와 처벌] 푸코의 분석은 그가 들뢰즈의 작업을 어떻게 활용하고 변용하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을 개체 자신(의 권한)으로부터 분리시켜(마치 마르크스가 노동력의 상품화에 관해 말하듯이), 권력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만들지요. 이처럼 사람들을 각자의 역량으로부터 분리시켜 권력의 목적에 순응하게 만드는 권력의 기술이 바로 규율입니다.

푸코는 이를 또한 예속화assujetissement의 메커니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따라서 푸코가 보여주고 싶은 점은 이거죠.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인권선언]을 통해 사람들이 구체제의 야만적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유화, 또는 인간화라고 부르는 이 과정은 사실은 새로운 종류의 지배-종속관계가 실현되고 구체화되는 과정, 곧 예속화의 전개과정이다. 부르주아의 법적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예속화의 메커니즘을 인간화, 자유화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의 지배의 실제적인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있다.'

이런 일반적인 철학적 테제들이 바로 3부 뒷부분과 4부 이곳저곳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번역본에는 이런 내용들이 제시되는 부분들에서 오역이 자주 보입니다. 특히 4부가 좀더 오역이 많지요. 제가 지금 책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예시를 해볼 텐데, 막연한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 보니까 정확히 어떤 오역이 있는지 말하기는 어렵네요. ^^;;;

그런데 이 책은 올해 초에 개역본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저도 개역본은 보질 못해서 이런 오역들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따우님은 아마 이전에 나온 판본을 보신 게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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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0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 ;;;

바람구두 2004-10-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는 보기 좋습니다만, 제가 질문 드려도 잘 답해주시길 기대해 봅니다.

가을산 2004-10-05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맘 좋으시니까 추천이 많이 들어오네요. ^^

비로그인 2004-10-05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주아의 법적 이데올로기에 저도 추천!!

balmas 2004-10-05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추천들을 많이 해주셨군요. 따우님의 인기의 영향인가요?^^
바람구두님, ㅎㅎ 무슨 질문을 하실지 겁이 나는데요 ...

비로그인 2004-10-0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자하니 강원대 출판부에서 나온 책이 (박홍규)번역이 더 낫다고 해서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첫번째를 나남으로 읽어놔서... 이걸 별 불편없이 보았어요. 그리고 읽기엔 나남이, 나중에 읽어선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는 박홍규씨 것이 더 편했던 기억이..나남 개역판이 나왔군요.
저두 추천했는데, 여기엔 이런 정보를 더 자주 달라는, 시간없으셔도 좀 적어주시라는 주문의 추천이었음을... 헤헤헤... _(__)_

biosculp 2004-10-0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남 번역본은 불문학자가 강원대 본은 법학자가 번역해서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나겠죠.
근데 강원대 본은 절판이 되서

balmas 2004-10-06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원대 출판부 판본은 책은 갖고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
그 판본 번역이 더 낫다고요? 그럼 언제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숨은아이 2004-10-08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언제 읽게 될진 모르지만 자료 삼아 퍼가서 간직하렵니다. ^^

balmas 2004-10-0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얼렁 읽을 기회를 얻게 되시기를 ...

모모 2004-10-11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박홍규의 번역이 더 낫다고 들어서 그걸로 읽었었어요. 오생근의 번역은 읽지 못해서 무어라 비교하기가 힘들지만, 그렇게 아주 좋은 번역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되네요. 의미는 정확하게 옮겼는지 모르겠지만, 문장들이 거칠고 비문이 많았던 듯. 대신 역주가 꽤 많이 달려 있어서 도움은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을 듯.

balmas 2004-10-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모모님은 박홍규 교수의 번역본을 읽으셨군요.
저도 기회가 되면 한번 비교해서 읽어볼 생각입니다(오생근 교수 번역본은 개역본으로 한번 읽어봐야지 ...).
 

그렇지 않아도 두번째 글에서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처음과 끝님이 그 내용을 댓글로 달아주셨군요.^^

처음과 끝님이 말한 것처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이 엉망이라고 하는데, 막상 어떤 독자들은 그 책을 재미있게 읽고 또 나름대로 감명을 얻는 경우가 있죠. 저의 예를 하나 들자면, 88년인가 89년인가 김현 선생이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푸코가 60년대에 문학에 관해 쓴 이런저런 글들을 묶고, 김현 선생이 긴 해설을 붙인 책이었죠. 그 책을 읽어본 분들은 대개 공감하실 텐데, 푸코의 문학에 관한 글들은, 그가 나중에 쓴 글이나 책들, 특히 [감시와 처벌] 같은 책과는 문체부터 확연히 다르고, 내용들도 상당히 사변적, 철학적이죠. (푸코의 첫번째 주저, 그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인 [광기의 역사](1961)에는 그의 문학론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사변적인 문체와 고고학 저술들에서 볼 수 있는 건조하고 담백한 문체가 모두 공존하고 있죠. 저는 그 점이 특히 매력적이더군요 ) 그래서 저는 당시에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이 책에 아주 매료됐었죠.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푸코의 저작들을 이것저것 찾아 읽었고, 그래서 알튀세르와 푸코는 제가 제일 집중적이고 체계적으로 읽은 첫번째 프랑스 철학자들입니다(그 이전에 저의 철학적 영웅은 물론 루카치와 헤겔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그토록 매료되었던 푸코의 글들, 특히 바타이유에 관해 쓴 [위반에 대한 서언]이나 블랑쇼에 관한 글인 [한없는 언어] 그리고 몇몇 사변적인 글들은 어이없는 오역본들이더군요(^^;;;). 그 글들을 번역한 사람들은 김현 선생의 제자, 그러니까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소장 불문학도들이었는데, 푸코에 관해서는 그 책이 국내에 거의 처음으로 번역되는 책인데다가 매우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논의들로 가득 찬 글들을 소장 불문학도들이 제대로 소화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본다면 무리이겠죠. 그래서 좀 허탈하고 어이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재작년에 강의를 하면서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수업교재 중 한 권으로 쓴 적이 있었는데, 기말보고서를 발표할 때 보니까, 학생들 중에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번역본을 참조해서 보고서를 쓴 학생들이 몇 있더군요. 앞의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의 국역본들은 상당히 문제가 있는 번역본들이어서, 들뢰즈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발표하는 학생들의 글을 보니까 상당히 잘쓴 글들이고, 들뢰즈의 논의도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학점도 잘 줬습니다.(^^) 처음과 끝님의 경우와 유사한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번역본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감명을 받고 또 내용을 어느 정도 잘 파악하는 경우들이 분명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우선 번역본의 번역 상태를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잘된 것보다는 잘못된 것들에 좀더 치중하게 되고, 특히 철학책의 번역을 검토할 때는 이 책이 원본에 나와 있는 저자의 논의, 그의 논리적 추론과정을 제대로 전달해주고 있는지,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제대로 번역해서 제시해주고 있는지 등을 따지게 됩니다. 그런데 원본을 전혀 참고하지 않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번역된 한글 문장이 전달해주는 의미들을 쫒게 되죠. 이 경우 내용이 잘 이해되다가 어느 순간 잘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독자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가서, 다음 내용을 읽게 됩니다. 다행히 그 다음 문장이나 문단들은 내용이 잘  이해되면 독자는 앞의 내용과 연결해서 계속 책을 읽게 되죠. 이처럼 독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나 문단, 내용들은 모르는 대로 그냥 넘어가고 이해가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형편없는 번역본이 아닌 다음에야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그 책을 읽은 독자는 나름대로 책의 내용을 소화하고 거기에 감명을 받거나 실망하거나 자극을 받거나 혐오를 하게 되죠.

더욱이 형편없는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모든 문장이 오역인 번역본은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최악의 번역본 중에는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고려원)이라는 책과 라비노우/드레퓌스의 [미셸 푸코](나남), 또는 존 레웰린의 [데리다의 해체주의](문학과 지성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절판이 되었지만 이 책들은 모든 문장이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말 지독한 오역 문장들로 가득차 있어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습니다(물론 모르고 읽었을 때는 책이 난해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 -_-;;;). 이런 정도의 오역본이 아닌 다음에야,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번역된 문장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독자들은 이처럼 이해되는 문장들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책의 내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되지요.

따라서 번역본, 특히 철학책의 번역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논증과 의미전달의 충실성을 염두에 두고 평가를 하는데, 독자들은 이를테면 번역본을 아포리즘과 같은 식으로 읽게 됩니다. 이 문장은 멋있군, 이 문장은 이게 무슨 소리야, 전혀 모르겠는데(문제는 나에게 있겠지만 ... ;;;) 이건 말도 안되는 문장인데, 반어법인가? 어 그래도 이 문장은 좋군, 말하자면 이런 식이죠. (가끔 알라딘 마이 리뷰에 보면 형편없는 번역본인데도 크게 감명을 받았다는 식의 서평이 올라오곤 합니다. 책을 전혀 읽지 않고 쓴 서평일 수도 있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 독자는 형편없는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읽고 실제로 무언가 의미있는, 감동적인 것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퍼즐맞추기에 비유하자면, 몇 개의 그림들이 빠진 상태에서 또는 잘못 맞춰진 상태에서 자신이 맞춰놓은 것만 가지고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의미 있는 내용들을 정리하고 이끌어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번역본을 평가하는 사람으로서는 최선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그 기준에 맞춰서 문제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되지만, 독자들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어떤 의미있는 내용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지요. 그리고 사실 일반 독자들로서야 그 책을 완벽하게, 최선의 상태로 이해해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는 거지요. 자기가 원하는 내용을 찾고, 또 즐길 수 있으면, 기쁘게 읽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죠. 하지만 연구자나 서평자로서는 독자들과 달리 그 책을 최대한 정확히, 최대한 완벽하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죠. 또 사실 그것이 바로 연구자나 서평자의 존재 이유 자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번역본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는 그 평가대로 참조하시되, 자신이 그 책을 읽고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찾아냈다, 재미있게 읽었다 생각하신다면 그걸로 만족하시면 될 듯합니다. 불만족이시라구요??? 그럼 이제 연구자의 길로, 고생문으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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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10-04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포리즘'으로 읽는다..... 제가 이렇게 읽는 것 같아 불만이었는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닌가보네요. (다행이다! ^^ )

balmas 2004-10-04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따우님,
얼렁 읽고 수업들어가셔야죠 ...
ㅎㅎ 가을산님,
그건 거의 전적으로 번역자들 책임이죠. 거의 모든 프랑스 철학자들을 아포리즘 작가로 만드는 것 ...

릴케 현상 2004-10-0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가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재구성' 하는 독서 패턴을 정확히 지적하시니^^

balmas 2004-10-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많이 경험해봤거든요.

딸기 2004-10-0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엉...
민음사 '앙띠 오이디푸스' 샀는데... ㅠ.ㅠ

balmas 2004-10-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딸기님,
아직도 그 책을 팔던가요 ...
그 책을 무리해서 읽으시면 철학에 대한 혐오와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공포감이
한층 더 강화되니까, 심신의 건강을 위해 아깝더라도 그냥 장식용으로 놓아두심이 ...
 

가을산님,

지난 번에 [시선의 권리] 마이리뷰에 댓글 달아놓으신 걸 봤는데, 이렇게 늦게 답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세하게 답변을 드리려고 했는데, 여건이 허락치 않아서 그냥 간단하게 몇 마디로 답변을 드릴까 합니다.

그동안 번역의 문제를 지적하는 몇 개의 서평을 썼지만, 이런 류의 서평을 쓸 때마다 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런 류의 서평이 혹시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의 의욕을 꺾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지요. 사실 원서를 직접 접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독자들로서는 데리다 번역이 형편없다더라, 들뢰즈의 어떤 책도 번역이 엉망이라더라, 지젝도 그렇더라더라는 등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 책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까지도, 이 책의 번역이 엉망인데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읽은 게, 또는 읽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이런 류의 책들을 읽을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겠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만든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졸속 기획과 번역·출판을 일삼는 출판사와 역자들에게 돌아가야 하겠지만, 아직 우리 지식계에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을 적절하게 가려서 평가하는 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 더 나아가 대중적인 수요에 비해 이를 감당해낼 만한 지적 역량이 부족하다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쉽지만, 당분간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불가피하게 반복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서두가 좀 길어졌는데, 가을산님의 질문에 대해서는 우선 두 가지 일반적인 조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가을산님이 질문하신 저자들 중에서 번역이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사람은 데리다와 들뢰즈 정도라는 점입니다. 가령 들뢰즈 같은 경우는 {안티 오이디푸스} 최명관 옮김(민음사) 같은 책은 번역에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역자는 들뢰즈 철학을 거의 모르는, 원래 데카르트 철학을 공부한 분인데, 당시에는 연구자가 드물다 보니까 어떻게 이 책의 번역을 맡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은 품절되었고, 제가 아는 후배({천 개의 고원}의 역자이기도 하지요)가 지금 번역 중에 있는데, 역자의 능력으로 볼 때 훨씬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철학의 주사위} 신순범 옮김(인간사랑)이나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민음사) 같은 책들(이 두 권은 모두 Nietzsche et la philosophie(1962)라는 들뢰즈 책의 번역본인데, 앞의 경우는 영역본을 중역한 것이고 후자는 불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은 {안티 오이디푸스}보다는 좀 낫지만 그래도 번역에 문제가 있는 책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니체와 철학}은 니체 철학에 관한 매우 탁월한 연구서일 뿐만 아니라 들뢰즈 철학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이기도 합니다. 문체가 매우 탁월할 뿐만 아니라 아주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고 치밀한 논의가 일품이지요. 하지만 두 권의 번역본은 모두 들뢰즈의 문체나 논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읽다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 아쉬운 일이지요. 

그리고 저는 번역본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마이페이퍼를 보니까 {비평과 진단} 김현수 옮김(인간사랑)이라는 책(들뢰즈 생전에 나온 마지막 저서인데, 여러 개의 논문들을 모은 논문모음집입니다)도 번역에 좀 문제가 있다고 하더군요.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민음사)의 경우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하구요. 그리고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권순모·이진경 옮김(인간사랑) 역시 번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국내에 번역된 들뢰즈의 저서들 중 태반이 번역에 문제가 있는 셈입니다. 반면 {차이와 반복} 같이 번역이 잘 된 책은 너무 어려워서 일반 독자들에게는 사실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고, {천 개의 고원} 같은 경우는 번역은 괜찮은 편인데 다루는 주제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나 {프루스트와 기호들}, {카프카} 같은 책들은 좀 특수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또 선뜻 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들뢰즈의 {푸코}는 푸코에 관한 제일 좋은 연구서 중 하나이고 후기 들뢰즈의 문제의식의 일단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책이기는 한데, 제가 읽어본 번역본은 이전에 새길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뿐이고 얼마 전에 동문선(!!)에서 새로 나온 판본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새길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들뢰즈의 푸코})은 앞부분과 뒷부분을 둘이 나누어서 번역했는데, 번역의 질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권영숙 씨가 한 부분의 번역이 훨씬 좋습니다. 동문선에서 나온 판본은 출판사는 미덥지 않지만 역자는 신뢰할 만한 사람인데, 제가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콕 집어서 이걸 보시는 게 좋다고 할 만한 책이 없군요, 이런 ... -_-;;;

하여튼 번역의 질을 놓고 본다면, 이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들뢰즈에 입문하기에 괜찮은 책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라는 책(이전에 갈무리에서 나온 {들뢰즈의 철학사상}이란 책의 수정·증보판입니다)입니다. 이전에 번역된 {들뢰즈의 철학사상}은 들뢰즈의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들뢰즈의 사상을 해설한 책인데, 새로 책을 내면서 들뢰즈의 사회정치사상을 추가해놓았더군요. 하트는 아시다시피 네그리와 더불어 {제국}을 공저한 사람으로, 출중한 이론적 능력을 지닌 젊은 이론가인데, 이 책도 들뢰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또 얼마 전에 동문선(!!!)에서 알베르트 괄란디라는 프랑스의 소장 철학자가 쓴 {들뢰즈}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분량은 적지만, 매우 체계적이고 요령 있게 들뢰즈의 철학사상을 설명해놓은 좋은 책입니다. 번역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들뢰즈의 철학을 소개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글쎄요, 저도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번역본을 사기가 좀 겁납니다. ;;;

2편은 다음에 ... (죄송. 제 노트북이 고장나서 당분간 인터넷을 오래 쓰기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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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0-0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욕이 꺾이는 건 사실인데,
어렵지만 잘 읽었다고 생각이 되는 책이 '번역이 엉망이었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난감해지죠.
아니, 분명히 제대로 읽었는데, 엉망이란 말야? 그럼 이럴 때는 어쩌면 좋죠?
이미 번역된 엉터리 글에 중독된 건가요?
그리고 그런 책으로 리포트를 쓰고 또 좋은 평가까지 받았다면, 그 평가내리는 분도 번역이 잘못된 책을 읽고 잘못 평가...?
뭐, 그렇다면 이놈의 번역된 책들을 읽고는 공부하는 게 불가능?
어, 그러면 외국어를 제대로 하는 게 없으면 공부는 하지 말라는 말씀?
...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죠.
어떻게 된 건가요? 이런 사태는.
갸우뚱.

가을산 2004-10-0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balmas님 고맙습니다!
적어도 조심해야 할 번역본, 조심해서 골라야 할 저자는 알게 되었네요.
영어책인 경우는 갑갑하면 원서를 사서 어찌어찌 읽어볼텐데,
불어는 완전 까막눈이라 번역서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그냥 포기하게 되더라구요.
정말 고맙구요, 언젠가 있을 2편도 기대하겠습니다. (한참 후라도 괜찮습니다.)

starrysky 2004-10-04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balmas님. ^^
괜찮으시다면 이 1편과 위의 2편을 제 hidden category로 퍼가고 싶은데,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almas 2004-10-0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starry님 뭘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
hidden category라고 하시니까 왠지 영광스러운 기분.^^;;

starrysky 2004-10-04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락 감사합니다. 고이고이 접어서 잘 들고가, 제 비밀 목록 안에 잘 펼쳐놓겠습니다. ^^
 

지난 번에 말했던 것처럼 [한국출판인회의]라는 단체에서 매달 내고 있는 [북 앤 이슈Book & Issue]라는 서평지에서 지난 달에 서평을 부탁해와서 보름전에 서평을 써서 보냈습니다. 이제 책이 나오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이 단체 관계자로부터 황당한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이 책을 선정했던 분이 책을 꼼꼼하게 읽지 않고서 책을 선정한 것 같아서, 내부 회의 결과 이 책의 선정을 취소했고, 따라서 서평도 빼고서 책을 냈다고 말입니다.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잦은 오역시비가 일어나는 줄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서 이 달의 책을 선정한다는 관행 자체(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위를 부여했는지??)도 어이가 없거니와, 자신들이 서평을 부탁해서, 고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서평을 부탁해서 여러 날 동안 없는 시간 들여가며 책을 읽고 서평을 써주니까, 그제서야 책의 선정을 취소하고 서평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평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단체의 공신력이 떨어지는 것이나 선정자의 위신이 실추되는 것, 또 아마도 출판사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 등이 고려되었겠지요.

하지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300여개 출판사들이 창립한 <한국출판인회의>는 지식문화의 근간인 출판의 개념과 영역을 확장시키고 그 산업 발전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지식정보 사회를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 사단법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표방하고 있고, 자신의 정체에 따라 소임을 다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이 달의 책들을 선정하는 일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해온 단체라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이처럼 엄연히 이미 이 달의 책으로 선정, 발표하고 나서(이는 이미 중앙일간지에 보도된 바 있고, 인터넷 서점들 가운데는 이러한 선정의 결과를 공지한 곳들도 있습니다) 선정의 행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자, 그제서야 선정의 행위를 취소하고 서평을 싣지 않겠다고 하는 것(처음부터 선정을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은 자신들의 선정 행위가 갖는 권위는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잘못된 선정 행위의 책임은 회피하겠다는 발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경우 또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될 쪽은 잘못된 정보를 갖고 책을 구입하는 독자들일 텐데 말입니다.

그동안 이 책에 관해 인터넷 서평을 쓸까 망설였는데, 이제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포함시켜서 본격적으로 인터넷 서평을 써야 할 것 같군요. 시간에 쫒겨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시간을 내라고 부추기는군요. 

아래는 [북앤이슈]를 위해 써준 서평의 원문입니다.

 

 

또 하나의 참담한 데리다 오역본


  데리다는 현재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이론 분야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심지어 영미 학계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관한 논의가 하나의 독자적인 하위학문(sub-discipline)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데리다의 이론적 작업은 여러 학문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인문사회과학 및 예술이론 분야의 이론적 발전을 위해서는 데리다의 작업을 소개하고 이해하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데리다의 중요한 예술론 저서 중 한 권인 [시선의 권리](아트북스)의 출간은 원칙적으로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 없다. 데리다는 문학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회화에 관해서도 여러 권의 책(La vérité en peinture(1978), Mémoires d'aveugle(1990), Atlan: Grand format(2001), Artaud le Moma(2002))을 낸 적이 있지만, 사진, 포토로망에 관해 이처럼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이 책이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벨기에 출신의 사진작가인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에 관해 데리다가 긴 ‘해설’을 붙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격조 높은 사진들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데리다가 덧붙인 탁월한 ‘해설’은 이 책을 통상적인 사진집(과 해설)의 차원을 넘어, 이미지와 문자, 보기와 말하기/쓰기, 장르와 젠더, 현전/현상과 환영/유령 및 더 나아가 시선과 감시, 법과 권력 등에 관한 예술적, 철학적 논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번역이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이루어졌을 때의 이야기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이는 대부분의 국내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전설, 신화일 따름이다. 사실 국내의 데리다 독자들은 이미 이같은 사실과 소문, 현실과 신화 사이의 참담한 괴리를 여러번, 너무나 자주 경험한 바 있다. 아쉽게도 이는 이 번역본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인데, 이 책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 1996)나 [해체](문예출판사, 1996), [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 등과 더불어 데리다 저서의 최악의 오역본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저런 기회에 지적했던 것처럼 데리다는 현대뿐만 아니라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도 보기드문 문장가(그에 비견할 만한 현대의 이론가는 라캉 정도일 것이다)여서, 이론적인 논증과 수사학적인 어법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글을 쓰며, 그의 작업이 갖는 의의, 중요성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논증과 수사학의 결합이 산출해내는 의미효과들에 있다. 따라서 데리다 저서에 대한 번역의 성패는 이러한 의미효과들을 얼마나 정확히, 얼마나 충실하게 옮겨내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책의 역자는 “dont”이나 “que”와 같은 프랑스어의 초보적인 관계대명사의 용법이나 과거시제의 용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격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abyme”를 줄곧 “심연”으로 번역하거나 “독촉”과 더불어 “총합”이라는 의미를 지닌 “sommation”이라는 단어를 줄곧 “독촉”이라고만 번역하는 등의 일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이며, 더 나아가 복잡하게 뒤얽힌 논증과 수사학의 결합을 풀어내어 이해 가능한 표현으로 전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차 있는 이 번역본은, 데리다를 신비스러운 인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는 데도 외국에서는 놀라운 명성을 누리고 있는 불가사의한 인물로 만드는 데 기여할 뿐, 독자들이 미묘한 논의들을 통해 산출되는 놀라운 의미효과들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데리다의 이론적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역자만이 아니라 출판사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문학동네의 자회사인 아트북스 같은 출판사라면, 그리고 “데리다의 3대 예술서의 하나”―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라고 광고할 만큼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더 나아가 역자가 불어 능력을 거의 갖추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면, 데리다 전문가나 적어도 불어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외주를 줘서 이 책의 번역을 꼼꼼하게 교열하고 교정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본의 상태는 출판사에서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이 책을 출간했음을 잘 말해준다. 그런 마당에 “3대 예술서 중 하나”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재판을 찍을 경우에는 아예 [자크 데리다, 시선의 권리]라는 민망한 제목을 빼고 대신 [마리-프랑수아즈 플리사르의 포토로망: 시선의 권리]라는 제목으로 고쳐내는 게 옳을 것이다. ‘포토로망의 번역본’이라는 말이 앞뒤가 맞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한국출판인회의의 공신력 역시 이 책으로 인해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촉해서 달마다 우수한 도서들을 선정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하고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데리다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데리다의 책이 이처럼 우수도서로 선정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달의 최악의 도서들 중 한 권으로 꼽힐 만한 오역본을 우수 도서로 선정해놓으면, 이 단체의 권위를 믿고 이 책을 마음놓고 사서 읽는 독자들이 입게 될 피해는 과연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이래저래 이 책의 출간과 우수도서 선정은 한국 출판계 및 인문학계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건, 또하나의 해프닝으로 기록될 것 같다. 제발 이런 류의 참담한 사건, 이런 식의 어이 없는 해프닝은 이번으로 끝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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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9-24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로드무비 2004-09-2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앤이슈가 큰 실수를 했군요.

balmas 2004-09-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저 황당할 따름입니다.

chika 2004-09-24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요... 전 님의 서재를 즐찾한 줄 알았는데, 이 글을 다른 분 서재에서 보고야 즐찾안됐다는걸 깨달았지뭡니까.. ㅡㅡ;;;;;
^^

조선인 2004-09-2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 추천합니다. -.-;;

바람구두 2004-09-2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서평 청탁 받고, 글 썼다가 애꿎은 시간만 날려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에효... 왜들 그러는지....

balmas 2004-09-24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분이 추천해주셨군요. 근래 보기드문 성황입니다.
나쁜 번역은 사라지고 좋은 번역만 나오길 바라는 마음들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감사^^
바람구두님, 그러셨군요. 정말 왜들 그러는지 ...

비로그인 2004-09-2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노는 건지...하여간 발마스님의 날카로운 서평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balmas 2004-09-2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이죠.
그렇게 할 거면 책을 내지를 말고, 책을 선정하지를 말든가 ...

hoyami 2004-09-2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ut you should be happy about one thing! That you are thaaaaat influential!!!!!! Isn't it great! You are such an influential writer that they had to withdraw their decision!!! Oh my God, you're so great!!!! ^^
What is the name of the SeonJeong Wiwon, by the way? Just curious~

starrysky 2004-09-25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어떻게 저런 식으로 일을 한대요. 심하게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나뿐 사람들!!!
우리 balmas님의 시간과 노력은 누가 보상해 주나욧!! 그리고 이런 말 좀 심할지 모르지만 선정위원이란 사람들은 읽어봐도 오역인 줄 모르지 않을까요? -_- 적어도 출판사 관계자들은 꼬옥 balmas님의 글을 읽었음 좋겠습니다.

balmas 2004-09-25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말도 안되죠.

   책을 잘못 선정하는 것 자체는 (될 수 있으면 일어나서는 안되겠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몇천명씩 파병도 하고, 기업도시법이나 파견법 같은 어이 없는 일도 개혁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마당에, 책 하나 잘못 선정했다고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봅니다.

   더욱이 지난 몇년 동안 문광부 같은 데서 올해의 우수도서로 선정한 책들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어이없는(저자나 편자,  역자들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책들이 버젓이 우수도서로 선정되고, 우수도서로 마땅히 선정되어야 할 책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운지. 우스운 것 중 하나는  올해부터는 한 출판사에서 5권 이상의 책을 선정하지 않도록 방침을 정했다고 공표한 점입니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그 이전에는 한 출판사에서 5권 이상의 책이, 그것도 합당한 자격과 질을 갖추지 못한 책들이 다수 선정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셈이죠. 문화관광부 선정도서는 도서당 1,000만원어치를 구입해서 각 공공 도서관에 비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름 없는 출판사들에서 내는 좋은 책들이 여기에 선정될 수 있다면 큰 혜택을 받을 수 있겠지만, 또 실제로 그런 경우들도 있지만, 상당수 도서들은 원래의 취지와는 무관한, 선정위원들과의 모종의 친분관계/연줄관계에 따라 선정되었고 또 선정되고 있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한 책들입니다. 좋은 취지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런 사업들이 제대로 집행되고 관리된다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게 안타깝고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런 분야에도 시민들의 엄정한 감시와 비판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마당에 한국출판인회의 같은 데서 책 한 권  잘못 선정했다고 크게 문제삼을 건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선정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좀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선정을 취소한다고 하더라도 취소의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그 계기가 된 서평은 실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제 생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게 한국출판인회의로서도 좀더 떳떳한 일이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쨌든 별총총님과 여러분들이 모두 공감하고 응원해주셔서 큰 힘이 나는군요. 다시 한번 감사드릴게요.^^

 

  그리고 Shimba, 내가 뭘 영향력이 있다고 그러시나?^^ 영향력이 있다면 그런 식으로 서평 게재를 취소하고 하지도 않았겠지.  어쨌든 [북앤이슈]에는 실어줄 수 없다니까, 인터넷 서점들에라도 서평을 실어야지. 


릴케 현상 2004-09-2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추천이 무척 많군요. 저도 하나 추가하지요^^ 사실 상당수의 출판사는 선정도서에 책을 내지도 않는 것 같더군요. 지이이이이루한 노릇이죠

balmas 2004-09-26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쯧쯧, 그런가요?
특정한 책을 예로 들어서 좀 무엇하긴 하지만, 작년인가 종교/철학 분야의 우수 학술 도서 중에는 로제 폴 드르와라는 사람의 책이 두 권이나 선정되었더군요. 로제 폴 드르와라는 사람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저널리스트이고, 선정된 두 권의 책은, 읽으면 좋지만 안 읽어도 상관없는, 수많은 교양철학서들 중의 하나인데, 이 책들을 철학/종교 분야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더군요. 참고로 이 두 권의 책은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시기에 나온 책들입니다. 그 출판사는 문화관광부 우수 도서에 단골로 선정되는 출판사이기도 하지요.
 
 전출처 : 릴케 현상님의 "증여,순수증여,교환"

프랑스 이론가들 중에 이런 방면의 작업을 한 사람들이 꽤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는 아직 소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제일 주목할 만한 사람은 장-조젭 구(Jean-Joseph Goux)나 모리스 고들리에(Maurice Godelier) 같은 사람들이죠. 장-조젭 구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Marx et Freud](1972) 같은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종합하려는 매우 야심적인 책인데, 일본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에도 이 책을 번역해서 소개하면, 시의성도 있고 인문사회과학 연구에 상당히 기여를 할 수 있을 듯한데, 아직 번역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모리스 고들리에는 장-조젭 구에 비하면 좀더 인류학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초기에는 마르크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많은 주목을 받았죠. 최근에는 마르셀 모스에서 레비-스트로스, 데리다에 이르는 증여이론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선물의 수수께끼]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책이 잘 번역돼서 소개되면 좋을 텐데, 이른 시간 내에 번역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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