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운아]를 조금씩 읽다 보니까 <지적 차이>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이 있어, 두고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몇 쪽의 내용을 옮겨 적습니다.


 



106쪽


영국인이 말주변이 없다는 것은 많은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청교도주의나 소극적인 국민성 등으로 이를 설명하곤 한다. 그런 설명은 더 심각한 사태를 가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영국의 노동계급이나 중산계급에 속[107쪽]한 사람들 중에는 전반적인 문화적 황폐하의 결과로 말주변이 없게 되어 버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사고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했다.




그들은 경험을 보다 분명히 밝혀 줄 말을 찾을 때 참고할 수 있는 그런 예들을 갖고 있지 않다. 속담의 형태로 구전되던 전통들은 오래 전에 파괴되어버렸고, 또한 엄격히 기술적인 의미에서는 문맹이 아니라고 해도, 글로 남겨진 문화적 유산들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글을 읽을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 이상의 문제다. 일반적 문화라 함은 거기에 비춰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적어도 자신의 모습 중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부분을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한다. 문화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훨씬 적게 가지는 셈이다. 그들의 경험 중 많은 부분―특히 감정적이거나 내재적인 경험들―은 그들 자신에게 ‘이름지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결국 그들의 주된 자기표현 방식은 행위를 통한 것이다. 이것이 영국 사람들이 ‘직접 해보기(DIY)’ 취미에 그렇게 많이 매달리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때 정원이나 작업대는 만족스러운 자기반성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무엇이 된다.




가장 쉬운―그리고 가끔은 유일하게 가능한―대화의 형식은 행위와 관련된 혹은 행위를 묘사하는 대화이다. 말하자면 행위가 하나의 기술이나 과정으로 여겨지는 상황이다. 그때 이야기되는 것은 말하는 이의 경험이 아니라 완전히 외적인 메커니즘 혹은 사태―자동차의 엔전이라든지, 축구 경기, 배수로 혹은 위원회의 운영 등―다. 이런 주제들, 개인적인 부분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는 이런 주제들이 오늘날 영국에서 스물다섯 살 이상 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대화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더 어린 사람들의 경우[108쪽]에는 그들 자신의 욕망이 가지는 힘 덕택에 이러한 탈인격화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대화에는 따뜻함이 있고, 거기서 우정이 생겨나 계속 유지될 수도 있다. 대화의 주제 자체가 가지는 복잡함 덕택에 대화자들이 가까워질 수 있다. 마치 대화자들이 주제 자체의 아주 작은 세부에까지 철저히 살피기 위해 서로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 과정에서 손을 마주잡는 것만 같다. 그들이 교환하는 전문가적인 의견이 곧 공통의 경험을 상징하게 된다. 이미 죽어 버렸거나 지금 함께 하지 않는 친구를 생각할 때, 남은 친구들은 항상 전륜구동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던 그 친구의 설명을 생각한다.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그 설명은 이제 그들 사이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사샬이 활동하는 지역은 영국 내에서도 문화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황폐화한 지역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가 마을 사람들과의 대화에 어울릴 수 있게 된 것도 순전히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만의 기술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때부터 사샬과 마을사람들은 그들의 나머지 공통경험에 대한 메타포가 될 수 있을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게 되었다.




사샬은 그 메타포가 그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믿고 싶었다. 그 공통의 언어가 미치는 범위 안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나 숲 사람들 사이에서 사샬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부끄러워하거나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마을 전체가 이해하지 않으려 하거나 이해 못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이해를 해줄 것이다.(임신한 미혼모들은 대부분 아무런 스스럼없이 사샬에게 와서 직접 그 사실을 말한다.) 그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있다면, 의사에 대한 전통적인 두려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몇몇 노인들뿐이다. ...




109쪽


일반적으로 사샬의 환자들은 그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외부로부터의 관심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지역에서 외부로부터의 관심은 은연중의 착취를 암시한다. 그는 신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동등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대접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사샬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누구도 그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한 특권까지가 지금 모습 그대로의 의사로서 그의 일부분이다. 그 특권이 사샬의 수입이나 타고 다니는 차, 혹은 살고 있는 집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자기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제공되는 편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편의를 통해 사샬이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특권으로 여겨질 문제는 아니다. 그에게 그만큼의 안락함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특권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의 생각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 때문이다! ...




110쪽


마을 사람들이 사샬을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그의 생각이 대단히 인상적이어서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생각하는 방식이 자신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린다. 자신들의 상식에 의존하는 데 반해, 그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상식은 실용적인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단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만 실용적이다. 상식은 자신에게 먹이를 내미는 손을 깨물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더 좋은 먹이를 먹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까지만 어리석은 일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식은 수동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가능한 것’에 대한 구태의연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




상식은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졌던 사람들이 집에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이 이데올로기는 여기저기서 취합한 것들로 구성된다. 아직 살아남은 종교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경험적 지식에서 나온 것, 방어적인 염세주의에서 나온 것, 그리고 현재 제공되고 있는 피상적인 교육을 쉽게 하기 위해 취사선택된 것들이 있다. 요점은 무엇인가 하면 상식은 절대 스스로를 가르칠 수 없으며,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결핍되어 있던 기본적인 교육이 회복되는 바로 그 순간, 모든 상식적 생각들은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상식의 기능 전체가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상식은 탐구하려는 정신, 즉 철학과 구별되는 한에서만 하나의 범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




116쪽


마을 사람들이 사샬의 생각하는 방식을 특권으로 느끼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것은 이유라고 하기에는 좀 합리적이지가 못하다. 한때는 마법적인 권위로 여겨졌던 그런 권위, 그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모든 충동들이 자연스럽다고, 혹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또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기억한다. 그는 그런 것들에 대한 경외감이 조금도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꿈과 악몽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흥분을 참지 못할 때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 핑계가 아니라 ― 이[117쪽]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사샬의 능력 때문에, 그는 상식 안에서는 무시되거나 거부되어야만 했던 경험들과 연결된다. 이러한 ‘면허’가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 한 명 한 명 안에 들어 있는 갇힌 자아에게 도전한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12-06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2-14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고마워요, 숨어계신 님.^^
 

* 지난 수요일에 오랜만에 아는 후배를 만났는데, 존 버거 책을 한 권 번역했다고 줘서 틈틈이 읽고 있다. 교육방송 PD로 일하고 있는 친구인데, 바쁜 와중에도 책을 번역한 게 용하다. 존 버거를 좋아하는 나로서야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선물인데,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라고(장 모르의 사진들도 좋다^^) 권하는 의미에서 몇 구절을 적어보겠다.

 

행운아 - 어느 시골 의사 이야기

존 버거 (지은이), 김현우 (옮긴이), 장 모르 (사진) | 눈빛


정   가 : 9,000원
판매가 : 8,100원(10%off, 900원 할인)
마일리지 : 243원(3%)
2004-11-11 | ISBN 8974092085
반양장본 | 184쪽 | 188*128mm (B6)
알라딘 Sales Point : 360
예술/대중문화 주간베스트 56위

  



부커상 수상작가로 폭넓은 저작활동을 해오고 있는 존 버거가 쓴 글과 장 모르가 찍은 사진을 함께 담았다. 점점 더 궁핍해지는 후미진 시골, 의사 존 사샬은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보살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한 현대사회에서 '행운아'인 한 의사의 삶을 통해 인간 삶의 가치를 돌아본다.



존 버거 (John Berger) - 1926년 런던 태생으로 미술비평가, 소설가, 극작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 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술평론으로 활동을 시작해 사유의 영역을 확대해 왔으며 역사에 대한 통찰과 감각도 탁월하다. 1962년 영국을 떠나 알프스의 작은 마을에 은거해 글을 쓰고 있다.

대표적인 소설로는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 상(Booker Prize)을 수상한 <G>, 농민을 노래한 3부작 <그들의 노동에 함께하였느니라 Into Their Labours>가 있고, 평론으로는 <랑데부 Keeping a Rendezvous>, <시각 The Sense of Sight>, <보는 방법 Ways of Seeing> 등이 있다.

김현우 -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옮긴 책으로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 산책>, <웬디 수녀의 나를 사로잡은 그림들>, <두첸의 세계명화비밀탐사> 등이 있다.

장 모르 (Jean Mohr) - 지난 20년 동안 유네스코,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적십자사의 사진가로 일해 왔다. 2004년 현재 스위스 제네바에 살고 있다.

한겨레신문 : 세계 문화예술계 최고의 팔방미인을 꼽자면 빠질 수 없는 이가 영국 출신의 작가이자 극작가, 비평가인 존 버거다. 화가이기도 한 존 버거는 미술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이미지-시각과 미디어>란 책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다큐멘터리 작가와 방송인으로도 활동해왔고, 사회비평가로서도 좌파 진영의 손꼽히는 논객으로 자리매김했다. <결혼을 위하여> 등을 쓴 소설가로도 널리 알려져 해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며, 인간소외와 현대인의 고독감을 잘 포착해내는 수필가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중년 이후 존 버거는 프랑스 알프스산맥 기슭 농촌에 들어가 글 쓰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에 걸쳐있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은 역시 시각 이미지 쪽이다. 사진작가 장 모르가 사진을 찍고 그가 글을 쓴 일련의 연작 가운데 하나인 <행운아>가 최근 출간됐다. 존 버거는 환자들과 진실한 인간적 교감을 시도하며 마을주민들의 보살피려는 영국의 한 시골마을 의사 존 사샬의 일상을 통해 삶의 가치란 무엇인지 묻는다.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총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이 의사가 바로 '행운아'이며 역설적으로 현대인 대다수는 불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역시 존 버거와 장 모르의 공동작업물인 <제7의 인간>과 <말하기의 다른 방법>도 각각 같은 출판사에서 10여년 만에 재출간됐다. <제7의 인간>(차미례 옮김)은 <행운아>처럼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을 통해 현대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으로 1970년대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삶을 그린다.

<말하기의 다른 방법>(이희재 옮김)은 산악지방 농촌마을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사진의 미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찰하는 독특한 에세이풍의 사진이론서다. 7년에 걸쳐 찍은 농부들의 사진 자체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풍성하며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사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존 버거 나름의 답변을 구하는 작업이다. - 구본준 기자 ( 2004-11-13 )

 

69-70쪽

사람들은 사샬이 솔직하고,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기에 편하며, 가까이 있고, 다정하고 이해력이 있으며, 남의 말을 경청하고, 언제라도 필요할 때는 달려와서는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또한 사람들은 그가 분위기 있고, 성과 같은 주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가끔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의사로서 그가 어떻게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해 주는지는 위에서 말한 것들처럼 복잡한 것은 아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의사-환자 관계에 고유한 특질과 깊이를 생각해야 한다.

성직자나 무당 혹은 판관을 겸하기도 했던 원시시대의 의사들은 종족을 위해 식량을 생산해야 할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어다. 이러한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특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지는 권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의사가 해결해 주는 인간의 욕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몸이 아픈 것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알아 가는 과정에서 최초로 지불해야 하는, 어쩌면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불하고 있는 대가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고통이나 불편함을 배가시킨다. 그런데 그러한 인식의 결과로 생겨나는 자의식은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이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자의식에서 치료의 가능성, 약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원시시대 부족민들이 의사의 치료에 대해서 취했던 주관적인 태도를 지금 상상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문화에서 우리 자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자신의 몸을 의사에게 맡기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신뢰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우리는 의사들이 우리의 몸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런 접근은 연인에게만 허락되는 것인데-심지어 연인에게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의사는 완전히 낯선 사람 아닌가?

(장 모르의 사진들 몇 장이 중간에 나온다)

74쪽-75쪽

의사들의 윤리지침은 의사로서의 역할과 연인으로서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 의사와 환자 관계에서의 친밀감의 한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 구분은 의사들이 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원하는 곳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칫 환자와 자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거라는 염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상상력이 결여된 철없는 상상일 뿐인데, 의사들이 환자들을 접하게 되는 상황은 성욕을 감퇴시키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사항을 의사의 윤리지침에 넣은 것은 의사들을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일종의 약속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들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주는 그런 약속 말이다. 그것은 성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육체적인 친밀감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약속이다. 그렇다면 그 친밀감이 의미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어린 시절의 경험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의사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은 스스로 어린이의 상태로 돌아가서, 그 의사를 가족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간에 의사는 가족과 동등해지는 것이다.

환자의 심리가 부모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경우에, 의사는 그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관계에서 성적인 생각들은 진료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몸이 아플 때 사람들은 의사를 큰형이나 언니 정도로 가정한다.

비슷한 일이 죽음에서도 일어난다. 의사는 죽음과 친숙한 사람이다. 의사를 부를 때, 우리는 그가 우리를 치료해 주고, 우리의 고통을 덜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할 때는 그가 우리의 죽음을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지켜보는 행위의 가치는 그가 다른 죽음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 가치는 한때 성직자들이 기도나 의식을 진행하는 것 이외에 가졌던 진정한 가치였다)이다. 의사는 우리와 갖가지 죽음 사이의 살아 있는 중재자인 셈이다. 그는 우리에게 속하기도 하지만, 그 죽음들에 속하기도 한다. 다른 죽음들이 의사의 중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그 힘들지만 실제적인 위안 역시 형제애에서 오는 위안이다. ... 

 

*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논의가 뒤에 시작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레져 2004-11-2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의 이미지를 재밌게 읽었어요. 유익하고, 재밌고~ ! 일단 보관함에 넣어놓을게요 ^^

balmas 2004-11-2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미지] 재미있죠??^^

저는 존 버거 책 중에서는 예전에 열화당에서 나온(맞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를 처음으로 읽었답니다. 그 다음부터 존 버거의 팬이 됐는데,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정말 훌륭한 작가죠.^^

로드무비 2004-11-22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참, 그리고 열화당이 아니고 아트북스예요.^^

balmas 2004-11-2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로드무비님, 제가 말한 건 84년에 나온 책인데요.

그런데 확인해보니까 열화당이 아니라 미진사더군요. 아트북스에서는 작년인가 다시 냈었죠?
 

* 며칠 전에 보니까 푸코가 생전에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와 마르크스에 관해 대담했던 책이 번역되어 나왔더군요.

이 책은 원래 푸코 생전에는 이탈리아에서만 출간되었다가(1981년), 1991년 미국의 "Semiotext(e)"라는 출판사에서 영역본이 출간되었죠. 그 후 1994년에 푸코가 생전에 책으로 출판하지 않았던 논문이나 대담, 서평 등을 묶은, [Dits et ecrits](우리말로 하면 [말과 글]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송이 죽은 뒤에 [Ecrits et paroles]이라는 3권짜리 책이 나왔는데(이 책의 제목은 우리말로 하면 [글과 말] 정도가 됩니다), 이 제목을 약간 변형시킨 셈이죠. 라캉의 [Ecrits]라는 책을 연상시키기도 하구요) 라는 4권짜리 책, 한 권당 무려 800페이지 정도 되고, 판형도 크고 글자도 작은 책이 나오면서 이 대담집의 불어본이 발표가 되었죠.

이번에 갈무리 출판사에서 나온 국역본은 영역본을 번역한 듯한데, 번역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별로 번역하기 어려운 책은 아니니까 특별히 번역에서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제가 이 책을 처음 접한지는 벌써 10년이 넘는데(크아, 벌써 그렇게 됐구나. 그동안 뭐했니 ...-_-;;;), 아직도 이 대담집의 내용 중 일부가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었다는 뜻이죠. 사실 푸코는 생전에 출간한 저작에서는 마르크스에 관해 말을 상당히 아낀 편인데, 이 책에서는 그가 마르크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푸코나 사회이론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매우 좋은 독서거리가 되지 않을까 해서 추천해봅니다. 영어가 별로 어렵지 않으니까,  관심이 있으시면 영역본을 구해보는 것도 좋을 듯 ... ^^

[Dits et ecrits]라는 네 권짜리 논문집에 관해 한 마디 덧붙이고 싶군요. 몇년 전 이 책의 국내 판권을 갖고 있는 출판사 사장에게 이 책의 일부를 편집해서 번역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벌써 영역본을 중심으로 번역하기로 이야기가 돼 있다고 하더군요. 몇년 전에 이 책의 영역본 선집이 나왔는데, 그걸 대본으로 해서 출간하겠다는 거지요. (역자분이 불어를 못한다든가 ...) 이 네 권짜리 책은, 푸코의 저작들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푸코의 상이한 면모를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글들과 대담들이, 정말, 가득 담겨 있는 좋은 책입니다. 그러니 불어본으로 하든 영역본으로 하든 책을 내기로 했으면 잘 내주었으면 좋겠군요. 한번 기대를 해봅시다.  

 

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둣치오 뜨롬바도리, 미셸 푸코 (지은이), 이승철 (옮긴이) | 갈무리

정   가 : 10,000원
판매가 : 9,000원(10%off, 1,000원 할인)
마일리지 : 270원(3%)
2004-11-15 | ISBN 8986114739
반양장본 | 245쪽 | 215*145mm
알라딘 Sales Point : 490
사회과학 주간베스트 94위

 

마이리뷰 (전체 0 |)
마이리스트 (전체 0 |)
밑줄긋기 (전체 0 |)
마이페이퍼 (전체 0 |)
 
포토리뷰 (전체 0 |)
묻고 답하기 (전체 0 |)
 
추천해주세요 (전체 0 |)



1978년 이루어진 미셸 푸코와 둣치오 뜨롬바도리 간의 대담을 엮은 책.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원이자 정통 맑스주의자인 뜨롬바도리와 비-맑스주의적 좌파를 대표하는 푸코의 대화라는 점에서 좌파 내부의 두 관점과 그 관점들 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정통 맑스주의자인 뜨롬바도리의 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지적 형성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1950년대 프랑스의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서 자신이 갖었던 고민들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이론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는지를 말하는 푸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뜨롬바도리의 맑스주의에 맞서 자신의 이론이 현대 사회의 정치적 실천들과 훨씬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는 푸코의 주장 속에서 푸코의 정치학과 들뢰즈, 네그리로 이어지는 탈근대 정치사상과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바로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성전화하는 식의 열광에 반대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열광은 다른 게 아니라, 19세기에 탄생했지만 20세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맑스주의가 가지는 역사적 행운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맑스의 경제적 담론의 규칙들이 19세기의 과학적 담론 형성의 기준이 되는 에피스테메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극악무도한 해우이는 아닙니다. 내게는 많은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이상해 보이는군요. -- 미셸 푸코, 본문 중에서



둣치오 뜨롬바도리 (Duccio Trombadori) -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법철학과 그람시의 정치사상을 연구했다. 2004년 현재 로마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이탈리아 공산당 기관지인 「루니따」지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 작가프로필 보기) - 이성에 대한 확신 위에 구축되어 온 서양 근대사상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인간의 역사를 재구성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그를 두고 '19세기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20세기의 철학자'라고 평했다.

20세기 지성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미셸 푸코의 저작들은 대중적 인기도 높아서, 그가 태어난 프랑스에서 빵집의 '모닝빵'처럼 날개 돋힌듯 팔렸으며,국내에서도 거의 모든 저서가 번역돼 널리 읽혀 왔다.

철학 역사학을 비롯해 문학비평 언어학 정신병리학 임상의학 경제학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 푸코의 작품들은 198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이후, 90년대 들어 집중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20종이 넘는 푸코의 저서와 푸코에 대한 연구서들이 번역 출간되었는데, 한 철학자에 대한 책이 그처럼 짧은 기간에 그처럼 집중적으로 소개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1984년 6월 25일 프랑스 파리의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에이즈로 사망했다.

이승철 - 1980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현재 동대학원 사회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다중네크워크센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말하듯이, 푸코는 그의 삶의 부분들을 공개하기를 꺼려했는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몇 번의 대담에서 푸코는 자신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주고 있다. 특히 <푸코와 맑스>는 푸코 자신의 지적 여정을 보여주는 데 상당부분을 할애한 대담이다. - 디디에 이리봉 (푸코 전기 <미셸 푸코>의 지은이)



한국어판 옮긴이 서문: 미셸 푸코와 경험의 철학, 경험의 정치학
R.J. 골드스타인의 서문: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

1장 '경험-책'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2장 주체, 지식, 그리고 '진리의 역사'
3장 '그러나 구조주의는 프랑스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4장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마르쿠제: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5장 1968년 5월의 '말'과 '사물' 사이
6장 권력에 대한 담론

D.뜨롬바도리의 후기: 혁명을 넘어서

부록 1 지식인과 권력: 푸코와 들뢰즈의 대화
부록 2 선악을 넘어서

미셸 푸코 연보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4-11-12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ika 2004-11-12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이 광고하는 책은 꼭 사서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립니다. 철학은 동녘편집부에서 출판한 철학에세이를 읽은 다음부터 쉬운거야~ 라고 외치다가 요번에 서양철학의 열가지 쟁점이던가? 광고하신 그 책을 덥석 선물로 받아버렸지요. 저같은 사람도 잘 읽어나갈 수 있을까요? ^^

balmas 2004-11-1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출판사 차릴 거예요. ^^;;;

이 책은 정말 별로 어렵지 않은 책이라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릴케 현상 2004-11-1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차리는 모습 보고 싶다^^ 조폭들과 철학으로 싸우는 모습

balmas 2004-11-1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님,

기어이 제가 망하는 꼴 보고 싶으신가요???^^
 

 

아포리아님께



아포리아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죠.


“저기 질문드릴 게 있어서요.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국제주의'에 관한 세미나를 하는데, 이번엔 [We, the People of Europe?]에 나온 8/10번 글을 합니다. 내용이 주로 주권에 관한 거여서 이에 관한 다른 글들도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는데, 저번에 선생님께서 [법의 힘] 후기에서 언급도 하셨고 발리바르도 '잔혹' 관련한 논문에서 인용하길래 아감벤의 [Homo Sacer]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의문이 생겼어요.

제 느낌에 아감벤은 슈미트적인 주권 개념을 특권화하는 것 같습니다(확실친 않지만요...). 반면 발리바르는 보댕적(나아가 루소적) 주권 개념을 상세히 살피면서 그것과 슈미트적 주권 개념 사이에서 쟁점을 만들려 하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근데 그 쟁점이 정확히 뭔지, 또 왜 이런 식으로 쟁점을 만드는지가 잘 안 잡힙니다. 어쨌든 느낌일 뿐이니까요. 제가 주권 문제에 관한 논의 지형을 전혀 모르는 탓도 클 것 같습니다.

결국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주권에 대한 아감벤의 사고와 발리바르의 사고 간에 쟁점이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인지, 한편 서로 통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어떤 것인지 등입니다.”


중요한 쟁점이고, 저도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좀더 체계적으로 검토해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만한 여유가 안돼서 몇 가지 간단한 요점들만 정리해보겠습니다.


  조르지오 아감벤Gio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성스러운 인간] 정도가 될 텐데 이 때의 ‘성스러운’은 보통 말하는 ‘the sacred’와는 상이한 의미이니까 조심해야겠죠―는 알다시피 최근 서구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논의되는 책 중 한 권입니다. 이탈리아어 판본이 1996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이후 곧바로 영어, 독어, 불어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고, 각종 서평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죠(우리나라에서는 [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에 이 책에 관한 소개 논문이 한 편 실려 있더군요). 이 책이 이처럼 화제가 된 이유는 물론 이 책이 지닌 이론적 독창성과 깊이 때문인데요, 아감벤은 정말 놀라울 만큼의 박학과 이론적 정교함, 빼어난 글쓰기 능력을 겸비한 보기드문 철학자입니다. 


[호모 사케르]의 핵심 테제는 아감벤 자신이 요약하고 있듯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배제ban(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이 구분되지 않는 지대로서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다.

2) 주권의 근본 활동은, 원초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zoē와 bios의 접합의 임계(臨界, threshold)로서 bare life의 생산에 있다.

3) 서구의 근본적인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은 도시가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있다.


이 세 가지 테제는 이 책을 이루는 1, 2, 3부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본다면 두 번째 테제에 나오는 bare life의 의미를 해명하는 게 우선이겠죠. 아감벤이 말하는 bare life는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사용한 “blosses Leben”(법의 힘, 164쪽 이하)이라는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아감벤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정치학의 논의와 직접 결부시키죠.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한편으로 “bios”와 “zoē”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법인데, 전자는 인간에 고유한 생명/삶을 가리키고, 후자는 인간, 동물, 신에게 고유한 자연적 생명/삶을 가리키는 용어죠.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bios에 놓여 있다는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를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on hē on”를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1 철학으로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아감벤에 따르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바로 “순수 존재”, 곧 “온 하플로스on haplōs”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여러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삶/생명zoē을 추출해내려는 노력과 “순수 존재”를 분리하려는 노력, 곧 정치학과 형이상학 사이에는 체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감벤은 bare life의 최초의 법적 유래를, 고대 로마법에 나오는 “homo sacer”라는 표현에서 찾고 있습니다. homo sacer는 아감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닌” 사람입니다. 희생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homo sacer에서 sacer가 종교적 의미에서 “성스러운”을 가리키지 않음을 의미하고(말하자면 신의 법에서 배제되어 있는 셈이죠), 그를 죽이는 게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homo sacer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으며(따라서 인간의 법에서도 제외가 된 셈이죠), 그의 삶은 bios가 아니라 zoē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아감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 바로 이 “zoē”, homo sacer가 법적, 정치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근대에서야 비로소 homo sacer의 “bare life”가 정치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감벤은 먼저 영국에서 1679년에 제정된 인신보호법(habeas corpus)이 바로 bare life가 법과 정치의 근본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들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ㆍ이론적 논거는 좀 취약한 편입니다. 아감벤이 좀더 강조하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인권선언]에 담겨 있는 생명정치biopolitique적 함의입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아감벤은 푸코와 아렌트의 작업을 결합하고 있는데, 푸코의 경우에는 생명 정치 또는 생명 권력의 문제설정이, 아렌트의 경우에는 전체주의 비판과 인권 개념의 개조 작업이 문제가 됩니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에 등장하는 “인간”과 “시민”이라는 개념, 특히 “인간”은 인간주의적인 전통이 해석해온 것처럼 천부인권의 담지자가 아니라 “bare life”를 가리킵니다. 곧 [인권선언]은 아무런 특질도 지니지 않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bare life가 정치의 대상이 되었음을 공표한 선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시민들이 누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들은 우선 그들 각자가 인간=bare life로서 주권자의 통치의 대상으로 포섭된 이후에 얻게 되는 특질들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아감벤이 푸코의 생명권력에 관한 작업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지만, 동시에 그의 분석을 변형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수행한 “민족국가의 위기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여기에 결부시킵니다. 아렌트는 1차 대전 이후에 특히 유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민족국가의 위기는 동시에 인권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하죠. 왜냐하면 이처럼 국가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이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시시각각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주의적 전통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 개념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선행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감벤의 [인권선언] 재해석은 아렌트의 이런 통찰(하지만 아렌트가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을 위와 같은 푸코의 생명권력의 문제설정과 연결시시킴으로써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아감벤은 나치즘이 근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돌연변이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잠재력의 표출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아포리아님은 아감벤이 슈미트를 특권화하고 있는 게 아니냐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실제로 그는 실제로 주권에 대한 슈미트의 테제, 곧 “주권자는 법질서 바깥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이 질서에 속해 있는데, 왜냐하면 헌정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테제를 이 책의 첫머리부터 강조하고 있지요. 하지만 아감벤이 이처럼 슈미트의 테제에 주목하는 것은 슈미트의 테제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생명정치의 핵심을 매우 정확히 드러내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권 개념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 슈미트의 주권 개념의 특권화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에 대한 아감벤의 분석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감벤은 우선 나치 강제수용소의 법적 지위의 특이성에 주목하죠. 아감벤이 보여주고 있듯이 강제수용소는 나치 시대에 처음 설치된 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사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단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강제수용소의 설치 및 운용에 관한 사항,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주권자가 국민들의 기본권을 잠정 중단시키고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사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나치 수용소의 경우는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가운데 강제수용소를 설치, 운용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나치는 1933년 정권을 장악한 이후 공포한 “국민과 국가의 보호에 관한 법령”에서 예외상태에 관한 명시적 규정이 없이 기본권을 유예시키고 있지요.


그런데 아감벤에 따르면 이는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로운 점인데,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1) 이처럼 명시적인 규정 없이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예외상태에 돌입함으로써,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하게 됩니다. 바이마르 헌법이 규정하는 예외상태는 정확히 헌법이라는 정상적인 법적 규범에 따라 자신의 효력을 얻게 되는 반면, 나치 법에서는 법적 규범에 대한 준거가 없이 예외상태가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이에 따라 예외상태는 실질적으로 법질서 자체가 되는데, 이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총통)의 결정에 따라 직접 성립하기 때문에, 이제는 단지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법과 사실 사이의 구분도 소멸하게 됩니다. (3) 하지만 아감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치의 특이성, “예외성”은 사실은 전혀 예외가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성립 이래 존재해온 잠재적 경향의 발현이라는 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감벤은  zoē와 haplōs 사이의 내적 연관성과 고대 로마법에서 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고 있는데, 나치가 정상화된 예외상태 속에서 설립한 강제수용소는 이를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주권자(총통)의 권력은 기본권-인권의 “금지”와 이질적인 존재들의 “추방”의 권력, 곧 ban의 권력이며, 이를 통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일체의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한낱 몸뚱아리로 환원되어, 그를 살해한다고 해서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성스러운 인간들”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강제수용소, 곧 camp는 bare life가 정치의 대상으로 출현하는 장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나치의 유대인수용소나 소련의 정치범수용소 같은 데 국한되는 게 아니라, 훨씬 보편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아감벤은 프랑스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난민 신청자들을 임시 수용하고 있는 장소 역시 일종의 camp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공식적인 법적 기관(경찰이 되었든, 외무성 직원들이 되었든 간에)에 넘겨지기 전까지 이 사람들은 “예외상태” 속에서 어떤 법적 지위나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bare life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이 정도가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대략적인 논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나 그 외 다른 글들에서 수행하고 있는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은 아감벤과는 상이한 이론적 전제와 지향점들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아감벤과는 좀 다른 결론들에 도달합니다. 우선 두 사람은 지향점이나 스타일 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지요. 아감벤이 정치적인 쟁점들을 매우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으로(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감벤은 벤야민보다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듯합니다) 다루고 있는 데 반해, 주지하다시피 발리바르는 이런 문제들을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다루는 것을 매우 꺼리는 편이죠. 발리바르는 실천적인 문제들에 관한 자신의 이론적 작업들(예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개조였다면, 최근에는 민주주의와 정치 개념 일반의 개조와 전환이 중심 주제겠지요. 물론 이 양자는 모두 역사 유물론의 전환/개조라는 일반적 문제설정 속에 포함되겠지요)을 늘 논의의 중심에 놓고,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필요한 한에서 형이상학적이거나 논리적인, 또는 좀더 ‘순수 철학적인’ 주제들을 별도로 다루곤 합니다. [Nous, citoyens d'Europe?](2001) 또는 이 책의 영어판본인 [We, the People of Europe?]도 이런 경향을 썩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이 책의 두 장에 걸쳐 주권에 관해 치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아감벤에 비하면 논의의 범위가 매우 분명하게 한정되어 있죠.   


  논의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특히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합니다. 곧 발리바르의 경우 논의의 지평을 근대성, 곧 장 보댕 이후에서 칼 슈미트를 거쳐 유럽 연합의 구성에 이르는 시기로 한정하고 있는 데 비해(물론 그리스의 politeia 개념에 대한 분석이 잠깐 나오긴 합니다만), 아감벤의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더 나아가 헤시오도스에서부터 슈미트, 벤야민, 데리다, 네그리에 이르는 서양 철학의 전역사를 자신의 논의의 범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감벤이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는 bare life가 주권, 곧 정치의 근본 대상이 됨으로써 근대성이 근대성으로서 구성되는 양상에 있지만, 이러한 구성의 개념적, 형이상학적 기초를 희랍철학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매우 광범위한 구도를 설정하고 있고, 이 때문에 자칫 목적론적이거나 종말론적인 쪽으로 빗나갈 소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감벤 입장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논의는 좀 지엽적인 문제들에 경도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군요.^^


  발리바르의 주권 개념 분석은 이중적인 출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세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연히 유럽 연합의 구성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본다면 소위 “민족국가의 위기”가 그 출발점이 되겠는데, 발리바르가 여기에서 문제삼는 것은 소위 “주권론자들”과 “유럽론자들” 사이의 추상적 대립입니다. 이러한 대립은 주권의 유일한 담지자를 민족, 민족국가로 한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권 개념을 법적 개념으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불모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관점에 따르면 주권이란 무엇보다도 국가의 독립적인 정치적 권리를 지칭하는 게 되고, 따라서 이러한 권리가 법적으로 올바르게 대표되고 적법하게 행사되는 절차에 대한 분석이 주요한 과제가 되겠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국가 주권의 기초로서 인민 주권이라는 문제가 제대로 제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권의 한계를 구성하는 국경/경계(frontière) 개념이 하나의 이론적 문제로 제기되지 못하고 맙니다(경험적이거나 실천적 문제로는 제기될 수 있겠지만).

 

  따라서 실천적 출발점은 발리바르의 이론적 출발점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발리바르의 주권 개념은 그가 제시하는 민족 형태form nation 개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발리바르는 고전적인 역사유물론의 한계 중 하나를 민족 개념에 대한 이론적 분석의 부재에서 찾고 있죠. 마르크스에서 알튀세르에 이르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 위에서 상부구조 또는 국가를 규정하거나 도출하려는 이런저런 시도들을 역사유물론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이해했지만,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항상 민족 형태를 매개로, 또는 민족 형태로서 존재했다는 거지요. 따라서 민족 또는 민족 형태는 자본주의 개념 자체로부터 연역이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자본주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바로 민족 형태라는 점에서 역사적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 형태는 근대 정치의 제도적 틀(보통 민족국가라고 불리지만 발리바르가 좀더 엄밀하게 “사회민족국가”라고 부르는)이 구현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개인성/주체성이 형성되는 장소라는 점에서도 역시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 필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민족 형태는 경제와 정치, 이데올로기(또는 상징 구조)라는 세 가지의 심급 내지는 인과성이 상호 작용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겠죠.  


  민족 형태라는 개념이 주권 개념 분석에 대해 지니는 의미는 국가 주권과 인민 주권의 상호 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좋은 이론적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민족 국가는 주권 개념이 지닌 이중적 측면(인민 주권과 국가 주권)의 모순적 통일체인데, 인민이라는 추상적인 정치 개념이 구체적/제도적으로 실현된 형태가 바로 민족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이처럼 인민을 국민으로 형성/포섭(또는 호명)함으로써 근대의 정치 제도가 자신의 인간학적/주체적 기초 위에서 제도적 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과정에 대한 분석은 세 측면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 개인-주체의 형성/호명이 어떻게 민족 형태를 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 (2) 집합적인 봉기적ㆍ변혁적 주체로서의 인민이 국민/민족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 (3) 자본주의적 경제가 작용하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로서 영토가 민족국가에 의해 전유되는 방식 및 이것이 국경의 문제와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가 그것들입니다. 


첫 번째 측면은 민족 형태 개념에 기초해서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을 구체화하려는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개인들의 주체들로의 호명을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본질적 기능을 간주했는데, 발리바르는 이러한 호명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 준거가 바로 민족이라고 보는 거지요. 다시 말해 근대는 처음으로 개인으로서의 개인, 또는 추상적 개인이 발명된 시대인데, 이 개인은 그 이전까지의 일체의 소속, 곧 가족이나 친족의 구성원이나 특수한 신분이나 지위의 보유자라는 정체성들identités(근대 이전의 개인들은 이러한 구체적 소속들에서 얻게 되는 정체성들에 따라 규정되었지요)과 독립해서 바로 개인 자체로서 고유한 지위와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적 개인에게 일차적인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바로 민족입니다. 각각의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 한국인 등등으로 정체화되고, 이러한 정체성/동일성 위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차적인 소속/정체성들을 얻게 되지요. 따라서 발리바르의 관점에 따르면 개인의 발명과 민족국가의 탄생은 (시간상으로가 아니라면 적어도 구조적으로) 항상 같이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민족주의를 좁은 의미(또는 통용되는 의미)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것 자체는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근대 민족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은폐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는 특히 서양인들에게 고유한 편견 내지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서구 선진국들은 이미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에 횡행했던 민족주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으며, 20세기 후반기 이후 민족주의는 제 3세계나 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프랑스에 고유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서 “공화주의적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지적하지요. 곧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 이래 다른 민족/국민과는 달리 늘 보편적 대의를 추구해왔다는 거지요.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 때문에 위험하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프랑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자신들의 고유한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민족은 항상 보편적 상징 위에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러한 민족(주의)적 보편성은 외부의 다른 보편성들만이 아니라 내부의 이질적인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보편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더욱 더 위험한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두 번째 주제, 곧 집합적인 봉기적ㆍ변혁적 주체로서의 인민이 국민/민족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주지하는 것처럼 (서양) 근대의 상징적 모체는 [인권선언]에서 표현된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입니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특수한 속성, 곧 계급, 신분, 국적, 인종, 나이, 성별에 관계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에 의해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은 누려야 하며, 반대로 인간이 누려야 할 이러한 권리들은 집합적인 시민의 활동의 결과이며, 또 항상 그러한 활동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인 셈이죠. 그리고 이 때 시민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명칭이 바로 인민people인데, 인민은 두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민들 전체라는 총칭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둘째는 소수의 특권 계급이나 지배층과 구분되는 기층민중 또는 다중multitudo 및 더 나아가 약소자, 소수, 불량배들 등과 같이 기존의 질서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지요. 그리고 발리바르 자신은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의미의 인민 개념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곧 시민들의 총칭으로서의 démos와 이것이 함축하는 대중 또는 다중polloï이 그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와 아감벤 사이에는 bios/zoē라는 개념쌍과 démos/polloï라는 개념쌍의 차이가 놓여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아감벤 자신은 bios와 zoē의 관계가 인민 개념의 두 가지 측면 사이의 관계와 상동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양자 사이에 과연 이러한 상동성이 성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지나치는 김에 지적하자면,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bios/zoē라는 개념쌍은 아감벤의 주장과는 달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렇게 명시적인 대립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지나치는 김에) 지적하지요. 대신 데리다는 démos/polloï라는 개념쌍에 좀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점은 인간과 시민은 그 자체로는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개념들이 구체적인 현실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적인 매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제도적 매개의 근대적 형태가 바로 민족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데모스demos로서의 인민은 다시 에트노스ethnos로서의 인민, 곧 민족으로 분화됩니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인민의 종족화ethnicization of the people"라고 부르죠. 곧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하지만 사실 이 때의 인민은 그 자체가 이미 폴로이, 곧 다중으로서의 인민과 긴장 관계에 놓여 있고 그와 분화된 인민입니다)이 한 국가의 성원으로 소속되는 것은 동시에 이 인민을 상상적인 과거 역사 속에 기입하는 작용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상상적 기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통일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소급 작용을 통해 근대 민족 국가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역사적 실체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각각의 성원들을 호명/통합/재생산하는 활동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민족은 내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은 한편으로는 인민이 나타내는 보편적인 시민성의 구현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성을 실현하기 위해 외적, 내적 통합 및 배제의 작용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민의 권리에 대한 계급적, 성적, 인종적 차별 및 제국주의적 활동 및 투쟁은 민족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내적 갈등/괴리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겠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almas 2004-11-04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 아포리아님에게 논문 한 편을 써야 이 문제에 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했는데, 제대로 이야기를 못한 가운데, 글의 길이는 거의 논문 한 편에 가까운 분량이 되어 버렸군요.-_-;;;
글이 제대로 정리가 안돼서 사실 올리고 싶지 않은데(문장들도 어색한 데가 많은 듯;;;), 지금 안 올리면 언제 올릴 수 있을지 몰라서, 그냥 무턱대고 올립니다. 행간의 뜻(???)을 잘 읽고 이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2-3쪽 정도 되는 2편이 아직 남아 있는데, 예의 "다싫기쓰글" 바이러스 때문에 2편을 언제 올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Shimba에게는 이 글이 간접적인 답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메일을 한 번 줘.

aporia 2004-11-0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 (무식해서) '용감한' 물음에 이렇게 상세하게 답해 주시니 죄송함을 넘어 부끄러움마저 느끼게 됩니다. 다른 일도 많으신데 너무 폐를 많이 끼친 것 아닌지 걱정이네요. 하지만 다른 많은 분들께도 큰 도움이 됐을 것 같고 또 선생님도 한번 정리하실 생각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면서, 애써 죄송함을 덜어보려고 합니다...
이게 더 귀찮게 해 드리는 건지, 아니면 선생님의 노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 잘 구별은 안 됩니다만, 저 나름대로는 후자 쪽에 좀더 무게를 두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번에 말씀드렸듯 저같은 경우는 발리바르의 이번 글을 이해하려고 하던 중 도움이 될까 해서 아감벤의 글을 봤고, 그가 주권 문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푸코적인 '생명정치'(아마 발리바르의 '인간학적' 접근과 통할)를 언급하고, 게다가 제가 볼 때 최근 발리바르가 말하는 '잔혹' 및 '경계/국경'(저는 아감벤이 '수용소'라고 말하는 것이 발리바르적인 경계/국경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등과도 직결되는 듯한 언급을 보고서 아감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니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하여튼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단점'들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일단 그건 '스타일'의 문제(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번에 제가 '슈미트'와 '보댕-루소' 간의 차이라는 말로 어렴풋이 지시하려던 것도 실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 도식적으로 얘기해 보자면 아감벤이 정상성의 '이면'으로서 주권을 말한다면, 발리바르는 정상성의 '토대'로서 주권을 말하는 것 같아요. 이때 후자는 전자가 말하는 계기를 '잔혹'이라 부르고 이를 '주권의 실패' 상황에서 벌어지는 말 그대로 '예외상태'로 보는 것 같구요.
사실 이 점은 푸코의 생명정치에 대한 각자의 수용방식과도 관련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푸코를 잘 모르긴 하지만, 아감벤의 논의를 보면서는 푸코와는 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이 푸코의 생명정치와 훨씬 더 친화적인 것 같아요(물론 발리바르는 푸코와 달리 '상상의 특수한 보편화' 즉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중시하니까 이 점에서 생명정치 안에 한층 더한 모호함을 기입할 것 같지만요). 반면 아감벤이 여기서 생명정치의 주요 계기로 이르는 것을 발리바르는 차라리 '부정적 생명정치'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던 기억도 잠시 나네요. 이는 제가 양자의 관심 상의 차이점을 과도하게 벌려놓는 것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아감벤이 주권(추방/배제라는 의미에서)을 고대 서양에서부터 시작되는 정치의 원초적 계기(물론 근대 특히 나치적인 실천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로 파악하는 반면, 발리바르는 주권을 최대한 근대적인 구성물로 국지화시키면서 그것의 '대체보충'(완전히 우연적이지 않지만 또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는 의미에서)으로서 민족형태 및 국경/경계 제도를 분석하고 있다는 식으로요. 이렇게 볼 때 전자에게 주권은 기본적으로 잔혹하거나 최선의 경우라도 (푸코적인 의미에서) '권력'(발리바르가 말하는 '상상의 특수한 보편화'라는 계기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에 불과한 반면, 후자에게 주권은 국가주권과 인민주권 간의 내적 갈등이 관통하고 있고 또 그 대체보충으로서 민족형태 및 국경/경계 제도로부터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환원될 수도 없고 따라서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실천(예컨대 인민주권의 실천)을 허용할 수 있게 되겠지요. 사실 이는 제가 아감벤을 처음 읽고 나서 든 느낌을 나름대로 문자화해보려 노력한 것인데, 그때 전 그렇다면 주권 개념을 (개조를 전제로 하겠지만)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니냐 고 느꼈고 이는 제가 발리바르 독서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정리는 잘 안 되는군요. 사실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번 글에서 (3)이라고 말씀하신 부분, 결국 주권과 국경/경계 부분의 관계를 설명해 주시면 좀더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발리바르의 국경/경계 개념과 아감벤의 '수용소' 개념 간에 어떤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지, 발리바르는 슈미트를 어느 선까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느 선에선 어떤 식으로 분명하게 거리를 두는 것인지, 국경/경계와 '잔혹'은 어떤 관계이며 만일 내재적인 연관을 설정할 수 있다면 이런 '비정상성'이 '정상성'과 맺는 관계는 어떤 것인지(그리고 이 점에서 아감벤이 설정하는 식의 관계와 쟁점이 있는 것인지) 등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 일요일이 세미나인데 지금대로라면 저부터가 정리가 전혀 안 되서 논의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복잡해져 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제 질문 자체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일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걸 지적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만일 몇 가지 측면에서 얘기해 볼 만 하다면, 선생님 시간 되실 때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hoyami 2004-11-0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h my God, so you expect me to understand all this? I'll take it as a very long and sophisticated way to say "No, I'll never write to you back"... T.T

Let me rephrase my previous letter this way: so you and all the brilliant "Hahc-Ja" seem to consider a nation as an imagined community. But I guess that you were really into the soccer matches during the World Cup 2002 just like any other people. So what would you call this fanatic kind of passion to go for the Korean team no matter what? What made you go crazy over the victories just like anyone else, when you so much believe in this cool and scientific kind of defnition of nation? Oh I really hate to write in English... Is my message clear enough? You see what I mean? If not, please use your imagination...

balmas 2004-11-05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미안, Shimba. 내가 메일 한번 보낼게.

아포리아님은 "행간"을 잘 읽으셨군요.

아마도 너무 잘 읽어서 질문이 더 많아진 듯한데,

당분간 답변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세미나, 토론에서 좋은 성과를 얻길 바랄 뿐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국역본이 드디어(!!) 출간되었군요. [형이상학] 전체의 번역이 아니라 발췌 번역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에 따라 본문을 번역하고 해설과 주석을 붙여 놓아서, 전공하지 않는 분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더 편할 듯합니다.

어쨌든 서양 철학의 거대한 발원지 중 하나인 [형이상학]이 국내에 소개되어 더할 수 없이 기쁘군요. 조만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명제론]도 이제이북스에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서양 고전학을 전공하는 분들이나 철학도들에게는 매우 기쁜 가을이 아닐 수 없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주요 본문에 대한 해설.번역.주석
조대호 (지은이)

 


 

 

 

 

 

소개글
서양철학사의 고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소개하는 안내서. <형이상학>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물음들, 있는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있으며, 그것들의 궁극적인 근거는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을 중점적으로 다룬 고전이다.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모아 후대의 편집자 안드로니코스가 붙인 'ta meta ta physika', '형이상학'이라는 말의 의미와 사용 경위를 추적하고 <형이상학>의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또한 주된 내용에 따라, '존재론, 제일 철학, 신학', '존재론과 실체론', '<형이상학>과 신학'의 세 장으로 나누어 <형이상학>의 본문을 번역, 해석하고 주석을 덧붙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핵심은 실체(ousia)에 대한 이론이다. 실체는 있는 것들 가운데 첫째로 있는 것(proton on)이요 다른 것들은 모두 그것에 의존해서 있기 때문에, 있는 것에 대한 탐구는 실체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기본 관점이다. 그런 뜻에서 <형이상학> Ⅶ권 1장, 1028b2-7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탐구 대상이 되고 언제나 의문거리인 것, 즉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니......, 우리는 가장 많이, 가장 먼저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그런 뜻으로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 본문 88쪽에서

저자소개
조대호 -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 현재 연세대학교 철학과 조교수로 있다.

작가의 말
서양 철학을 받아들인 한 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날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수용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있는 셈이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서양 철학 수용의 깊고 넓은 틈새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이런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 <형이상학>을 올바로 소개하려면 책 전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이 일을 하려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겠기에 그 준비 작업의 하나로서 이 주해서를 꾸미게 되었다. - 조대호



 책속으로


차례

역해자의 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1.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삭항>: 이름과 내용
1. ta meta ta physika와 형이상학
2. <형이상학>의 내용

2. 존재론, 제일 철학, 신학
1. 지혜: 보편적인 첫째 원인과 원리들에 대한 앎
<형이상학> Ⅰ권 1장-2장
2.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탐구하는 학문
<형이상학> Ⅳ권 1장-2장(부분)
3. 자연학, 수학, 제일 철학
<형이상학> Ⅵ권 1장과 ⅩⅠ권 7장

3. 존재론과 실체론
1. 실체의 일반적 본성과 종류
<형이상학> Ⅶ권 1장-2장
2. 실체와 기체
<형이상학> Ⅶ권 3장
3. 실체와 본질
<형이상학> Ⅶ권 4장-6장
4. 실체와 생성
<형이상학> Ⅶ권 7장-9장
5. 본질과 정의
<형이상학> Ⅶ권 10장-11장
6. 본질과 정의: 정의의 통일성
<형이상학> Ⅶ권 12장과 Ⅷ권 6장
7. 실체와 보편자
<형이상학> Ⅶ권 13장-16장
8. 실체: 존재의 원인
<형이상학> Ⅶ권 17장
9. 가능성과 현실성
<형이상학> Ⅸ권 6장(부분)과 8장

4. <형이상학>의 신학
1. 영원한 원동자의 존재와 작용
<형이상학> ⅩⅡ권 6장-7장
2. 신적인 정신: 사유의 사유
<형이상학> ⅩⅡ권 9장
3. 선의 원리와 자연 세계의 질서
<형이상학> ⅩⅡ권 10장

참고 문헌
찾아보기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4-10-2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이북스가 서광사의 뒤를 잇는군요

balmas 2004-10-2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를 이을지는 좀더 두고봐야죠.
서광사는 20여년 동안 수백권의 책을 낸 곳인데 ...

瑚璉 2004-10-2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렇게 살 책이 많아지면 곤란한데요 (-.-;).

balmas 2004-10-2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호련님,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그래도 좋은 책은 ... 어쩔 수 없죠???
새벽별님, 조대호 씨는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이고,
제가 듣기로는 외국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좋은 연구자라고 하니까
믿고 구입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째 책 외판원 같은 느낌 ... ㅋ)

MANN 2004-10-3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드디어...;;

...몇 년 전, 수능 보고 나서 아리스토텔레스 읽어 볼까하고 서점을 뒤져 보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이 거의 없다는 것에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떠오르네요.
이름은 못 들어 본 사람이 없을 듯한 유명한 철학자인데 정작 책은 없다는 게...

반가운 일이네요. ^^

balmas 2004-10-3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한번 사보라구. 나 학부 다닐 때는 희랍철학 관련해서는
정말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는데, 앞으로는 점점 더 번역도 많이 나오고 좋은 연구서도
많이 나올 것 같아. 반가운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