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가 타계한 뒤 지난 열흘 동안 4개의 추모글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국내에 데리다 전문가가 드물다보니 저같은 문외한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군요. 오늘 마지막 글을 써보내면서 일단 한숨은 돌렸는데, 급하게 여러 편의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고 중첩되는 내용들도 좀 있고 해서, 후련한 게 아니라 꺼림칙합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주제로 여러편의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까 ... -_-;;;

그 글들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분량도 많은 것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가을산님이 데리다 번역본들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절이 좀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만간 보충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지난 10월 8일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철학자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는 프랑스가 배출한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인물이지만, 국내에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始祖)이자 매우 난해한 책들을 쓴 철학자라는 것,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매우 특이한 철학 사조를 창안했으며,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일 국내의 신문들이 쏟아내는 추모 기사들, 때로는 상생(相生)의 철학자로, 때로는 ‘반골 철학자’로, 또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그를 치켜세우는 기사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길래 지성과 사상에 인색한 국내의 신문들이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그를 추모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

 

데리다는 난해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라는 얼마간 그릇된 제목으로 번역되곤 하는) 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곧 음성이야말로 참다운 매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루소,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론: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서의 정의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전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ㆍ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의 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에서 이러한 유령들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하며,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그렇다면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간주하거나 생뚱맞게 상생의 철학자로 치켜세우는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처럼 엉뚱한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작들 중 제대로 번역된 책들이 매우 드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8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들 중 10 종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심지어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데리다 특유의 현란한 언어유희나 섬세한 논의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삶이란 저작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 데리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박탈당한 유령, 환영이었던 셈이다.

  빼어났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데리다는 실제로 유령, 망령이 되어 그의 저작들, 그의 기록들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서 허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쫒는 대신, 데리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그의 기록들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부름에 귀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작품들

 

 데리다는 80여권의 저서 및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수백편의 논문들 및 인터뷰 등을 남겼을 만큼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국내에 번역된 책도『입장들』(솔, 1991)『마르크스의 유령들』(한빛, 1996),『다른 곶』(동문선, 1995),『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시네 퐁주』(민음사, 1998),『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 등 10여종이 훨씬 넘고, 그에 관한 해설서도 여러 권 나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들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비전공자들이 마구잡이로 번역하곤 해서 대부분의 데리다 저서들이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번역도 괜찮고 읽을 만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상당히 난해한 데다가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데리다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입장들』은 초기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며, 『에코그라피』는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개관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리고 『다른 곶』『법의 힘』『테러 시대의 철학』은 유럽 공동체, 법과 정의, 테러와 민주주의, 주권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데리다의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이다. 

  데리다 해설서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는 데리다 사상 전반을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이며,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니체, 하이데거 철학과 데리다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데리다 철학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및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을 추천할 만하다. 좀더 쉬운 입문서를 원하는 독자들은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 2003)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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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는 읽었어요~하하하(우쭐, 해도 되는 건가?)
혹시『시네 퐁주』(민음사, 1998)는 번역에 문제가 많나요?(문제가 많으면 좋겠다-_-) 제가 퐁주를 좋아해서 예전에 읽어보려고 시도했다가 장렬히 전사한 적이 있어서...

에레혼 2004-10-2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리다를 추모할 권리는 하나도 없지만...ㅠㅠ
그래도 데리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오래 전부터 그의 저명한 이름만 알고 정작 그를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과 추모의 마음을 가졌었지요

이 글, 찬찬이 읽고 님이 추천한 입문서부터 하나씩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제 방에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 봐도 될까요?

balmas님, 첫인사를 이렇게 드리네요

2004-10-21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4-10-2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퍼가기 미안해서....

3910033

어느새 1만이 넘으셨네요.


biosculp 2004-10-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인데요. 철학을 전공한분인 강유원님의 사이트에서 이런글을 쓰셨더군요.

언젠가 데리다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학생이 있었다.
초록 발표회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데리다를 학적 연구의 주제로 삼을 수 있을까. 요즘
프랑스에서 나온 것들은 일견 에쎄이 수준 아닌가."

"프랑스가 수필의 전통이 깊지 않습니까"

"하긴 빠스칼부터..."

"에쎄이"를 연구해서 논문을 쓰는 이들을 보면
꽤 오래 전의 이 대화가 떠오르곤 한다.

이 분은 헤겔로 학위하셨던데 독일과 프랑스의 학풍이 다른것인지. 독일철학자들을 전공하신분들은 요즘 프랑스철학자들에게 사시눈을 뜨는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balmas 2004-10-2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biosculp님, 제가 그런 말에 대해 굳이 논평을 해야합니까?^^
'철학 동네'에 있다 보면 그 정도 이야기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데,
대개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하는 이야기들이니 거기에 정색 하고 나서서
뭐라고 대꾸한다는 게 그렇죠.
더욱이 제가 직접 듣거나 본 이야기도 아니고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다가
강유원 씨는 이름은 여러번 들어봤지만 글은 별로 읽어보지 못해서
가타부타 함부로 말하기가 무엇하군요.
말씀하는 걸 보니 강유원 씨는 헤겔로 박사논문을 쓰고
아마 프랑스 철학사까지 꿰뚫고 계신 분 같은데,
직접 가셔서 궁금한 점을 여쭤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balmas 2004-10-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주인에게만 말씀하신 분께는, 좋은 점을 지적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데리다에게 관한 제 (독자적인) 견해를 물으셨는데, 아직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 할 만한
견해를 밝힐 수 있을 만큼 데리다를 잘 알고 있는 처지도 아닌 데다가,
데리다는 일단 좀더 정확히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그나마 갖고 있는
약간의 견해도 아껴두고 있는 형편이랍니다.
우선 읽을 만한 주요 저서들이 네댓 권은 되어야 데리다에 관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생각입니다.
어쨌든 님 덕분에, 앞으로 데리다에 대한 제 견해를 세워봐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네요.^^
앞으로도 좋은 말씀 좀 많이 해주세요.

balmas 2004-10-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자명한 산책님과 라일락와인님, 가을산님께 답글다는 걸 잊어버렸군요.
자명한 산책님, 저도 [시네 퐁주] 번역본은 조금 읽어보다가 말았는데, 번역이 별로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더군요. 이 책 자체가 언어유희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워낙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책입니다. 좀 위안이 되셨나요?^^
라일락와인님은 처음 뵙는군요.
퍼가신다면 저야 고마울 따름이죠, 뭐.^^
앞으로 종종 뵙기를 ...
가을산님, 글쎄 어느덧 조회수가 10000회를 넘어버렸네요. 1만회에서 이벤트를 하나 할까
했는데, 요즘 경황이 없다 보니, 좀 미뤄야 될 것 같네요.
어쨌든 캡처도 해주시고 고맙습니다.^^

2004-10-22 0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나나 2004-10-2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글이었지만 내공이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 balmas님께서 나중에 꼭 좋은 데리다 연구서를 하나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강유원 선생님이라는 분의 이야기는 그분의 뛰어난 학식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더 황당하네요. 그분과 대화를 직접 나누어 보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balmas님의 데리다 해설은 초기 저작 부터 후기의 윤리 정치적 저작까지 다 포괄적으로 그 핵심을 설명해주고 있어 앞으로의 balmas님의 작업에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번역 글 부탁드립니다.

2004-10-22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10-2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어계신 분이 또 한 분 오셨군요.^^
[글쓰기와 차이](동문선)은 [불량배들]보다는 낫지만 같은 동문선에서 얼마 전에 나온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보다는 못한 수준입니다. 답답하겠지만 원서나 영역본 같은 책을 놓고 같이 읽는다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목소리와 현상]은, 한 달여 전에 [단상들]에서 한번 말한 적이 있지만, 프랑스에 유학중인 제 후배가 지금 번역하고 있습니다. 초판 번역은 다 끝나서 지금 교열을 보고 있는 중이니까 내년 중에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은 읽기 쉽게 써놓은 책이지만, 논변이 좀 단순하고 느슨한 편이죠. 그러니 이런 책을 굳이 번역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야 우리도 충분히 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데리다에 관한 해설서를 번역한다면, 그 책보다 훨씬 좋은 책들이 더 많으니까 그런 것들을 번역해야죠. 제 생각에는 Geoffrey Bennington과 Derrida가 공저한 [Jacques Derrida]야말로,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책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데리다 해설서는 당분간은 지금 나온 몇 권의 책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데리다의 대표적인 저작들이 먼저 번역되(고 개정되어)야 할 듯합니다.

나나나님은 처음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가쉐 교수에게 배우고 계신다구요? 가쉐 교수에게는 모든 데리다 연구자들이 큰 빚을 지고 있죠. 언젠가 사진으로 봤더니, 백발의 수염이 덥수룩한 게 도인같은 풍모를 풍겨서 좀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가쉐 교수처럼 세련된 글을 쓰는 양반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이야 ...^^
격려의 말씀은, 앞으로 번역을 좀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알겠습니다. 아야!
ㅋㅋ

딸기 2004-10-2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이 글 허락도 없이 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www.ttalgi21.com)에 퍼갔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데리다의 ㄷ의 한 획도 모르는 제가 '테러시대의 철학'을 서평이랍시고 써서 발마스님께 보인 걸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자판을 두드리는 저의 손을 덜덜거리게 만드는군요.

balmas 2004-10-24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허락도 안받고 옮기시면 안되는데 ...

딸기 2004-10-24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안 되는 거였나요?
그럼... 원고료를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엔화 결제도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 카드...
...크리스마스 때 카드 보내드릴께요...

허락없이 퍼가놓고 농담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퍼가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얘기해주세요. 지울께요.

balmas 2004-10-24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 퍼가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렇지만, 굳이 원고료를 주시겠다면 사양하진 않습니다. ㅋㅋ
 

지난 10월 10일 미국의 [뉴욕 타임즈]에 Jonathan Kandell이라는 자유기고가가 쓴 데리다 부고기사가 실렸습니다. [난해한 이론가 데리다, 74세로 사망 Jacques Derrida, Aastruse Theorist, Dies at 74]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은, 공정한 정론지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뉴욕 타임즈]의 위상에 전혀 걸맞지 않는 글이었습니다. 이 필자는 철학에 거의 문외한인 데다가 데리다를 싫어하는 미국 우파 지식인들의 편견을 공유하는 인물이어서,  글 전체가 비아냥과 조롱투의 문장들로 가득차 있더군요. 이런 글을 부고기사로 실은 신문도 문제거니와, 저명한 인물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간에 방금 사망한 사람을 위한 기사에 그런 류의 내용을 실은 기고자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간 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군요. 미국의 저명한 지식인들, 대학교수들, 작가들, 영화제작자들, 대학원생들이 이 부고기사에 반대하여 항의 사이트를 만들고, [뉴욕 타임즈]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파문이 커지고 있는 듯합니다.  영국에서도 테리 이글턴이 [가디언]에 데리다 사망 이후 촉발된 영국의 일부 지식인들의 "속물적이고" "얼빠진" 반응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군요.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주소로 가시면 [뉴욕 타임즈]에 실렸던 원래의 부고기사와 이 기사에 항의하는 사이트 및 항의 서명자들 명단, 테리 이글턴의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뉴욕타임즈] 부고기사

http://www.nytimes.com/2004/10/10/obituaries/10derrida.html?ex=1098072000&en=185f90b5481cdce6&ei=5006&partner=ALTAVISTA1

항의 사이트

http://www.humanities.uci.edu/remembering_jd/

 

테리 이글턴의 기사

http://education.guardian.co.uk/higher/artsandhumanities/story/0,12241,1327932,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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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딸기 2004-11-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네요. 뉴욕타임스 부고기사는 굉장히 수준이 높은데, 유독 데리다의 부고에서 그런 일이 빚어졌다니요. 저는 뉴욕타임스 부고기사를 예전에 꼼꼼히 봤었는데, 뉴욕타임스는 다른 것도 다 수준 높지만 과학기사하고 부고기사가 특히 빛났었거든요. 우째 저런 일이.
 

자크 데리다라는 유령의 죽음

 

  자크 데리다가 10월 8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는 국내외의 신문보도를 접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언제 살아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는 늘, 적어도 우리에게는, 유령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던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는 유령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는 매우 당혹스러운, 거의 모순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죽음은 유령의 죽음, 결코 살아 있는 존재인 적이 없었던 한 유령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 이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기는 한 것일까?

  사실 유령이라는 주제는 그의 초기 저작부터 일관되게 지속된 주제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글쓰기”라고 다소 부적절하게 번역되곤 하는)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소쉬르,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였으며, 따라서 기록은 현전의 형이상학의 유령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모든 기록은 항상 “나”라고 말하는 주체의 부재, 주체의 죽음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곧 내가 어떤 것을 쓸 때, 내가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무언가를 기록할 때, 나는 항상 부재하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생각, 나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대체보충”의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기록하는 순간, 원칙적으로 나는 이미 나의 부재의 가능성, 나 자신의 유령화의 가능성을 기록 안에 구현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주체는 항상 자신의 유령 속에서, 또는 유령으로서 실존하는 것이다.

  80년대 말 이후 이 유령에 대해 해체 불가능한 정의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데리다는 윤리ㆍ정치적인 주제로 유령론을 확대했다. 유령은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전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현전의 형이상학의 범주들을 초과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자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으로 출몰한다. 데리다에게 이 타자들은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과 다르지 않은데, 그는 이러한 타자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데리다는 또다른 유령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라는 환영으로 기억되고 있다. 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남긴 외상을 치유하기 위해, 또는 오히려 은폐하기 위해 홀연히 등장한 실체 없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사실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데리다는 경탄과 찬양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불신과 의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때로는 경박한 유희꾼으로, 또 때로는 유사파시스트로 그를 의심했고, 좌파쪽 사람들은 우유부단한 자유주의의 변호론자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를 요약하는 명칭이 다름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하지만 자기미화나 자기변호에 서툴렀던 그가 결연히 반대한 호칭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점에서, 이 모든 비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이런 류의 비판들은 이러저러한 이데올로기적 알리바이로 봉사해왔을 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하나의 사건은 오직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기존의 관습, 기존의 제도를 초과하는 "도착적인 수행적 행위"(perverformatif)의 위험을 무릅쓸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행위, 따라서 모든 결정(décision)에 깃들어 있으며, 타자들에 대한 환대, 타자들의 부름에 대한 절대적 호응만이 결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엊그제 전해진 그의 부음은 실은 아직 하나의 사건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데리다라는 유령을 환대한 적이 없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그의 유령들의 부름에 귀기울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라는 사건, 아마도 결코 현재화하지 않을 그 사건은 장래의 사건으로, 도래할 사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사건을 사건화해야 하는 과제,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애도의 과제, 환대의 법칙이 명령하는 무한한 책임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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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2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사망 소식 이후 이런저런 매체에서 원고를 부탁해왔는데, [교수신문]에 실을 원고를 하나 올립니다. 이런 것도 추모의 글이 될지 좀 걱정스럽긴 한데,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버렸군요.^^

쎈연필 2004-10-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글 고맙게 잘 보고 있습니다. 퍼갑니다...

balmas 2004-10-1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aporia 2004-10-1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바쁘시겠지만 선생님 같은 분들의 글이 최대한 많이 보이는 게 데리다를 애도하는 올바른 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최원님의 게시판에 들르니까 발리바르가 쓴 추도사를 번역하셨더군요. 이렇게 그에 관한 글들을 보니까 서서히 그가 정말 떠났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하네요. 하지만 슬퍼하고 애도하는 건 이제 막 시작된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봅니다.

릴케 현상 2004-10-1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프린트해서 읽어야겠다^^

balmas 2004-10-13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시님, [우정의 정치]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낸 다음 번역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기다려보세요.
아포리아님, 인터넷을 통해 대략 훑어본 인상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역시 좌파쪽에서 진지한 애도의 표시들을 하더군요. 발리바르 번역글은 최원님 게시판에서 퍼왔습니다.
자명한 산책님, 추천 감사.^^
 

데리다에 관한 기사들을 살펴보다 보니까 좀 뜬금없는 기사들이 보입니다.

 데리다가 미국 신문에서 토끼 스튜 요리를 "해체된 토끼"(deconstructed rabbit)라고 표현한 걸 보고서 경악했던 적이 있는데,

데리다 사망 이후  갑작스런 데리다 유행이 그런 걸 닮아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기자의 눈] 갈등의 시대와 데리다의 '입장 바꾸기'
[서울경제 2004-10-11 16:36]
#상황1.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고교등급제와 행정수도 이전 등을 둘러싸고 사회갈등이 확산되고 있고 국가보안법ㆍ과거사진상규명법ㆍ언론관계법ㆍ사립학교법 등 4대 개혁법안의 입법을 앞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상황2. 하루에 200곳이 넘는 단체가 서울시내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한다.

진보와 보수, 수도권과 지방, 강남과 비강남,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서로 다른 쌍들은 갈등을 풀기보다는 각자의 몫을 챙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툼의 뿌리는 갈등에 있지만 갈등의 씨앗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에 있다.

한 입장만 고수하면 사고가 경직되고 사회제도도 경직된다.

그 끝은 사회적 폭력으로 분출된다.

이라크 전쟁도 그렇고 집회가 폭력으로 마무리되는 것도 그렇다.

오늘도 400쌍의 부부는 나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을 풀기보다는 관계를 끊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프랑스가 배출한 사상계의 거목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지난 9일(현지시간) 7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평생 동안 ‘차이가 동일성에 앞선다’는 말로 ‘입장 바꾸기’를 주장해왔다.

자기 입장만을 강요하는 동일성보다는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한번 더 생각해보는 입장 바꾸기를 실천해야만 인류의 평화와 개인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이는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달라도 이를 인정해주는 프랑스의 보편적 가치인 이른바 ‘톨레랑스’와 맥락이 닿아 있다.

데리다는 노무현 대통령 같은 지도자에게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맞게 각각의 차이를 포용하고 조화해나가는 노력과 통솔력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우리 선조들도 생활 속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실천해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잊고 살았다.

‘상대방을 한번 더 생각하자’는 데리다의 외침이 절실하게 와닿는 것은 기자만의 간절함일까.

 

<이승재기자의 보험플러스>車보험 대물보상한도 올릴 필요있나
[문화일보 2004-10-12 15:23]

 

한글날이었던 지난 9일 실천의 철학을 몸소 행했던 프랑스의 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숨졌습니다.

‘난해하고 도발적’인 그의 철학세계는 서양 철학의 흐름을 거 스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평생 주장하며 행동에 옮겼던 ‘해체 주의’는 수천년간 내려온 서양 중심의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서양 중심의 철학은 ‘텍스 트(글의 형식)’라는 함정에 빠져 그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겁니 다.

갑자기 죽은 ‘반골 철학자’의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자동차보 험의 최근 추세 중 ‘반기’를 들고 싶은게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동차보험을 들 때 대물보상한도를 5000만원, 많게는 1억 원까지 올리라는 권고를 받으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보험사 대부분은 “외제차가 많이 늘어났는데, 자칫 고가 외제차 와 접촉사고가 날 경우 수천만원을 자기 돈으로 낼 수 있으니까 대물보상 한도를 올리시죠. 1만~2만원만 더 내면 안심이죠”라고 권합니다.

얼핏 듣기에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타는 시가 7억2000만원짜리 ‘마이바흐 62’에 흠집을 낸 ‘대형 사고’의 예를 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를 내고 보험금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국회 국정감사에서 박영선 열린우리당 의원이 손해보험사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03회계년도(2003년4월~2004년3월)에 500 0만원 이상 대물 보험에 가입한 운전자는 205만9000명으로, 2002 년 96만9000명에 비해 무려 112.5% 증가했습니다. 올해 1·4분기 에만 92만4000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정작 보험사가 5000만원 이상의 보험금을 지급한 사례는 2002년과 2003년에 각각 10건, 올해에는 겨우 2건입니다. 잘 판 단하셔서 1만~2만원이라도 아끼시기 바랍니다.

이승재기자 lee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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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음이 나와야 정상이죠.
어이가 없어서, 참내 ...

릴케 현상 2004-10-1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냥 얼떨떨하기만 하고 웃음은 안 나오네요

aporia 2004-10-1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해체된 토끼"를 보고 데리다가 경악하는 장면이 떠올라서, 그리고 아마 이 글들을 보고 데리다가 보일 비슷한 반응이 떠올라서 웃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저도 퍼갑니다.

숨은아이 2004-10-1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balmas 2004-10-13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황당하죠???

MANN 2004-10-16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원... -_-;;;
황당하다는 말 밖에는.......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타계
[한겨레 2004-10-10 19:00]
[한겨레] “권위에 맞서라” 한평생 실천적 삶
9일 지병으로 숨진 자크 데리다는 일체의 권위에 맞서 그 모순을 폭로하는 데 평생을 바친 실천적 철학자다. 해체주의로 대표되는 그의 난해한 사유체제는 인류문명 전반에 걸친 근본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이론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생전의 다양하고도 정력적인 현실참여는 해체주의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웅변했다.

고인은 1930년 7월15일 프랑스령 알제리 엘비아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2년 10월, 식민지와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관련된 법을 청원했다는 이유로 알제리의 벤 아크눈 국립고등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사춘기의 혼란은 폭넓은 독서로 이어졌고, 몇년 뒤 파리로 간 그는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를 거쳐 프랑스 인문학의 산실인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80년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한차례 낙방 끝에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해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재직했고, 알튀세르 등의 초청으로 1965년 모교인 고등사범학교로 자리를 옮겨 1984년까지 가르쳤다. 1983년엔 국제 철학학교를 만들어 초대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자명한 ‘진리’·위계질서 전복 시도
문학·영화 넘나들며 노벨상 후보로
미테랑 “당대 최고 철학자” 찬사도

1981년 체코의 저항 지식인들과 모임을 연 뒤 체코 당국에 체포·구금됐고, 이후에도 넬슨 만델라 구명운동과 인종차별 및 동성애자 차별 철폐운동에 참여하는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아랍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근에도 걸프전과 9·11 동시다발테러, 유럽통합 등에 대해 발언하며 실천적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철학이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이유는 기존의 정돈된 철학적 체계나 용어, 고전적 문체 등을 스스로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데리다의 사유가 근대 인류문명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진리’와 그로 인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전복을 시도한 데서 비롯됐다. 이런 탈현대의 문제의식을 데리다는 ‘해체’라 이름 붙였다.

데리다는 서구적 근대의 밑바탕이 되는 저작과 학설들이 불안정한 언어와 모순되는 층위로 구성돼 있고 이로 인해 그 내부로부터 해체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냈다. 정신과 물질, 보편과 개별, 남성과 여성 등 합리주의의 기본개념인 대립항 구조는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것을 주변화하거나 억압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해체이론은 플라톤 이후 서양 지성사를 분해해 기존의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동시에 인류의 새로운 인식지평을 개척한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데리다는 철학 외에도 문학과 건축, 영화, 회화 등 다양한 예술영역에 해체론을 적용하거나 스스로 예술작업에 참여했으며, 그 업적을 인정받아 올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마르지 않는 지적 열정과 자유로운 사유는 〈차이와 반복〉 〈그라마톨로지〉 〈마르크스의 유령들〉 등 수백편의 저술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미테랑 전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당대 최고의 철학자’라는 찬사를 바쳤지만, 데리다의 사유가 다다른 지평을 고려하자면 그 업적은 인류 역사의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것 가운데 하나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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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0-1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아래쪽 책제목 중에서 <차이와 반복>은 <기록과 차이>의 오기인 듯합니다.


갈대 2004-10-10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는 전혀 모르지만 또 하나의 큰 별이 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리다의 철학을 정리하는 작업이 뒤따랐으면 좋겠네요.

balmas 2004-10-1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는 이름은 널리 알려졌는데, 그의 사상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죠. 우선 읽을 만한 그의 저서들이 좀더 많이 번역되어야겠죠.

바람구두 2004-10-1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업적은 인류 역사의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것 가운데 하나다." 란 말이 가시처럼 걸리네요. 죽은 이에 대한 헌사란 점에서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balmas 2004-10-1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사람에 따라서는 그 정도의 찬사도 보낼 법하다고 보지만,
문제는 우리가 무슨 권리로,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일 듯합니다. 거의 모든 신문들이 데리다 사망 기사를 속보로 내보내고, 상당한 지면들을 할애해서 추모 겸 해설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만, 국내의 맥락에서 본다면 좀 뜬금없는 일이죠. 읽을 만한 책들도 거의 없는 실정인 데다가 이미 대부분의 신문들은 데리다와 관련하여 원죄를 범하고 있거든요. 읽을 수도 없는 번역에 낯뜨거운 찬사를 늘어놓거나 여태 그의 철학(의 의의)을 소개하는 별다른 기사도 제대로 내보낸 적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제 오늘 신문들에 난 데리다 기사를 읽으면서, 떠들썩한 술판(과 도박판)으로 흥이 오른 초상집 풍경을 떠올렸습니다만(내가, 무슨 권리로??), 어쨌든 이런 애도의 모습들이 앞으로 국내에서 데리다의 철학이 좀더 잘 수용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바람구두 2004-10-1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1992년 아직 맑스 원전 한 권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 갓 입학한 신입생 녀석이 입에 "데리다와 해체"를 달고 살더군요. 제 개인적으로 데리다에 대해 사실 거의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알지 못함에도 우리나라에서 데리다에 대한 열풍이 첫단추부터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 계기가 그때부터라고 하면 너무 겁없는 말일까요? 발마스님이 퍼온 한겨레 기사를 보면서 제 기분이 묘했던 것은 죽은 사람을 조상하는 방식이 장자의 마누라 죽은 뒤에 푸닥거리하며 즐거워하는 장자를 이해 못하는 꼴 같아서 입니다. 제가 데리다를 읽으려면 아직도 십여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balmas 2004-10-12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말씀이 일리가 있군요. 데리다가 국내에 최초 소개되던 맥락은 국내의 데리다 수용의 또 하나의 원죄적인 장면이죠.

데리다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던, 또는 오히려 하나의 붐(제 친구 하나가 군대에 있던 때인데, 잘 알고 지내던 장교 한 사람이 영역본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읽고 있던 이 친구에게 그랬다고 하더군요. 자기 부인이 요즘 데리다에 관심이 많아서 자기까지 시달리고 있다구요)을 이루던 90-92년 당시는 주지하다시피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하던 시기였죠. 그러니 데리다는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국내에 도입된 셈이고,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운동으로부터의 도피에 하나의 알리바이를 제공해주고,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간접적인 변호, 또는 적어도 증언을 자청한 셈이 되었죠.

그런 만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데리다(및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일반)에 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주적으로까지 간주하는 게 전혀 그릇된 일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는 국내 데리다 수용의 이러한 맥락에 대한 검토 없이는, 데리다에 대한 "적절한" 수용, "올바른" 애도는, 불가능한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매우 힘든 일이 될 듯합니다.


바람구두 2004-10-1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의 이 코멘트 별점을 매기라면 최소한 별 다섯을 드리고 싶군요. 전면적인 끄덕끄덕...입니다.

MANN 2004-10-16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92년에도 데리다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니
'데리다가 그렇게 일찍 소개되었단 말인가?' 라는 놀라움과
'그런데 10년이 넘도록 동안 제대로 번역된 책도 거의 없었는데, 그동안 데리다에 대해 뭘 한 거지?'라는 당혹감이 들었는데
발마스님의 코멘트를 보니 이해가 가네요.

한국의 좌파들이 왜 데리다(그리고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대해
왜 그렇게 이를 박박 가는지도요.

balmas 2004-10-1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92년 쯤 데리다 붐이 있었지.
결국 읽을 만한 책들이 별로 없어서 얼마 못가 사그라들었지만.